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이야기...조정래 목사
조정래 목사의 세상사는 이야기 (93): 군대 이야기
제가 사는 곳에서 약 30분 떨어진 곳에 한국 목사님이 한분 사십니다. 저와 같은 교단에서 미국인 교회를 담임하시고 계시는 목사님은 연세는 저보다 열살 정도 많으신 형님이신데 저를 친구처럼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시는 참 고마운 분이십니다.
저의 고향 마산옆에 있는 진해와 창원에서 해병대 훈련을 받으시고 강화도에서 해병대 근무를 마치시고 선교활동을 위해 유럽에 가셔서 20년정도 사시고 미국에서도 20년 정도 사셨는데도 외국생활을 한번도 안해본 시골형님처럼 저를 편안하게 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모님은 노르웨이에서 간호학을 가르치시느라 목사님 혼자 아파트에 사시는데 가끔 김치찌게 해 놨으니, 와서 먹고 가라고 저를 초청해 주십니다.
그저께 금요일 밤에 목사님이 김치찌게 먹으러 오라고 하셔서 목사님이 사시는 아파트에 갔습니다. 김치찌게에다 떡볶이를 만들어 놓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허리끈을 풀어 놓고 배꼽이 튀어 나오도록 밥과 김치찌게 그리고 떡볶이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김치찌게에 들어 있는 돼지고기 건덩이가 참 맛있어서 좀 더 달라고 해서 배터지게 먹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돼지고기가 귀해서 김치찌게에서 돼지고기 살코기를 발견하면 왕건이를 만났다며 좋아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해병대 출신이신 김목사님에게, “해병대 시절에 군대에서 김치찌게에 돼지고기가 있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목사님은 “그때는 돼지가 목욕하고 지나갔다고 하면서 돼지고기는 찾아 볼 수 없고, 돼지비계 덩어리라도 만나는 날은 재수 좋은 날이었다.”고 하더군요.
당시는 하사관이나 장교들의 월급이 적던 때라 군대의 간부급에 있던 사람들이 병사들의 부식으로 나오는 것을 중간에서 잘라 먹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훌륭한 장군으로 존경받는 채명신 장군의 일화를 김목사님이 들려 주더군요.
채명신 장군이 중령으로 있을 때 강원도 지역의 부대에 대대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취임식을 마치고 대대장 관사에 있으니 군수과의 상사가 채명신 대대장에게 쓰리쿼터 트럭에 부식을 가득 싣고 와서 부임축하를 하러 갔다고 합니다. 그 트럭 안에는 돼지고기며, 채소, 쌀등이 푸짐히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심이 없고 공명정대하던 채명신 대대장은 군수과 상사에게 조용히, “부대로 다시 가져 가라”고 했답니다. 군수과 상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부대의 전통입니다.”하고 말했더니, 채명신 대대장은 “부대로 가져 가라”고 명령을 했더니 다시 가져 갔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채명신 대대장은 군수과 상사를 대대장실로 불러서 두 손을 천장에서 내려온 밧줄로 묶어 놓고 몽둥이로 때리며, “병사들이 먹을 부식을 대대장에게 그렇게 주면, 너도 중간에서 얼마나 빼 먹었겠느냐?”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오적이라는 시를 쓰면서, “군대도 썪었다. 지휘관과 간부들이 중간에서 다 잘라먹는 바람에 병사들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는다”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어떤 해병대 하사관 간부는 계급이 좀 높다는 특권을 악용하여 가죽장갑을 끼고 병사들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을 즐기던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 간부도 칠십대의 노인이 되어 있을텐데, 이제쯤 철이 들어서 옛날에 철없이 까불던 때를 반성하고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목사님이 해병대에 근무하던 당시는 월남전 중일 때라 같은 기수의 동기들이 월남전에 차출이 되어 가서 많이 전사하는 바람에 지금은 동기의 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김목사님이 강화도에서 해병대 근무를 할 때 만난 어떤 중사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중사는 월남전에서 살아서 돌아온 용감한 해병대원이고 키도 크고 군복도 멋지게 다려 입던 멋쟁이 중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용감하고 멋진 해병대 중사가 부하인 하사의 애인이 면회 왔을 때 부하의 애인을 겁탈을 했다고 합니다.
