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주의 사상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즈음 사회주의를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정치인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꽤 많은 진보성향의 선거 후보자들이 자신이 당선되면 정부 주도하에 정부가 직접 가난한자들과 병든 자들과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하겠다고 공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정말 문제되는 것은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이 성경으로부터 나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후보는 사회주의를 통하여 기독교 신앙을 되찾았다고 말하고 다니기도 합니다. 약자들을 생각해주는 사회주의적 사상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등의 발언들을 공개적으로 하면서 사회적 소수자들과 가난한자들을 돕지 않는 현재의 교인들은 위선자들이라고 임의로 판단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염려스러운 것은 실제로 선거 구민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억눌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유는 부자에 속한 다수의 기득권층의 집단적 욕심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제대로 적용시킨다면 훨씬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진보적 성향을 가진 성직자들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공동체 삶을 근거로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면 공산주의가 가장 적합한 실천모델이라고 역설하는 경우도 꽤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경공부대신 공산주의 이론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기독교와 사회주의 결합이 이론과 실체의 결합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즉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공동체에 관한 말씀의 실현이 공산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까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인류에게 남긴 역사적 흔적들과 성경의 원리와 방향을 비교하면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또는 진보주의라고 알려져 있는, 명칭은 다르고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통적 이념 기반을 갖고 있는 이러한 사상들이 기독교와 얼마나 다르고 차이가 많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결론부터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기독교와는 공통점도 없고 상호보완 될 점들이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은 기독교와는 뿌리도 다르고 열매도 운영체제도 완전히 달라서 연결될 공통점이 전혀 없고, 동시에 상호보완이 전혀 안되기 때문에 양립할 수조차도 없어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임의대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선전도구로 이용하거나, 자기들을 스스로 높이는 발판으로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속된 속성을 가리고 미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거나, 교회 안으로 들어와 혼란과 혼동을 유발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연합이 불가능합니다. A. 연합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뿌리가 다르고, 종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의인들만 살고 있다면 이곳이 곧 천국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살고 있으면, 아무리 대량 살상용 총칼이나 무기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도 사람들이 칼에 찔려 죽거나 총에 맞아 처참하게 살상 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약이 널려 있어도 먹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분이 지배자이면 피지배자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왜냐고요? 예수님의 개념으로는 지배자는 섬기는 자이고 피지배자는 섬김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 26-27) 재물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의 주머니에 얼마나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사람들만 사는 사회에서는 누가 돈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지 상관없이 그 돈은 필요한 곳으로 즉시 전달되어 필요한 만큼 적절하게 사용되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부자이고 누구는 가난하다는 불평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죄성(sinful nature)을 가지고 나온 모든 인간들에게는 처음부터 어느 누구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선함을 기대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모든 인간들은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언제나 초점을 사람 자체에 맞추고 있고, 신자들, 곧 이미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가난이나 불공평의 문제도 이와 같은 시각에서 해결하려는 것이 정상적인 기독교입니다. 가난한 이웃이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상태이면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지극히 감사한 마음으로 전달해 주면 될 것이지만, 혹시 약물 중독이나 도박성이 가난의 원인이라고 판단되면, 돈 문제를 해결해 주기에 앞서 그 사람을 약물 중독이나 도박성으로부터 구해 주는 일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가난의 원인이 잘못된 인간성에 기인했다고 판단되거나, 죄악에 물든 생활습관이나, 또는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위협적이고 불만과 불평의 언행으로부터 기인했다고 판단되거나, 거짓말이나 신용 없는 행동이 가난의 원인이라고 판단되면, 우선적으로 그 원인이 되는 잘못된 마음을 고쳐주고, 잘못된 언행을 바로 잡아주는 작업부터 실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치료자이시고, 도움자이시고, 주권자이시고, 은혜 베풀기를 원하시고, 권능과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악인을 선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선교는 원칙적으로 먼저 구원자 예수를 만나게 해주고, 그 다음으로 그때그때 필요한 재정과 같은 환경적 도움을 주는 작업이 추가 되거나 병행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하고 곤고하고 곤핍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이웃들을 향한 기독교가 지향하는 진정한 사랑의 선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타락하여 죄로 물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기독교의 뿌리이고, “타락한 인간의 구원과 교육과 양육”이 선교의 우선적 초점입니다. 