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중국 명나라 중기에 王陽明(왕양명: 1472-1528)이란 분이 계셨다. 그가 陽明學(양명학)이란 새로운 儒敎思想 (유교사상)을 시작하였다. 그는 어려서 매우 총명하여 大學(대학) <유교 4개의 경전 중의 하나, 즉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 에서 가르친 대로 세상만물의 물정을 이해하고자 마당 앞에 화초를 자세히 관찰하기를 몇일이나 했다고 한다.
심지어 결혼하는 날에도 이와같이 열중했던 소년이었는데, 일찌기 사서오경을 통독하고, 또 손자병법등의 군사학에 심취했었다가, 얼마 후 다시 莊子(장자) 의 사상에 혹해서 朱子(주자, 원명은 朱熹 1130-1200) 의 理致(이치)의 논리에는 " 이론은 있으나 精神(정신)이 빠졌다" 고 장자의 氣(Spirit)의 사상을 가미했었다. 이것이 양명학이었고, 力動(역동:Dynamic)의 새로운 학문으로 新孔子(신공자)이론, 禪佛敎(선불교),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의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는 이황 이퇴계와 이이 이율곡 선생들이 理氣二元論(이기이원론)의 사상, 즉 이치는 하나이나 氣運(기운)은 둘이냐 아니면 하나냐 하는 논쟁을 펴게 했으며, 한편 일본에서는 '요메이가꾸'라는 儒學派(유학파) 를 시작시켰고, 그 氣(기)에 의한 운동의 열기가 기존의 朱子學(주자학)으로 정체됐던 ‘도꾸가와’막부의 통치논리에 반발해서, 결국 明治維新(명치유신)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말았다.
왕양명 자신은 주자학에 쇠뇌된 관리들과 세력을 쥔 환관들의 미움을 사서 변방으로 귀양다니다가, 그의 출중한 병법의 능력을 인정 받아서 4 번이나 나라를 살렸었다. 56세의 나이에 변방에서 후예들을 가르치던 끝에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말았지만, 후세에 중국철학에서 5대 巨星(거성)의 한 사람으로 크게 추앙을 받았고 지금도 곳곳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가 이런 말을 남겼다.
“無善無惡是心之體 (무선무악시심지체), 有善有惡是意之動 (유선유악시의지동), 知善知惡是良知(지선지악시량지), 爲善去惡是格物 (위선거악시격물):
“마음의 본체는 본래 善(선) 과 惡(악) 이 없는 것이지만, 선과 악이 나타나는 것은 뜻(意)의 작용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나타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아는 것이 양지(良知)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격물(格物: 이치를 깨달아 마음을 바로 잡음)이다” (참고: 두산, 브리타니카 백과 그리고 ' 차석찬의 역사창고'에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지꺼리는 건가? 理 (Physics)의 세계와 氣 (Spirit 혹은 Will)의 세계를 어떻게 봐야하며,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말하려고 이런 긴 書頭(서두)를 꺼집어 냈던 것이다. 이 두가지 우주의 법칙, 즉 Physics (물리학)와 Mind (정신세계)의 움직임을 말한다. 나는 이들을 어떻게 보며, 또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해야 하는가?
莊子(장자)라는 책의 內篇(내편)에 이런 이야기가 쓰여있다. 莊子(실제 인물)가 어느 더운 여름날의 저녁나절에 더위가 걷혀가는 호숫가를 어떤 친구와 산보하고 있었다. 장자가 물 밑을 바라보니 큰 잉어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이 눈에 띄웠다. 장자가 혼잣 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그 잉어 ..., 참 행복해 보이는구나" 라고.
친구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한다. “자네는 잉어가 아니면서 어찌하여 그 물고기가 지금 행복한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는 건가?”
장자가 이 말에 답하여 이렇게 되받았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잉어의 마음(Mind)을 내가 어떻게 읽었는지 어찌 알 수 있다는 건가?”
이 짧은 대화에서 莊子가 무슨 뜻을 우리에게 말하려 했는가?
사물을 認識(인식)하는 主體(주체)가 과연 누군가를 묻는 것이다. 내가 남이 본 것을“ 기다, 아니다”라며 이렇쿵 저렇쿵 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인식하는 主體 (주체)와, 그 대상의 客體(객체)는 보는 사람에 따라 이처럼 다르다.
마치 한국일보의 열린마당이 일부 특정인들을 우대하고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더불어 사회에 검은 구름을 불러온다고 본 분이 계신가 하면, 자기는 천국에 살고 있어서 세상의 모든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L.A 영락교회의 분란을 처리한 "미한인장로교본부" 일명 K-PCA를 Legally permitted religious gangsters(법적으로 허락된 종교적 깽단)이라고 비난한 바가 있다.
