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 정책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님의 국가 정책과 기도로 미군은 과학산업을 열어 풍요로움을 체험하고 경제팽창 정책을 세계로 열고자 조선에게 통상 무역을 하지고 재안을 하였었는데, 조선의 쇄국정책으로 거절당해서 신미양요가 일어 났다고 나는 믿는다. 그때 조선이 통상의 문을 열었었으면 한국이 일본에게 먹히지 않았고 전쟁도 없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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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요약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
옥천 척화비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산4-2. 충북 기념물 제6호. 흥선대원군이 서구열강의 무력에 의한 통상교섭을 거절하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의 일환으로 서울과 전국 교통 요충지에 세웠던 비석 중의 하나이다.
배경과 경과
아시아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주청전권공사 F.F.로우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항구를 출발하였다. 19일 남양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물치도를 자국 함대의 정박지로 정하였다.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당시 밖으로 강력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전투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진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미군은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과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프랑스와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무력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선 민중의 반침략 의지 때문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미양요 [辛未洋擾]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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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요약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
옥천 척화비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산4-2. 충북 기념물 제6호. 흥선대원군이 서구열강의 무력에 의한 통상교섭을 거절하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의 일환으로 서울과 전국 교통 요충지에 세웠던 비석 중의 하나이다.
배경과 경과
아시아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주청전권공사 F.F.로우가 전권을 위임받고, 조선원정을 명령받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항구를 출발하였다. 19일 남양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 물치도를 자국 함대의 정박지로 정하였다. 미군은 조선에 탐측 승낙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당시 밖으로 강력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전투
미군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광성진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미군은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사격을 빌미로 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과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조선이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프랑스와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무력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선 민중의 반침략 의지 때문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미양요 [辛未洋擾]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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