왜냐하면 사회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구원을 받아 죄악의 길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가면 사회는 자연스럽게 평화와 안전과 기쁨이 넘치는 곳으로 변모되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는 기독교와 반대입니다. 사회주의자의 견해로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고 사회전체에 있는 것입니다. 즉 사회주의의 뿌리는 “인간은 선하지만, 사회가 악하다”는 인본주의이고, “불합리한 사회의 개혁”이 사회주의 운동의 우선적 초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일단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사회를 개혁하여 일방적인 착취가 없는 평등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사회주의 운동의 최우선 목표인 것입니다. 특히 공산주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생산수단의 공유뿐만 아니라 공정한 분배를 통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없는, 모두가 균등하게 잘 사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이념입니다.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공평하게 분배함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면 모두가 평화롭게 서로 도우며 화기애애하게 잘 살아 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공유와 공평한 분배를 통하여 모두가 평등해지면 모두가 행복할까요? 그럴듯하게 들리는 주장이지만,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회 구원을 이루어 이상향을 만들었다 할지라도 구원된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무조건적으로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사회적 악조건 속에서도 기쁘고 감사하고 자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회가 안정되고 풍요로워지고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있게 되면 사람들은 도리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에 빠지게 되곤 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초호화 궁궐 안에서 엄청난 재물과 막강한 권세를 누리면서도 불평, 불안, 초조, 걱정, 시기, 질투와 미움으로 꽉 차 있으면 지옥에 사는 것과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행복을 누리기까지의 과정에서 “인간구원”은 꼭 필요한 필수요소이지만, “사회구원”은 필수요소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기독교적 사회주의 주창자들이 “사회구원과 인간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인간구원과 함께 사회구원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성경 말씀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주장입니다. 성경은 사회를 개혁하는 운동을 하라고 권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신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공법이 물같이 흐르고 정의가 하수같이 흘러가는 사회”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사회정의를 세우는 운동을 하라고 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한 사람”이라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면 사회가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하나하나가 각각 세상의 각 처소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사회구원의 성서적 방법입니다. “나부터” 죄악의 길에서 벗어나서 의의 길로 걸어가면 되는 겁니다. “한 사람”이라도 의인이 있으면 곧 무너져야 할 예루살렘성이지만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약속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그냥 가만히 계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일하시고 계신 분입니다. 오직 문제는 하나님이 도구로 쓰실 수 있는 “한 사람의 의인”을 찾을 수 없어서,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택하신 사람들을 “의인”들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비록 나 한사람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속한 사회를 차츰차츰 정의가 하수같이 흘러가는 사회로 개혁시켜 주실 것이고, 나를 통하여 가난한자들도 한사람씩 구원해 주실 것이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아 행복을 다 함께 누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원인이 내 자신이고, 문제해결의 시작이 “나부터”라고 생각지 아니하고, “나 이외의 다른 요인들”로 인하여 어려움이 온다는 생각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의 동조자들입니다. 즉 불의하고 불합리고 빈부격차와 차별과 다툼과 악이 성행하는 사회가 선한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에, 먼저 일단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놓으면, 그 사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 즉 애초부터 선한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이 선해지고,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며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하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보면 사회주의는 모든 인간은 누구나 처음부터 선하고, 완벽하고, 착하고, 책임질 줄도 알고, 지식도 있어서 심지어 신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존재해야 된다고 주장했던 인본주의로부터 시작된, 기독교와 반대되는 완전히 다른 이념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고 믿고, 택함 받아 훈련받고 변화되고 양육된, 진실 된 한 사람의 신자를 중요시하는 기독교에 뿌리를 둔 사상체계가 아님이 명백합니다. 이런 인본주의적 자세는 구체적으로 미국의 총기사고 문제에 관한 견해차에서도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진보라고 일컫는 사회주의자들은 어쩌면 정말 한 결 같이 총기사고의 원인을 총기 자체라고 규정하면서 총기규제만이 해결책이라고 목이 터지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칼로 대량살상을 하는 것은 무엇으로 막을 것이며, 트럭이나 버스로 붐비는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대량으로 살상하는 행위는 어떻게 막을 것입니까? 칼이 문제라서 칼 규제? 트럭이 문제니까 트럭규제? 버스규제? 문제는 총기나 칼이나 트럭이나 버스가 아니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량살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일상적인 도구들은 총기 이외에도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세상이 자기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원망하면서 자기를 불행하게 만든 세상 사람들을 모두 한꺼번에 죽여 없애고 싶다는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을 총기규제만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은 “사람 자체가 첫 번째 원인”이라는 원인분석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기독교와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즉 사회주의는 기독교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기독교의 실천도 완성도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인간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단지 사회가 문제를 만들기 때문에 사회만 개혁하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잘못 진단하고, 잘못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 잘못된 이념입니다. 