나를 포함하여 여기 독자들 모두는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잣대가 있다. 같은 사물이라도 좋게 보고 싶으면 좋게 보이고, 나쁘게 보고 싶으면 그 보는 사람에게는 나쁘게 보인다. 그러나 그 實像(실상)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고 단지 거기 있을 뿐이건만 이렇게 좋고 나뿜이 각자에게 따로 있는 이유가 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 내가 다른 사람의 인간됨됨이를 다 알지 못하는 고로 일괄적으로 단정할 처지가 못된다. 개괄적으로 내가 이해하는 바는 사람들은 각자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는가, 무슨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것을 보고 경험했고,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으며, 그런 처지에서 자기라는 한 인간이 형성된다. 그렇게 형성된 한 사람이 사회라는 공동체를 살아가면서 남과 경쟁하고 다투면서 자기가 설 자리를 찾아간다. 무슨 대우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들 집단에 잘 섞일 수도 있고, 배척받고 남을 원망하는 인간이 된다.
그런 반응을 도리어 좋게 되받아 치면 세상은 의외로 밝게 전개될 것이며, 그러하질 않고 불평과 불만으로 남들에게 나쁘게 대하거나 원한으로 응대하다 보면 결국 세상이 그를 저바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진리...이를 깨닫고 자신을 再生(재생),기독교에서는 '다시 태어난다'고 하고, 佛家(불가)에서는 涅槃(열반)해서 極樂(극락)을 즐긴다고 말한다.
그 비결이 도대체 뭔가?
잘못 세상을 보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적에는 새로운 천지가 전개되는 그 골짜에는 옛날의 자신을 버리는 태도의 결심과 그 실행에 있다. 쉬은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습관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잘못 길들여진 동물이 자기를 바꾸려면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봐야" 결국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무슨 일이 있던지 새 인간이 되고자 죽기 살기로 작심한다는 이바구 올시다. 만약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는 그 생겨먹은대로 허우적거리며 일생을 비관하다가 지레 죽고 만다.
無知의 所致(무지의 소치)올시다. 다시 말해서 무식한 데서 생기는 일입네다. "귀있는 자는 듣고, 눈이 있는 자는 본다"고 성경에 쓰여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주어도 소귀에 經(경)읽기가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왜 이런 말이 필요하냐구? 모두가 다 잘난 사람들만 있다 보니 남의 말은 도무지 전달이 않된다. 죽는 순간에 깨닯았다고? 불쌍하다 해야 하겄지.
禪涅槃
심지어 결혼하는 날에도 이와같이 열중했던 소년이었는데, 일찌기 사서오경을 통독하고, 또 손자병법등의 군사학에 심취했었다가, 얼마 후 다시 莊子(장자) 의 사상에 혹해서 朱子(주자, 원명은 朱熹 1130-1200) 의 理致(이치)의 논리에는 " 이론은 있으나 精神(정신)이 빠졌다" 고 장자의 氣(Spirit)의 사상을 가미했었다. 이것이 양명학이었고, 力動(역동:Dynamic)의 새로운 학문으로 新孔子(신공자)이론, 禪佛敎(선불교),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의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는 이황 이퇴계와 이이 이율곡 선생들이 理氣二元論(이기이원론)의 사상, 즉 이치는 하나이나 氣運(기운)은 둘이냐 아니면 하나냐 하는 논쟁을 펴게 했으며, 한편 일본에서는 '요메이가꾸'라는 儒學派(유학파) 를 시작시켰고, 그 氣(기)에 의한 운동의 열기가 기존의 朱子學(주자학)으로 정체됐던 ‘도꾸가와’막부의 통치논리에 반발해서, 결국 明治維新(명치유신)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말았다.
왕양명 자신은 주자학에 쇠뇌된 관리들과 세력을 쥔 환관들의 미움을 사서 변방으로 귀양다니다가, 그의 출중한 병법의 능력을 인정 받아서 4 번이나 나라를 살렸었다. 56세의 나이에 변방에서 후예들을 가르치던 끝에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말았지만, 후세에 중국철학에서 5대 巨星(거성)의 한 사람으로 크게 추앙을 받았고 지금도 곳곳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가 이런 말을 남겼다.