상급자인 중사에게 애인이 겁탈당한 하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총을 들고 중사에게 따지러 갔다고 합니다. 총을 들고 따지러 오는 하사에게 겁을 먹은 그 중사는 논으로 뛰어 들어 도망을 가다가 뒤에서 쏜 하사의 총격을 받고 논바닥에 쓰러져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월남전에서 살아 온 용감한 중사가 아랫도리 관리를 잘 못하여 부하의 애인을 건드렸다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강원도 인제 원통의 용대리, 천도리, 서화리에서 3년간의 군목생활을 했습니다.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장송곡에서나 부르는 말을 군인들이,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인제군 원통읍은 철책선에서 가까운 외진 군인 마을입니다. 그곳에서 3년을 살면서 한국의 산과 계곡이 참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고, 지금은 아스러한 추억이 되었지만, 그 때는 군대생활이 답답해서 빨리 제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한 곳에서 3년간 군대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사장교가 제대를 한달 앞 두고 원통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동네 청년들과 시비가 붙어 동네청년들에게 폭행을 당해 죽었을 때 제가 장례예배를 집례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한살짜리 딸과 젊은 아내를 둔 보안대 반장이던 이대위는 다른 대위들 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며 기세가 등등했는데, 하루는 철책선을 순시하던 군단장을 안내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일요일 오후에 부대의 테니스장에서 연대장이랑 군수과 간부들과 어울려 저도 테니스를 치고 헤어졌는데,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 보니 군수과의 서중사가 어제 원통에서 군수과 간부 회식에서 술을 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오다가 가드레일을 박아서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7살 밖에 되지 않은 서중사는 체격이 건장하고 잘 생긴데다 성격이 쾌활한 호남형이라 인기가 많았는데, 갑자기 죽어서 가족들에게 제가 어떤 위로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군대 교회에 가끔 나오시던 진부령 포병대대 주임상사는 눈이 오던 밤에 술을 먹고 눈밭에서 쓰러져 있다가 동사체로 발견되어 가족들에게 슬픔을 안겼고, 지뢰밭에서 나무를 자르라는 명령을 받고 나무를 자르다가 지뢰를 터뜨리는 바람에 파편을 맞고 죽은 병사를 위한 장례식에서 기도를 한 일도 기억나고, 격오지에서 고참들에게 폭행을 당하던 일병이 제대를 앞둔 고참병들을 총으로 쏘아 죽여 사단 영창에 갇혀 있을 때 찾아가서 면담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이제 군대가 많이 민주화되어 구타도 많이 줄어 들었다고 하며 병사들이 먹는 식사의 질도 많이 향상되었다고 듣고 있습니다. 이제는 병사들이 집으로 전화를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떤 병사는 “엄마, 나 오늘 탱크를 몰고 가다가 실수로 탱크를 언덕아래로 굴려서 탱크가 파손되었는데 백만원만 좀 보내줘. 탱크 수리해야 돼”하고 전화를 하면, 요즘 엄마들은 “야, 니가 PX병으로 편하게 지내는 줄 다 알고 있어, 뻥까지 마!”하며 눈도 꿈쩍 안한다고 합니다.
Bette Midler가 부른, “From A Distance”라는 노래에 “From a distance you look like my friend even though we are at war.”라는 말이 있더군요: “우리가 지금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지만, 하늘에서 보면 우리는 한 형제요 친구들이라”는 말이겠지요.