기독교와는 뿌리부터 완전히 별개의 다른 이념체계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맞닿을 수 있는 어떤 연결점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사회주의자들의 일견 그럴듯한 논리와 주장에 영향을 받거나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B. 연합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열매 맺는 방법도, 열매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지는 과정을 통하여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각자가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 사랑을 “자기가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 기독교의 열매 맺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의해서 거저 구원받았음을 깨달은 기독교인들은 자진해서 이웃을 위하여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삶을 살면서, 믿는 이웃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라 서로 힘이 되어주고, 위로해주고 이끌어 주면서 함께 힘을 합쳐 예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자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 사랑으로 인하여 아무런 공로 없이 거저 구원받은 우리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감사한 마음으로 자진해서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원리를 따라 궁핍하고 곤란하고 억눌리고 헐벗고 힘들어 지쳐있는 이웃을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한 자세입니다. 즉 억지로 돕는 것이 아니라, 공로 없이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어려운 이웃들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드린다.”는 생각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즉 내가 자진해서 이웃을 위하여 내가 마땅히 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원리가 적용된 사례가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한 아이의 작은 희생이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해 준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자신을 위하여 준비해온 도시락을 자기가 먹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의 자제들 앞에 내어 놓았습니다. 즉 한 아이가 이웃들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려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그 도시락을 건네받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시자,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그 작은 도시락 하나를 통하여 그 당시 굶주렸던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게 하고도 12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큰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신명기에서도 이와 같이 십자가로 가난을 해결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 15:4, 5, 11) 곤란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은 항상 있을 것이나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 사랑을 실천에 옮기면 가난 문제가 해결된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어쩌면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는 평범한 진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누군가 십자가를 진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도 지는 방법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반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십자가는 오직 스스로 지는 “자기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4). 신명기 15장 말씀도 각자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라고 준 것이지, 남에게 적용시켜 행동을 강요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가 기꺼이 자진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어나게 만들었던 아이처럼, 소유가 많든 적든, 스스로 자원하여, 가진 것을 곤란한 자나 궁핍한 자들과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혹시 내 십자가를 다른 사람보고 지라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까? 즉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지면 될 짐을 남에게 지고 가라고 요구 한다면 그 단체나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또 당당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라고, 즉 십자가를 지라고, 강요한다면 문제가 잘 해결 될 것 같습니까?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일이라도, 남들의 강요로 억지로 해야 한다면, 아마도 억압과 무력과 억울함과 분함으로 큰 사회적 물의가 일어나서 결국 심한 다툼이 일어날 것이고 나중에는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로 엄청난 반발과 미움과 복수와 공포로 휩싸일 것입니다. 각자가 자원해서 남을 위하여 십자가 희생을 하면 천국이 되는 것이고, 이유야 어찌되었든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대신 남에게 지워주고 그에게 십자가 질 것을 강요하면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동일한 희생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누가 어떻게 지는가에 따라 결과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분명코 기독교의 명백한 행동규범은 사랑의 십자가를 “각자가 스스로” 지는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짐으로 사랑과 화평의 열매를 맺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재물을 많이 가졌으면서도 남을 도울 줄 모르면? 상관 할 것 없습니다. 자기 할 일만 하면 됩니다. 오병이어 소년처럼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하면 되는 것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기독교와는 정반대입니다. 