눈에 익숙한 것만 믿으려는 습관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능에서 시작하여 학습으로 사물을 판단한다. 본능은 5관으로, 즉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맏고, 하면서 현실을 감지한다. 그러면서 뇌활동에 고착되는 것이 습관이고, 이에 따라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기반은 믿는 것이다. 전에 그렇게 감지했더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경험을 말한다. 


만일에 어린이가 접하는 환경에서 5관이 활동하여 체득한 믿음이 다른 세상일 경우에는 그 세대를 산 선임자들과 다른 믿음을 가지지 않겠오? 왜냐하면 그들과 다른 여건의 환경이다 보니 당연히 다른 경험을 체험한 사고방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이처럼 굳어진 생각 또는 믿음을 좀처럼 바꾸기가 매우 힘들다는 데에 있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나올 정도다. 내가 오늘날의 좌파랍니까? 종북 주사파의 생각과 행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이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환영받는 더불어文主黨의 "이게 나라입니까"의  개판정치가 문제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들은 자신이 믿었던 것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기독교에서는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한다. '희부리書'의 11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實狀(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證據(증거)니, 先進(선진:Senior)들에게 이로써 좋은 立證(입증)이 되었노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쉽게 말해서, 눈 앞에 뭣이든 어른거리더라도, 내가 '어떻게 믿기로 작정한 것이 곧 현실이다'라는 거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반석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믿음의 기초다. 실제로 세상의 많은 일들이 자기가 믿는 대로 정말로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예를 수없이 경험한다. 궂이 예수를 믿거나 말거나...절에 가서 불공을 들였다.  아니면 장독 위에 물을 떠놓고 빌었다고 하자. 뭔가를 절실히 소원했더니 현실화 되는 어떤 것들을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세계가 바로 신앙의 영역이다.

 

이런 현상을 佛家(불가)에서는 幻覺(환각:Hallucination), 혹은 Illusion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서 "헛 것을 본다"는 거다. 소위 色卽是空(색즉시공)이라는 般若心經(반야심경)의 한 말씀...  그러니 事物(사물)의 本體(본체)를 보라. 평생에 불공을 통한 어떤 세상을 살았던 결과가 뭐냐? 결국은 生(생)이란 없었던 無(무)에서 왔다가 재와 연기로 돌아가는 허무한 것이란다. 그러니 삶의 어떤 것에 애착을 가지지 말라. 0 즉 zero를 창안한 인도철학은 否定(부정)에서 출발한다. 거기에 중국의 變化(변화)사상과 짬빵이 되어서 이런 空卽是色(공즉시색)이란 개념이 나왔던 것이다.

 

서양적인 것에서는 '에덴'동산의 낙원이란 완전한 곳으로, 동양적인 것은 반면에 불완전한 곳에서 다시 無한 본체로 돌아가겠다고 염원하는 것과 같다. 앞의 것을 混沌(혼돈: Chaos)에서 秩序(질서: Order)로의 積極性(적극성: Positive)을 말한다면, 후자는 消極的(소극적: Negative) 혹은 否定的(부정적)으로 볼 수있다.  

 

그런데 우리는 東洋(동양)에서 태어났고 西洋式(서양식) 교육을 받아서 현재를 살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 살지 않더라도 서양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몸이 어디에 있던지 精神的(정신적)인 混亂(혼란: Confusion)을 경험하고 산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들은 Seeing하는 주체자로서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믿는 행위에 엄청난 壞離(괴리:Discrepancy:서로 어긋남)를 피할 길이 없다.

 

한 예를 들어보자.  

 

기원 전 369년-286년 (중국 전국 시대)에  莊子(장자)란 분이  송(宋)나라 몽(蒙; 현재의 안휘성 몽성 또는 하남성 상구 추정)에 살았다 한다. 그의 유명한 같은 이름의 책에 이런 일화가 쓰여있다.

 

어느 여름 날에 장자가 친구와 함께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장자에게 큰 잉어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거~ 참, 그 잉어 한번 행복해 보이는구나"라고 혼잣 말로 중얼거렸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하는 말이, "자네가 잉어가 아니거늘 저 물고기가 어찌 행복하다고 하는가?" 이 말을 받아서 장자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그렇게 봤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나?

 

"사물을 보는 主體(주체)가 누군가"를 묻는다.  Seeing is believing...  莊子는 그렇게 봐서 행복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그의 친구는 장자가 믿었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러다 보니 세상살이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모두들 자기가 알고 경험한 것들의 범주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을 가늠하여 이렇쿵 저렇쿵하는 것이다. 아예 입을 다물고 살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함이 바로 이런 데에서 연유한다.

 

오래 전에 한 친구가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이 개인기업이며, 미국이 일본과 중국을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넣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의견을 고집했다. 내가 작으만치 3시간에 걸친 긴 전화 통화로 그게 아니란 것을 설득했으나 허사였다. 이즈막에 어떤 이가 문재통을 당선시킨 촛불시위가 실을 국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주체사상파들의 농간이었다고. 


다시 말해서, "그는 왜 세상을 否定的(부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를 더듬어 살펴야 했다. "이런 엉뚱한 생각들에 궂이 동조해야 하는 이유가 뭔가? 그의 私生活(사생활)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건가? 왜 세상을 보이는 그대로 믿지 않으려 하는가? 


문론 사실과는 거리가 멀 수있다. 내 認識(인식)이라는 것은 나 대로의 좁은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생각이 어찌 꼭 옳다고 하겠는가? 내가 도리어 Negative하게 생각하는 것이나 아닐지? 하여간에 사람들의 생각이란 이처럼 허무맹랑하다는 얘기다.


특기할 것은 사람이 살다가 fight or flight, 즉 '싸울 것인가, 아니면 도망칠 것인가'하는 급박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정신이 나가서 판단이 흐려지며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다. 그 이유는 '아드레나린'이란 홀몬이 머리로 흐르던 피를 팔 다리로 몰리게 해서 위험을 피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되고 눈 앞이 캄캄해지며 허둥대게 마련이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한가지 깨닫는 것이 있다면, 내가 내 눈으로 본 것이 반드시 옳지가 않더라는 확신이다. 그 때는 너무나 확실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렇지가 않더라. "자신이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니 세상에 어떤 것인들 꼭 애착을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自由人(자유인)을 들먹이게 된다. 다~ 그렇고 그랬고, 또 지금은 그렇더라. "헛되고 헛되노니 모두가 다 헛되다" 하는 말이 옳커니...


禪涅槃

7/2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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