“無善無惡是心之體 (무선무악시심지체), 有善有惡是意之動 (유선유악시의지동), 知善知惡是良知(지선지악시량지), 爲善去惡是格物 (위선거악시격물):
“마음의 본체는 본래 善(선) 과 惡(악) 이 없는 것이지만, 선과 악이 나타나는 것은 뜻(意)의 작용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나타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아는 것이 양지(良知)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격물(格物: 이치를 깨달아 마음을 바로 잡음)이다” (참고: 두산, 브리타니카 백과 그리고 ' 차석찬의 역사창고'에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지꺼리는 건가? 理 (Physics)의 세계와 氣 (Spirit 혹은 Will)의 세계를 어떻게 봐야하며,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말하려고 이런 긴 書頭(서두)를 꺼집어 냈던 것이다. 이 두가지 우주의 법칙, 즉 Physics (물리학)와 Mind (정신세계)의 움직임을 말한다. 나는 이들을 어떻게 보며, 또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해야 하는가?
莊子(장자)라는 책의 內篇(내편)에 이런 이야기가 쓰여있다. 莊子(실제 인물)가 어느 더운 여름날의 저녁나절에 더위가 걷혀가는 호숫가를 어떤 친구와 산보하고 있었다. 장자가 물 밑을 바라보니 큰 잉어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이 눈에 띄웠다. 장자가 혼잣 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그 잉어 ..., 참 행복해 보이는구나" 라고.
친구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한다. “자네는 잉어가 아니면서 어찌하여 그 물고기가 지금 행복한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는 건가?”
장자가 이 말에 답하여 이렇게 되받았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잉어의 마음(Mind)을 내가 어떻게 읽었는지 어찌 알 수 있다는 건가?”
이 짧은 대화에서 莊子가 무슨 뜻을 우리에게 말하려 했는가?
사물을 認識(인식)하는 主體(주체)가 과연 누군가를 묻는 것이다. 내가 남이 본 것을“ 기다, 아니다”라며 이렇쿵 저렇쿵 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인식하는 主體 (주체)와, 그 대상의 客體(객체)는 보는 사람에 따라 이처럼 다르다.
마치 한국일보의 열린마당이 일부 특정인들을 우대하고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더불어 사회에 검은 구름을 불러온다고 본 분이 계신가 하면, 자기는 천국에 살고 있어서 세상의 모든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L.A 영락교회의 분란을 처리한 "미한인장로교본부" 일명 K-PCA를 Legally permitted religious gangsters(법적으로 허락된 종교적 깽단)이라고 비난한 바가 있다.
나를 포함하여 여기 독자들 모두는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잣대가 있다. 같은 사물이라도 좋게 보고 싶으면 좋게 보이고, 나쁘게 보고 싶으면 그 보는 사람에게는 나쁘게 보인다. 그러나 그 實像(실상)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고 단지 거기 있을 뿐이건만 이렇게 좋고 나뿜이 각자에게 따로 있는 이유가 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 내가 다른 사람의 인간됨됨이를 다 알지 못하는 고로 일괄적으로 단정할 처지가 못된다. 개괄적으로 내가 이해하는 바는 사람들은 각자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는가, 무슨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것을 보고 경험했고,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으며, 그런 처지에서 자기라는 한 인간이 형성된다. 그렇게 형성된 한 사람이 사회라는 공동체를 살아가면서 남과 경쟁하고 다투면서 자기가 설 자리를 찾아간다. 무슨 대우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들 집단에 잘 섞일 수도 있고, 배척받고 남을 원망하는 인간이 된다.
그런 반응을 도리어 좋게 되받아 치면 세상은 의외로 밝게 전개될 것이며, 그러하질 않고 불평과 불만으로 남들에게 나쁘게 대하거나 원한으로 응대하다 보면 결국 세상이 그를 저바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진리...이를 깨닫고 자신을 再生(재생),기독교에서는 '다시 태어난다'고 하고, 佛家(불가)에서는 涅槃(열반)해서 極樂(극락)을 즐긴다고 말한다.
그 비결이 도대체 뭔가?
잘못 세상을 보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적에는 새로운 천지가 전개되는 그 골짜에는 옛날의 자신을 버리는 태도의 결심과 그 실행에 있다. 쉬은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습관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잘못 길들여진 동물이 자기를 바꾸려면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봐야" 결국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무슨 일이 있던지 새 인간이 되고자 죽기 살기로 작심한다는 이바구 올시다. 만약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는 그 생겨먹은대로 허우적거리며 일생을 비관하다가 지레 죽고 만다.
無知의 所致(무지의 소치)올시다. 다시 말해서 무식한 데서 생기는 일입네다. "귀있는 자는 듣고, 눈이 있는 자는 본다"고 성경에 쓰여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주어도 소귀에 經(경)읽기가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왜 이런 말이 필요하냐구? 모두가 다 잘난 사람들만 있다 보니 남의 말은 도무지 전달이 않된다. 죽는 순간에 깨닯았다고? 불쌍하다 해야 하겄지.
禪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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