사회주의의 속성은 십자가를 자진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이라는 수단으로 남들에게 십자가를 지워주는 것과 남이 진 십자가의 혜택을 당당하게 누리자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내가 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을 남에게 지워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를 외치는 자들이 기회만 생기면 그들 보기에 부자들과 그들 판단으로 기득권층에 있는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면서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쉽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계급투쟁을 외치는 경우를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지런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서 모은 합법적 재산이라도 자기보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을 부도덕한 욕심쟁이 악인으로 매도하면서 타도해야 된다고 압박을 가하고 선동합니다. 왜 그러지요? 처음부터 자기는 남들을 도와야 될 사람들의 명단에서 제외시켜 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희생적으로 도울 생각은 안하고, 부자들이 도와야하고, 기독교인들이 도와야 하고, 교회가 도와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남들에게 도움을 주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마치 자기가 돕는 것처럼 자기를 내세웁니다. “돕게 만드는 것” 자체가 대단히 큰일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또 대단히 큰 공로로 오해하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자기 소유를 내어 놓고 솔선해서 도움을 줄 생각은 아예 없습니다. 사회주의적 사고를 가진 정계 지도자들을 보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상스럽게도 대부분이 상당한 수준의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고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가 희생하여 가난한 자들을 직접 돕겠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나서서 부자들과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가난하고 헐벗은 서민들을 위하여 재산을 나누어 주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용어로 표현하면,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부자들과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도록 만들겠다고 공약하는 것이고, 그의 약속을 믿고 죽기 살기로 지지해주는 서민대중들은 앞으로 부자들이나 기득권층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이 억지로 지는 십자가의 혜택을 입고 평등함을 누리며 기를 펴고 살기를 원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부자들에게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 희생을 하도록 하겠다는 말은 서민을 잘 살게 해주겠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전체를 지옥으로 만들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히 요약하면 기독교는 각자가 이웃을 위하여 스스로 자진해서 희생의 십자가를 짐으로 모두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방향으로 “전체적인 삶의 질의 향상이라는 열매”를 맺자는 것이고, 사회주의는 서민이라고 하는 다수의 힘을 이용하여 잘나고 재산 많고 높은 위치에 있다고 여겨지는 소수의 사람들을 모두 악으로 매도하면서 투쟁을 미화시켜 소수의 사람들을 억누르고 소유와 권리를 빼앗고 억지로라도 희생의 십자가를 지게 함으로 전체가 완전 밑바닥으로 내려갈 때까지 “전체적인 하향평등화라는 열매”를 거두는 길로 사회를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지는 십자가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의 그럴듯한 외침에 넘어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짐으로 천국을 이루어 나가자는 기독교와는 달리, 사회주의는 투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남이 십자가를 지도록 강요함으로 결과적으로 사회를 지옥으로 만드는 파괴적인 이념입니다. 따라서 사상과 이념의 실천 방법이나 이념실천의 결과물이 총체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공통점이 전혀 없고 물과 기름이 섞이지 못하는 것처럼 섞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C. 연합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운영체제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주의 통치의 중심은 사회주의자들, 즉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요 8:47b) 라고 하시면서 사람에게 속한 사람들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구분하셨습니다. 사람중심인 사회주의는 통치가 사회주의 신봉자들로 구성된 정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입니다. 통치의 중심에 막강한 사회주의 정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정부가 통치의 주체가 되고,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정부가 사업에 투자하고, 정부 차원에서 운영하여 남긴 영업이익을 분배하여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골고루 분배 할 것이고, 무상수업의 혜택을 줄 것이고, 일자리를 마련해 줄 것이고, 거할 집을 줄 것이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휴식 공간을 제공해 주고, 모든 국민들이 누구나 양질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보편적 건강보험 제도를 마련하여 정부가 맡아 관리해 주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국민들로부터 무소불위의 권세를 부여받은 사회주의 정부가 확실하게 치리하여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빈부격차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 국가의 실질적 통치자인 “사회주의 정부”가 모든 국민들로부터 공평하게 세금을 거두어드리고, “사회주의 정부”가 공평하게 관리하여, “사회주의 정부”가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 평등하게 잘 살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의 실질적 통치자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모든 통치의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체제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요 8:47a)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출애굽기와 같은 책에 잘 기록되어 있고, 시편이나 예언서에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말씀 하셨고, 백성들을 향하여 고아와 과부와 객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들에게 복을 더하여 주심으로 부족해지지 않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잠11:24) 라고 하면서 구제를 권고하셨습니다. 