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의 세상사는 이야기 (25):
조정래의 세상사는 이야기 (25): UMC 목사 조정래 씀
오늘은 공장에 가려고 운전을 하던 중에 제 앞 차의 뒷꽁무니에 제 마음에 드는 글귀가 적힌 범퍼 스틱커를 보았습니다. 범퍼 스틱커가 두개 붙어 있었는데 하나는 “God Bless the World”라는 말이었고, 또 하나는 “Coexist”라는 말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흔히 쓰는 말에, “God Bless America” (하나님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는 말이 있는데, 대통령이 연설말미에 이 말을 종종 쓰며, 심지어 찬송가에도 “God Bless America”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미국사람이라면 “하나님, 미국을 축복해 주세요.”라는 기원을 올리는 것이 애국심의 자연스런 표현이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이 자기나라에만 축복을 내려 줍시사 하고 기도하는 것이 편협한 국수주의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하는 신앙인이라면, “하나님, 우리나라도 축복해 주시고, 다른 나라도 축복해 주세요. 이왕에 축복해 주시는 김에 온 세상을 다 축복해 주세요.” (God Bless the World!)”라는 성숙한 기도를 드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Karen Armstrong은 인류역사가 발전하면서 신(하나님)의 개념도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원시시대에는 부족신, 고대시대에는 지방신, 근대시대에는 국가신, 현대시대에는 초국가적이고 우주적인 신의 개념으로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아브라함 시대의 부족신에서, 모세 시대의 지방신, 다윗 시대의 국가신에서 신약으로 넘어 오면서 예수를 통해 국제적이고 우주적인 신의 개념으로 확장, 발전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햇볕을 비추어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해 주신 것으로 보아, 햇볕이 온 천지를 비추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은 한 국가나 심지어 한 종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봅니다.
어느 날 신문기자가 마더 데레사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데레사 수녀님, 이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문제는 뭐라고 보십니까?” 데레사 수녀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개념이 너무 협소하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가족의 개념을 생물학적인 가족, 즉, 부모님과 형제간만 가족으로 생각하거나, 좀 더 나아가 사돈팔촌이나 일가친척등을 연장된 가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통 크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God Bless the World”의 정신입니다.
“시인과 신앙인은 애국심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도 있더군요.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숭고한 마음이나, 애국심에만 머문다면 “연장된 이기심”이 될 수 있으니, 온 세상을 관조하는 시인이나 우주의 삼라만상을 품는 신앙인은 애국심보다 통이 큰 우주보편적인 사랑을 지향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포격으로 죽은 팔레스타인의 청년의 시체를 안고 통곡을 하는 팔레스타인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내 가슴이 찢어지지 않으면 참다운 시인이라 부르기 어렵고, 시리아 내전을 피해 피난가다가 죽은 어린 아이의 시체를 보고 “이 슬픔이 내 가족의 슬픔”임을 깨닫지 않으면 참다운 신앙인이라 부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 앞 차의 꽁무니에 붙은 두번째 말은 “Coexist” (공존)이라는 말이었는데, 한번쯤 보신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세계 각 종교의 상징을 알파벳 글자 처럼 써서, “이 세상의 종교들이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공존합시다”라는 뜻이겠지요?
독일의 신학자 한스 큉은, “종교간의 평화없이, 세상의 평화는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 세상은 어찌된 일인지, 종교가 세상의 평화에 도움이 되기 보다, 종교 때문에 테러와 살륙, 전쟁이 일어나니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각 종교마다, “내 종교만 진짜고, 나머지는 다 가짜다”고 하면, 싸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막스 뮐러라는 종교학자가, “자기 종교만 알고 남의 종교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종교 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He who knows only one religion knows none.)
종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겸손과 사랑의 실천일텐데, 자기 종교의 교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남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고상한 가르침을 수긍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편협하고 독선적인, 현대판 바리새인이 될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유영모 선생의 제자인 김흥호 이화여대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를 두루 섭렵하신 분인데, 그 분이, “성격이 조용한 사람은 불교가 맞고, 성격이 적극적인 사람은 기독교가 맞다”는 재미있는 말을 하셨는데, “냉면 좋아 하는 사람은 냉면 시켜 먹고, 짬뽕 좋아하는 사람은 짬뽕 시켜 먹으라”는 말씀처럼 기분좋게 들립니다. 기독교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독교는 잘못됐다. 불교를 믿어야 한다”거나, 불교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에게, “불교는 말짱 도로묵이다. 예수 안 믿으면, 국물도 없다”고 하면 좀 획일적이라 답답해 뵙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어느 한 종교가 100프로 옳고, 나머지는 다 틀렸다기 보다는 모든 종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다 섞여 있기에, 서로 대화와 협조를 통해 배울 것은 배우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서, 종교들이 서로 지혜와 힘을 모아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해 주었으면 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이 무언줄 아느냐? 정의를 실천하고, 친절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멋진 말을 했답니다. (O Man, What does God require of you? But to do justice, to love kindness and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 Micah 6:8) 즉, 정의, 친절, 겸손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류에게 바라는 것이랍니다.