이념과 정치적인 견해차이로 한 동포가 헤어져서 지내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머지 않은 장래에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한 나라로 통일이 되는 꿈과 희망이 실현되는 때가 오길 빕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약 30분 떨어진 곳에 한국 목사님이 한분 사십니다. 저와 같은 교단에서 미국인 교회를 담임하시고 계시는 목사님은 연세는 저보다 열살 정도 많으신 형님이신데 저를 친구처럼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시는 참 고마운 분이십니다.
저의 고향 마산옆에 있는 진해와 창원에서 해병대 훈련을 받으시고 강화도에서 해병대 근무를 마치시고 선교활동을 위해 유럽에 가셔서 20년정도 사시고 미국에서도 20년 정도 사셨는데도 외국생활을 한번도 안해본 시골형님처럼 저를 편안하게 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모님은 노르웨이에서 간호학을 가르치시느라 목사님 혼자 아파트에 사시는데 가끔 김치찌게 해 놨으니, 와서 먹고 가라고 저를 초청해 주십니다.
그저께 금요일 밤에 목사님이 김치찌게 먹으러 오라고 하셔서 목사님이 사시는 아파트에 갔습니다. 김치찌게에다 떡볶이를 만들어 놓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허리끈을 풀어 놓고 배꼽이 튀어 나오도록 밥과 김치찌게 그리고 떡볶이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김치찌게에 들어 있는 돼지고기 건덩이가 참 맛있어서 좀 더 달라고 해서 배터지게 먹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돼지고기가 귀해서 김치찌게에서 돼지고기 살코기를 발견하면 왕건이를 만났다며 좋아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해병대 출신이신 김목사님에게, “해병대 시절에 군대에서 김치찌게에 돼지고기가 있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목사님은 “그때는 돼지가 목욕하고 지나갔다고 하면서 돼지고기는 찾아 볼 수 없고, 돼지비계 덩어리라도 만나는 날은 재수 좋은 날이었다.”고 하더군요.
당시는 하사관이나 장교들의 월급이 적던 때라 군대의 간부급에 있던 사람들이 병사들의 부식으로 나오는 것을 중간에서 잘라 먹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훌륭한 장군으로 존경받는 채명신 장군의 일화를 김목사님이 들려 주더군요.
채명신 장군이 중령으로 있을 때 강원도 지역의 부대에 대대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취임식을 마치고 대대장 관사에 있으니 군수과의 상사가 채명신 대대장에게 쓰리쿼터 트럭에 부식을 가득 싣고 와서 부임축하를 하러 갔다고 합니다. 그 트럭 안에는 돼지고기며, 채소, 쌀등이 푸짐히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심이 없고 공명정대하던 채명신 대대장은 군수과 상사에게 조용히, “부대로 다시 가져 가라”고 했답니다. 군수과 상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부대의 전통입니다.”하고 말했더니, 채명신 대대장은 “부대로 가져 가라”고 명령을 했더니 다시 가져 갔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채명신 대대장은 군수과 상사를 대대장실로 불러서 두 손을 천장에서 내려온 밧줄로 묶어 놓고 몽둥이로 때리며, “병사들이 먹을 부식을 대대장에게 그렇게 주면, 너도 중간에서 얼마나 빼 먹었겠느냐?”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오적이라는 시를 쓰면서, “군대도 썪었다. 지휘관과 간부들이 중간에서 다 잘라먹는 바람에 병사들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는다”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어떤 해병대 하사관 간부는 계급이 좀 높다는 특권을 악용하여 가죽장갑을 끼고 병사들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을 즐기던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 간부도 칠십대의 노인이 되어 있을텐데, 이제쯤 철이 들어서 옛날에 철없이 까불던 때를 반성하고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목사님이 해병대에 근무하던 당시는 월남전 중일 때라 같은 기수의 동기들이 월남전에 차출이 되어 가서 많이 전사하는 바람에 지금은 동기의 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김목사님이 강화도에서 해병대 근무를 할 때 만난 어떤 중사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중사는 월남전에서 살아서 돌아온 용감한 해병대원이고 키도 크고 군복도 멋지게 다려 입던 멋쟁이 중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용감하고 멋진 해병대 중사가 부하인 하사의 애인이 면회 왔을 때 부하의 애인을 겁탈을 했다고 합니다.