성경은 부자들을 전혀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도리어 재물 얻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실히 명심하고 (신 8:18), 돈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충성스런 청지기들이 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재주와 능력들을 주셔서 통치하시는 가운데, 어떤 이들에게는 재물을 얻는 능력을 주시고, 재물을 모을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선행을 하게 하심으로 곤핍하고 소외되고 억눌려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전달하는 충성스런 일꾼들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일선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지만, 뒤에서 보이지 않게 각 사람들에게 여러 방면으로 독특한 능력들을 주시고, 능력 받은 일꾼들의 충성스런 사역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약자들을 보호하고 없는 자들에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 주시면서 모든 일들을 조화롭게 치리하셔서 연합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잘 분별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 편에 서겠다는 사회주의와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기독교는 언뜻 비슷한 것같이 보일수도 있지만,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사회주의는 통치의 주체가 죄인들로 구성된 사회주의 정부가 됨으로 결국 부족한 대중들이 소수의 불완전한 인간들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인 반면, 기독교는 부족한 신도들이지만 완전하신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되는 사회를 목표로 하는 근본적 차이점이 있습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인간을 청지기들로 사용하셔서 통치하시기 때문에 기독교의 역사에도 죄악으로 물들여진 여러 가지 오점들이 많이 있지만, 실질적인 민주주의체제나 인권,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와 같은 것들은 기독교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공개적으로 박해받고 있는 나라에 표현의 자유나 인권이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없습니다! 반면에 사회주의 체제가 만들어 온 역사는 기독교와는 정반대입니다. 사회주의의 역사를 보면 스탈린, 모택동, 천안문 학살의 주역 등소평이나 김일성이나 피델 카스트로나 우고 차베스 같은 자들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모든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사회주의 지도층들만 잘 사는 암흑사회로 전락되게 만든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사회주의가 성공한 예도 있다고 믿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스웨덴 같은 나라? 미국의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유명한 Bernie Sanders는 러시아나 베네수엘라 같은 독재국가는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고 하면서 성공적인 사회주의 국가는 스웨덴이니, 미국을 스웨덴과 같은 복지국가로 변모시켜 나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스웨덴은 과거에 복지를 늘리면서 사회주의 체제를 정착시키려고 시도한 적은 있었지만, 높아지는 세금과 심각성을 더해가는 재정문제로 인하여 결국 포기하고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로 변모 되었습니다.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자유경쟁을 원칙으로 하는 시장경제 체제를 정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잘 되어 있었다는 꿈의 복지 시스템도 과감하게 민영화시켜가면서 지금 자유 시장경제체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대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살후 3:10)”가 올바른 복지정책이고 경제정책입니다. 정부의 직접적인 복지개입은 일견 좋은 듯 보이지만, 결국은 선심 쓰듯 퍼주기와 재정낭비 그리고 재정파탄으로 이어지는 부정적인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역사의 실증입니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가 나서는 것은 일단은 손쉬운 방법이지만 결국 나중에는 도리어 문제를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레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정부는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정부 자체가 문제입니다.”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미래를 내다보며 한 말입니다.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인도하시는 통치자 하나님은 스스로 희생하여 자녀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독생자 아들을 인간들을 위하여 내여 주시기까지 앞장서서 먼저 희생하시고 먼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어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통치는 천국을 만드는 반면, 역사가 보여주는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사회주의적 통치는 그들의 선전과는 달리 자신들만의 당을 만들어 최대한의 온갖 특혜와 특권을 누리면서 나머지 국민들에게는 희생을 강요하여 참혹함과 잔인함과 억울함과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찬 처참한 암흑사회를 만든다는 것이 역사의 명백한 교훈입니다.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고 통치의 주체가 다르고, 통치의 방법이 정반대인, 완전히 다르게 통치되는 다른 종류의 체제들임을 잘 아시고 지금 사회주의로부터 미혹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회주의의 꿈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D. 연합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물질관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기독교의 물질관은 창조의 하나님께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물질의 세계는 결코 그 양이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산은 창조의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산수단과 한정된 재물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난의 원인제공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경에는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예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불어날 수도 있고 더 생길 수도 있습니다. 먹을 양식과 물이 없는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같이 먹고 마셨습니다. 하늘에서 양식이 내려왔고 바위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한 과부의 기름병에서 기름이 계속해서 나왔었고, 아무리 많이 퍼내도 가루 통의 가루가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생겨난 적도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엄청나게 배가되어 오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양으로 불어났고,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증가 되어 4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충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필요할 때마다 창조의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생산해 내시기 때문입니다. 