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62회] 3선개헌, ‘민주주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

2019.04.23

3선개헌의 걸림돌이었던 JP계의 ‘내부정리’를 마친 박정희는 본격적으로 개헌을 추진했다. 


1968년 12월 17일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이 부산에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이같은 지상명제를 위해서는 대통령 연임조항을 포함한 현행헌법상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것이 연구되어야 한다.”면서 금기된 3선개헌의 물꼬를 텄다.


박정희는 1969년 7월 25일 "여당은 빠른 시일 안에 개헌안을 발의해 개헌추진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박정희는 이승만과 유사한 ‘건널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무리수를 던진 것이다. 


7월 28일 공화당은 백남억 정책의장이 마련한 3선연임 허용과 국회의원의 각료직 겸직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 골격을 확정한 뒤 소속의원들에 대한 설득작업에 나섰다.


개헌안은 공화당 의원 108명, 정우회 11명, 신민당 의원 3명 등 모두 122명이 서명하여 국회에 제출되었다. 서명 과정에서 청와대, 중앙정보부 등 권력기관이 총동원되어 JP계 의원들을 협박과 회유로 끌어들이고,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등 신민당 의원들까지 변절시켜 개헌대열에 끌어들이는 ‘솜씨’를 보였다. 이승만보다는 많이 ‘근대화’된 수법이었다.


그러나 당총재를 지낸 정구영과 예춘호ㆍ양순직 의원 등이 끝까지 개헌안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공화당은 107명이 서명했다.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영입되었던 올곧은 법조인 출신 정구영은 권력의 모진 압박에도 끝내 3선개헌 반대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야당인 신민당은 변절자들의 의원직을 자동 상실케 하기 위한 편법으로 9월 27일 당을 해산했다가 20일 복원시키면서 이 기간 동안 신민회란 이름의 국회교섭단체로 등록했다. 


신민당 유진오 총재는 “3선개헌은 민주주의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이며, 이 다리를 넘어서는 날에는 평화적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되찾을 길이 영원히 막힐 것” 이라며 개헌저지 투쟁에 나섰다. 개헌반대 진영은 야당뿐 아니라 학생, 문인, 종교인 등 양심적인 다수의 국민이 참여했다.


30일 간의 공고기간이 끝난 개헌안이 9월 13일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자 신민당 의원들은 표결저지를 위한 단상점거에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이날 자정 이효상 국회의장은 “13일 본회의는 자동적으로 유회됐으므로 월요일인 15일에 본회의를 열 수밖에 없다.”고 선포하고 본회의장에서 빠져나갔다.


신민당 의원들이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고 있을 때 광화문길 건너편 국회 제3별관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9월 14일 새벽 2시 30분, 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이효상 의장의 사회로 단 6분 만에 개헌안을 변칙처리한 것이다. 


국회주변 반경 5백여 미터에 1천 2백여 명의 기동경찰이 엄중하게 통행을 차단하고 있는 가운데 개헌지지 의원들만으로 개헌안을 처리한 것이다. 그야말로 신종 쿠데타적 수법이며 역대 개헌사에서 가장 비도덕적인 개헌안의 처리였다. 


1969년 9월 15일자 경향신문.


부산 5ㆍ25정치파동, 그리고 4사5입 개헌파동에 이은 세 번째의 변칙 개헌이었다.


공화당이 본회의장을 옮겨가면서까지 변칙적으로 개헌안을 처리한 것은 형식상은 야당의 단상점거 때문이라고 내세웠지만, 실상은 내부의 이탈표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김종필계 일부에서는 여전히 3선개헌을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치기의 주역은 교수 출신 이효상이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 중에 있던 신민당 의원들은 뒤늦게 변칙처리의 사실을 알고 현장으로 뛰어가 가구와 집기 등을 마구 때려 부쉈다. 하지만 역시 기차 떠난 뒤의 돌던지기였다. 


개헌안을 변칙처리한 이효상 의장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의장직 사퇴서를 제출하는 등, 여권은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냈지만 야당의 분노를 쉽게 달래기는 어려웠다. 


개헌안의 국민투표를 앞두고 공화당의 지지유세와 신민당의 반대유세가 전국적으로 진행돼 국민적인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공화당은 “안정이냐 혼란이냐, 양자택일을 하자”고 내세우고, 신민당은 “개헌안 부결로써 공화당정권 몰아내자”면서 국민의 지지를 호소했다.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구성되어 개헌저지 투쟁에 나서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궐기하는 가운데 10월 17일 개헌안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율 77.1%, 최종집계 결과 총 투표자 1,160만 4,038명 중 찬성 755만 3,655표, 반대 363만 6,369표, 무효 41만 4,014표로써 개헌은 확정되었다. 


개헌안 국민투표 과정에서 정부ㆍ여당에 의한 각종 부정과 관권동원이 자행되고 투ㆍ개표과정에서도 무더기표 등이 발견되는 등 각지에서 부정이 나타났다. 개헌반대 투쟁을 일선에서 지휘해오던 유진오 신민당 총재가 9월 10일 뇌동맥경련증으로 몸져누우면서 국민투표를 이틀 앞두고 10월 15일 특별성명을 통해 “부정과 불법을 막아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민권투쟁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개헌안이 압도적으로 통과되자 10월 19일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책임과 신병을 이유로 신민당 총재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히고 신병 치료차 일본으로 떠났다.


3선개헌 반대 투쟁 과정에서 신민당 장준하 의원은 박 대통령을 “사카린 밀수왕초”, “한국청년의 피를 베트남에 팔아먹었다”는 등의 발언을 해 대통령 명예훼손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로써 박정희는 종신집권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이후의 역사가 보여준대로 유신쿠데타와 긴급조치 등 더욱 철저한 헌정유린으로 나아가게 된다.


국민복지회사건으로 공화당에서 쫓겨난 김용태는 개헌안 국회 표결을 앞둔 어느 날 청와대에 호출되었다. 김용태의 증언.


“각하! 괴롭고 고되기만 한 정치 그만하시고 농장이나 하시면서 글이나 쓰시는 것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래! 자네 말 그대로야!”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해보고 있지! 이제는 나라살림을 누가 한들 되지 않겠나?…”


“각하!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간 같습니다. 역사상 위대한 기록을 남기십시오. 국가원수란 외롭고 괴로움만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자유로운 자기 생활로 되돌아가시지요!”


“우리 집사람도 밤낮 자네와 꼭같은 이야기만 하는데 사무실에만 나오면 딴판이란 말일세!”


박 대통령께서는 고민하고 있는 것이 역연했다. 나에게 좀더 설득력이 있다면 3선개헌 작업을 중단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한가닥 희망도 품어 보았다. 주변의 아첨배들 모습이 눈앞에 스치며 대통령의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들의 권력을 누리기 위한 사람들의 간교하고 무서운 음모의 분위기가 대통령 주변을 감돌고 있는 것 같았다. 


“김의원! 자네는 나와 같이 5ㆍ16혁명 때 목숨을 다짐했던 사이가 아닌가! 나의 결심이 오판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나를 좀 도와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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