위스칸신의 여류 시인 Ella Wheeler Wilcox는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So many gods, so many creeds;
so many paths that wind and wind,
While just the art of being kind
Is all the sad world needs.”
(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교리도 많아서,
복잡한 세상을 더 복잡하게 하는구나.
슬픔 많은 이 세상이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친절의 실천인 것을…)
종교 때문에 “내가 옳다, 니가 틀렸다”하며 싸우지 맙시다. 어느 한 종교가 세계를 통일하여, 획일화 한다면 숨막힐 것 같습니다. 무지개가 일곱색이 공존하여 아름답듯이, 세계의 여러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면서 화합하고 선의의 경쟁을 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소시지 공장에 도착하니, 작업반장이 “소시지 제품을 박스에 넣는 일”을 하라고 하더군요. 콘베이어 벨트에서 밀려 오는 소시지를 손으로 집어서 박스에 차곡차곡 넣는 일을 쉴틈없이 하니, 운동이 되어 좋았지만, 골병들면 어쩌나 하는 불안도 생겼습니다.
휴식시간에 휴대폰으로 페이스북에 올라 온 글이 제 눈을 끌었습니다.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예배시간에 십일조를 내지 않은 가난한 교인을 “도둑”이라고 불렀다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뒷맛이 씁쓰름했습니다. 좋은 점이 참 많은 목사님이신데, 십일조를 못 받친 교인에게 예배시간에, “도둑”이라며 면박을 줌으로 교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십일조 교육효과를 노린 것 같은데, 일종의 종교폭력으로 느껴졌습니다.
십일조는 원래 제사장들 봉급과 불우이웃돕기를 위해 생긴 것이라고 봅니다. 교인들이 하도 헌금을 안내니,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면 교인들이 말을 좀 듣지 않을까 해서, 말라기 기자가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하나님이 가라사대 십일조 내라” 했다고 한 것이라 봅니다.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뭐가 아쉬어서 인간의 돈이 필요하고, 창고를 짓고 십일조를 들이라고 했겠습니까?
교회에 헌금은 한푼도 안내면서, 술이나 담배 먹는데는 팍팍 쓰는 교인에게, “야, 이 도둑놈아, 교인이라면서, 헌금은 한 푼도 안내고 술, 담배에는 돈을 왕창 쓰냐? 목사도 좀 먹고 살자. 헌금 좀 내라”하면 솔직하기라도 하지, 하나님을 빙자해서 교인들에게 헌금강요하여, 그 돈으로 교회건물 크게 지어 목사 이름 날리고, 목사가 뻔질나게 비행기타고 해외여행 다닌다면, 요새말로, “개독교 먹사”란 욕을 먹기 쉽습니다.
“십일조는 100프로 불우이웃돕기에 쓴다”는 원칙을 정한다면, 저는 교인들이 십일조내는 것을 권장하고 싶습니다만, 목사 좋은 일에만 쓰기 위해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저는 반대입니다.
성경말씀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면 되겠습니까? 성경말씀에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말씀하셨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십일조 안 가지고 오면 도둑놈이다. 알것냐?”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 설교 들은 사람들에게 십일조 다 받아 오느라”하셨다면, 예수님이 큰 부자가 되었을텐데,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는데, 나는 원룸 아파트 한 채없다”고 하신 걸로 보아, 구제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까지 십일조를 율법적으로 강요하는 강도짓은 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 55:1절에 하나님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셨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돈없이도 얻을 수 있다는데, 교회 목사님은 왜 “십일조 안내면 도둑”이라고 합니까? 목사가 하나님 보다 높습니까?
제가 한국에 휴가나갔을 때 강원도의 산골 시골마을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택이 협소하여 참 성자와 같은 사는구나 생각했는데, 교회 입구에 “십일조를 떼어 먹는 것은 도둑질”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그리고 같이 점심먹으러 가자면서 끌고 나온 자가용을 보니 비까번쩍한 외제차더군요. 성자가 될 수 있는 좋은 목사였는데, 산골마을 촌사람들의 헌금으로 고급 외제차를 사서 끌고 다니는 것을 보니 좀 안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즘 현대 Genesis와 같은 고급차인, 로마 직수입 고급 순종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현대 Pony나 기아 Tico와 같은 싸구려 차에 해당하는 당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고 합니다.
세속사회가 돈과 권력의 술에 취에 흥청거릴 때,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검소와 봉사, 겸손과 박애의 실천이라는 고상한 멋을 추구하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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