생산자는 서민도 아니고 민중도 아니고 정부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반면에 드러누워 아무 일도 안하고 누군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향하여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가 원칙입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불쌍해도 부자들을 원망하면서 그냥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주인 되시는 예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제한 없이 일한 만큼 또는 그 이상의 재물을 얻게 되고, 남이 도와주기만을 바라며 게으르게 사는 사람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경제정책의 “원칙”인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일하면 모두 다 같이 잘 살 수 있게 되어 있고, 혹시 그 중에 경제력이 없는 고아나 과부나 불구나 병자들과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모두가 자진해서 도움을 주어 모두 부족함 없이 풍족함을 누리며 많든 적든 서로 베풀면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또한 각자 받은 은사에 따라 재물을 얻을 특별한 능력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주안에 거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의식주 문제는 보장받는다는 것이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가운데 나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1-33). 재물을 모을 은사가 없더라도 기본생활은 보장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일반인들로부터 재물을 착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재물 얻는 능력을 각별히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태도이고 올바른 마음자세입니다. 그리고 특정인에게 돈을 버는 은사를 주셨다고 불공평한 하나님이라고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특성에 맞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 주셔서 서로 사랑으로 다른 형제자매의 필요를 채워주고 채움 받으면서 기쁨을 나눌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물의 많고 적음이라는 불공평은 당연한 현상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생김새나 재주가 모두 각기 다른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재물 얻을 능력이 동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나누면 되는 것이고, 만약 나누지 않고 욕심을 부려 쌓아놓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처리하시겠다고 하는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눅 12:20)? 부자의 욕심에 너무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내가 맡은 일,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게 맡겨진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아무리 교회를 잘 출석해도,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해도, 그 사람이 만일 부자들은 생산수단을 독점한 암적 존재들이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자는 진짜가 아닌 가짜신도로 여기고 멀리하고 속지 말아야 하고 섞이지도 말아야합니다. 둘째로, 사람은 육신을 가지고는 있지만,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사람만이 사람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유물사관과 다른 점이고, 또한 이것이 다른 동물들과 대조되는 점입니다. 사람이외의 다른 동물들은 육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오직 먹을 것을 찾다가, 찾은 것을 먹고, 먹다가 죽어서, 다른 것들의 먹이가 되는 과정을 거치며 살아갑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오직 하는 일이 먹을 것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번식하고 그리고 또 먹다가 죽는 것입니다. 다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런 동물들과는 다릅니다. 생각을 할 줄도 알고, 감정도 있고, 목적도 있고, 목표도 있고, 삶의 의미를 찾아 이것저것을 해보기 원하는 존재입니다. 만약 사람이 재물만 생각하고, 재물만 모으고, 재물을 즐기다가 죽으면 먹거리만 찾다가 죽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금식으로 주리신 예수님께 돌들이 떡이 되게 해서 먹고 힘을 얻으라고 하면서 시험하는 사단에게 예수님께서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은 비록 육체에서 살고 있지만, 사람의 육체가 살아가고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것은 음식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후,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주인으로 섬기기로 결단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교회가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보는 사회주의의 유물사관과 어떻게 연합될 수 있겠습니까?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만큼 물질적인 복을 누려보았던 솔로몬은 결국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결론적 선포로 전도서 서두를 시작합니다. 물질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솔로몬의 고백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전도서의 끝을 맺습니다. 이 세상에서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보는 유물론과 같은 사상은 기독교와는 연합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고후 6:15-16).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나 진보라 일컫는 이념들은 기독교와는 결코 함께 할 수도 없고, 사귈 수도 없고, 조화될 수도 없고, 일치될 수 없음을 확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3. 