상급자인 중사에게 애인이 겁탈당한 하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총을 들고 중사에게 따지러 갔다고 합니다. 총을 들고 따지러 오는 하사에게 겁을 먹은 그 중사는 논으로 뛰어 들어 도망을 가다가 뒤에서 쏜 하사의 총격을 받고 논바닥에 쓰러져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월남전에서 살아 온 용감한 중사가 아랫도리 관리를 잘 못하여 부하의 애인을 건드렸다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강원도 인제 원통의 용대리, 천도리, 서화리에서 3년간의 군목생활을 했습니다.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장송곡에서나 부르는 말을 군인들이,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인제군 원통읍은 철책선에서 가까운 외진 군인 마을입니다. 그곳에서 3년을 살면서 한국의 산과 계곡이 참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고, 지금은 아스러한 추억이 되었지만, 그 때는 군대생활이 답답해서 빨리 제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한 곳에서 3년간 군대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사장교가 제대를 한달 앞 두고 원통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동네 청년들과 시비가 붙어 동네청년들에게 폭행을 당해 죽었을 때 제가 장례예배를 집례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한살짜리 딸과 젊은 아내를 둔 보안대 반장이던 이대위는 다른 대위들 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며 기세가 등등했는데, 하루는 철책선을 순시하던 군단장을 안내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일요일 오후에 부대의 테니스장에서 연대장이랑 군수과 간부들과 어울려 저도 테니스를 치고 헤어졌는데,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 보니 군수과의 서중사가 어제 원통에서 군수과 간부 회식에서 술을 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오다가 가드레일을 박아서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7살 밖에 되지 않은 서중사는 체격이 건장하고 잘 생긴데다 성격이 쾌활한 호남형이라 인기가 많았는데, 갑자기 죽어서 가족들에게 제가 어떤 위로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군대 교회에 가끔 나오시던 진부령 포병대대 주임상사는 눈이 오던 밤에 술을 먹고 눈밭에서 쓰러져 있다가 동사체로 발견되어 가족들에게 슬픔을 안겼고, 지뢰밭에서 나무를 자르라는 명령을 받고 나무를 자르다가 지뢰를 터뜨리는 바람에 파편을 맞고 죽은 병사를 위한 장례식에서 기도를 한 일도 기억나고, 격오지에서 고참들에게 폭행을 당하던 일병이 제대를 앞둔 고참병들을 총으로 쏘아 죽여 사단 영창에 갇혀 있을 때 찾아가서 면담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이제 군대가 많이 민주화되어 구타도 많이 줄어 들었다고 하며 병사들이 먹는 식사의 질도 많이 향상되었다고 듣고 있습니다. 이제는 병사들이 집으로 전화를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떤 병사는 “엄마, 나 오늘 탱크를 몰고 가다가 실수로 탱크를 언덕아래로 굴려서 탱크가 파손되었는데 백만원만 좀 보내줘. 탱크 수리해야 돼”하고 전화를 하면, 요즘 엄마들은 “야, 니가 PX병으로 편하게 지내는 줄 다 알고 있어, 뻥까지 마!”하며 눈도 꿈쩍 안한다고 합니다.
Bette Midler가 부른, “From A Distance”라는 노래에 “From a distance you look like my friend even though we are at war.”라는 말이 있더군요: “우리가 지금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지만, 하늘에서 보면 우리는 한 형제요 친구들이라”는 말이겠지요.
이념과 정치적인 견해차이로 한 동포가 헤어져서 지내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머지 않은 장래에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한 나라로 통일이 되는 꿈과 희망이 실현되는 때가 오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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