사회주의자들의 단순논리에 설득되거나 비난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성경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도 거듭 반복해서 들으면 사실처럼 진리처럼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저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사전지식과 문제점들과 논리를 알고 적절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교회에게 있어서는 물질보다 영혼이 먼저라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영혼의 문제가 먼저 해결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말씀이 가르쳐주시는 것처럼 눈에 안 보이는 영혼문제가 우선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영적 가난문제를 해결함으로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난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것이 올바른 기독교선교입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도무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모르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론에 사로잡혀 사회주의자들이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감을 보기만 했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누군가 “감이 떫다”라고 하는 말을 지나가다 주워듣고는 “감은 떫은 과일이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감을 먹어보고 감을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하는 말들은 기독교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는 사전지식을 갖고 들어야 합니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책임이 자신들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즉 모든 책임이 남들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거의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은 모두 남들 탓으로 돌립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는 기독교는 항상 기준미달 상태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하여 주워들은 얄팍한 “단편 지식”과 그에 기준한 “나름 잣대”로 재어볼 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주신 명령들을 다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할 말이 있다면 오직 비평이외에는 할 것이 없는 겁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가난과 불평등과 부조리의 문제는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부자들과 기득권을 갖고 누리려는 특권층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가난한자들을 도와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책임불이행 문제라고 믿기 때문에 기회만 생기면 부자들을 비난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비평하는데도 열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들 생각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있는 부류가 바로 기독교인들이고,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위선자들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믿고 비판하는 것이고, 동시에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가난한 자들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영혼구원이 먼저라는 말도 그들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자들의 일방적인 비난압박을 못 이겨 비난을 수용하면, 기독교의 본질을 영혼구원에서 물질구원으로 변질되도록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나라 미국도 “가난과의 전쟁”을 선포했다가 결국 처절하게 참패한 상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의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물질로 물질 구원을 이루려는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노숙자의 문제도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숙자의 문제를 집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결 하려 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총기사고 문제도 지금대로라면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총기사고 문제를 총기규제로만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재물이나 법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해답은 아닙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기독교가 가진 것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교회는 재물과는 비교할 수조차도 없이 너무나 소중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께 소속된 사람들이 예수님 중심으로 모인 모임입니다. 교회에게는 돈이나 건물이 없어도 문제될 것 없지만, 돈으로 엄청난 구제를 하더라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지 않으시면, 건물도 구제도 선교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구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선교라는 사실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어느 누구의 눈치도 살필 필요가 없고, 불필요한 간섭과 무식한 훈수를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둘째로, 교회는 평등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서로 섬기는 곳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교회는 가정과 같습니다. 사랑으로 결집되어 있는 곳이지만, 각각 지키고 또 존중해주어야 할 위치가 있고, 윗 권세와 아랫 권세와 같은 서열이 있고, 그래서 순종이 중요시되고 질서가 있는 곳입니다. 또한 은사와 모양이 각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평등이라는 개념의 적용이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똑 같이 잘 할 수도 없고, 다 똑같이 멋지고 아름답게 생겼을 수도 없기 때문에 각자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서로의 특기를 살려서 서로 섬기며 전체가 복을 받고 움직이는 집합체인 곳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가져야 할 정말로 중요한 자세가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 라고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적 평등을 외치는 사회주의자들의 말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우주 만물들을 보면 평등이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엉뚱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똑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이 모든 만물들의 모양이 다 다르고 각각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특히 전혀 평등한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많이 존경받는 사람들과 덜 존경받는 사람들이 있고, 많은 보상과 적은 보상이 있고, 천한 곳과 귀한 곳, 큰집과 작은 집, 큰 자와 작은 자, 주님께 가까운 자리와 먼 자리가 있는 곳입니다. 전혀 평등한 곳이 아닙니다. (마 11:11)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는 곳, 즉 사회주의자들의 개념으로는 철저히 불평등한 곳입니다. (계 22:12) 평등한 곳은 따로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이사야서 14:5-10 그리고 마가복음 9:43-48을 읽어보면 지옥의 모습을 조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가 죽음을 맞이하면, 모든 영웅들과 열방의 모든 왕들과 함께 그가 못났건 잘났건, 강자들이었던 약자들이었던, 일반적인 사람이건 특별한 사람이건 관계없이, 결국 예외 없이 모두 똑 같이 적신의 몸이 되어 평등하게 대우받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정말로 적신이 된 왕들, 영웅들, 재벌들을 비롯한 거지, 깡패, 사기꾼들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고통당했던 사람들과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 등등, 모든 불신자들이 태어날 때처럼 적신 상태로 하향 평등화되어, 온전한 평등 원칙이 적용되어 실시되는 곳이 지옥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언제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살았던 사람들이 모여 각각 차별된 보상과 대우를 받고 있는 곳이 천국이고, 예수의 사랑과 은혜를 인정하지 않고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잘났었건 못났었건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동일하게 평등한 처우를 받고 있는 곳이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회주의자들의 평등 주장에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평등한 대우를 받는 곳도 아니고 요구하는 곳도 아닙니다. 언제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겸손한 자세로 형제자매들을 섬기며 기쁨을 누리고 감사한 마음을 주고받는 곳임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교회가 굳건히 서야 합니다. 흔들리면 안 됩니다. 지금 사회는 평등과 차별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지는 차별 반대 법안들이 지금도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소유한 사업체를 법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차별 당한다고 생각하는 동성애자들이 성경말씀의 원칙대로 사업을 운영하는 모든 사업주들을 일일이 굳이 찾아내어 무릎을 꿇게 하려고 많은 시간과 물질을 쓰면서 세력을 더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언젠가는 교회에게도 차별하지 말라고 하면서 성경말씀에 의거해서 동성애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결혼까지 시켜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반하는 행위라고 설교하는 성직자들과 그가 속한 교회를 고소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고, 교회를 동성애자들의 결혼식장으로 사용하게 해 달라는 요구를 할까봐 심히 걱정하는 분위기에 싸여 있습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여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교회와 신자들이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사명을 소홀히 하여 지금까지 엉뚱한 것에 평등을 요구하고 차별을 반대하는 움직임에 적극 개입하지 않고, 방임해 왔던 것도 지금의 이런 어려움과 염려를 불러온 하나의 요인일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말로는 시대에 맞춘 목회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의 유행과 세력에 교회가 편승하여 온갖 비성서적 이념과 편법을 수용하면서 오직 교인 수를 늘리는데 몰입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적극적인 가르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에게 현혹되고 당하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는 교우들이 현실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출 수 있도록 시대에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인들을 무장시켜 줌으로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교회와 교우들을 찾고 있는 사단을 담대하고 지혜롭게 대적하여 물리 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4. 가난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결해야 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가난한 이웃에 대하여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해결책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가난 문제의 해법은 이웃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각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출발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가난한 자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불쌍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합쳐서 사랑하는 집단적 사랑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씩 사랑하는 개인적 개별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또한 감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실천적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또 실질적으로 돈보다 훨씬 소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 권해주고, 그 다음으로,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주고, 믿어주고, 위로해주고,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개인적으로 확실히 지적해주고, 배울 것이 있으면 개인적으로 가르쳐주고, 각자가 필요한 만큼 물질로도뒷받침해주는 세심하고 정성어린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과 잘 대해 주는 것과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 못지않게 그 부모의 자녀를 잘 대해주는 사람들은 많지만, 부모만큼 자기 자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모두 동의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자들을 잘 대해주겠다는 사람들은 많이 있을 수 있지만, 가난한 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들은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가난한자들의 편에 선 것 같고, 가난한자들을 잘 대해 주는 것 같으나, 실상은 안개처럼 사라져버릴일시적 감상적 사랑에 머무르거나, 또는 속으로 나름대로의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억울한 자들의 사정을 알아주고 대변해 주는 것과 저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과거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억울한 사람들을 생각해 주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훔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 그의 행동에 대하여 성경은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삼하 15:6) 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압살롬이 백성들을 잘 대해주기는 했지만,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것이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도 약자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말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그들을 위하여 발 벗고 헌신적으로 도와주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민들을 잘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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