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 경제학 및 정치인의 오래 전 수필
경제학자 조순 박사가 오래 전에 쓰신 글입니다↕
莊子가 말하는 習慣的으로 저지르는 8가지 過誤
1. 자기 할 일이 아닌데 덤비는 것은 '주착(做錯)'이라 한다.
2. 상대방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망령(妄靈)' 이라 한다.
3.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말하는 것을 '아첨(阿諂)'이라고 한다.
4. 시비를 가리지 않고 마구 말을 하는 것을 '푼수(分數)' 적다고 한다.
5. 남의 단점을 말하기 좋아하는 것을 '참소(讒訴)'라고 한다.
6. 남의 관계를 갈라놓는 것을 '이간(離間)질'이라고 한다.
7. 나쁜 짓을 칭찬하여 사람을 타락시킴을 '간특(奸慝)'하다고 한다.
8.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비위를 맞춰 상대방의 속셈을 뽑아보는 것을
'음흉( 陰凶)'하다고 한다.
나는 사람의 일생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것으로 보고 있다.
‘고중유락(苦中有樂)’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은 원래 즐거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 인구가 이렇게 많을 수 있겠는가?
“그럼 늙고 죽는 것도 즐겁단 말이오?”
아마 이런 반론이 있을 것이다.
글쎄 늙고 죽는 것이 꼭 즐거운 것은 아니겠지만
그 의미를 잘 안다면 얼마든지 달관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항아리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죽고 사는 것을 항상 보니, 이제 눈물이 없네’ 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인생을 즐겁게 보내자면, 일정한 계획과 수련이 필요하다.
중국 송(宋)나라에 주신중이라는 훌륭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인생에는 다섯 개의 계획(五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생계(生計),
둘째는 신계(身計),
셋째는 가계(家計),
넷째는 노계(老計),
다섯째 사계(死計) 가 그것이다.
生計는 내 일생을 어떤 모양으로 만드느냐에 관한 것이고,
身計는 이 몸을 어떻게 처신하느냐의 계획이며,
家計는 나의 집안, 가족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이다.
老計는 어떤 老年을 보낼 것이냐에 관한 계획이고
死計는 어떤 모양으로 죽을 것이냐의 설계를 말한다.
“당신에게도 노계가 있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있지요” 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것이 무엇이오?”라는 물음에는 '소이부답' 말을 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만, 내가 사는 집 이야기를 한다면 그 속에 나의 대답 일부분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달동네로 유명한 봉천동에 살고 있다.
25년 전 나는 관악산을 내다보는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대지를 사서 집을 지었다. 당시에는 주변도 비교적 좋았고 공기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집 주위는 그때와는 전혀 딴판이 됐다.
단독주택은 거의 다 없어지고, 주변에 5층짜리 다세대주택이 밀집해 있다.
주차도 어렵고, 지하철에서 이 집까지 오자면
가파른 언덕길을 허덕이며 올라와야 한다.
처음 오는 사람 중에는 ‘이 집이 정말 조순의 집이냐?
동명이인이 아니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25년을 한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 마을에 나밖에 없다.
아이들은 날보고 이사를 가자고 한다.
좀 더 넓은 곳, 편한 곳으로 가자고 한다.
자기들이 모시겠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한결 같다.
“여기가 어떻다고 이사를 간단 말이냐?
불편한 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많다.
다소의 불편은 참고 지내야지, 사람은 너무 편해도 못 써.
어딜 가도 먹는 나이는 막을 수 없고, 인생의 황혼은 짙어지는 법.
지난 25년의 파란 많은 세월을 이 집에서 사고 없이 지냈고,
지금도 건강이 유지되고 있으니, 그만하면 됐지,
내겐 이 집이 좋은 집이야.”
이 집에는 좁은 대지에 나무가 많다.
모두 내가 심은 나무들이다.
해마다 거름을 주니,
나무들은 매우 잘 자라서 이제 이 집은 숲 속에 묻혀 버렸다.
감나무엔 월등히 좋은 단감이 잘 열리고,
강릉에서 가지고 온 토종 자두나무는 꽃도 열매도 고향 냄새를 풍긴다.
강릉에서 파온 대나무도 아주 무성하고, 화단은 좁지만 사계절 꽃이 핀다.
이 집과 나무, 그리고 화단은 아침저녁 내게 눈짓한다.
“당신이 이사를 간다구요? 가지 마시오!”
지난 25년의 파란이 압축된 이 애물단지!
내게 이런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버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순/前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생애
조순은 1928년 2월 1일에 강원도 주문진에서 태어났다. 194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문부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생도들에게 영어를 강의하였다. 미국 유학을 마친 후 1968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교수로 재직했다. 케인즈 학파의 일원으로서 많은 학문적 업적과 제자를 남겨 대한민국 경제학계에서 학현학파와 서강학파에 버금가는 '조순 학파'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인맥을 구축하였다.
육사 교관 시절 육사 생도였던 노태우를 가르쳤던 인연으로 1988년에 노태우 정부에 입각하여 1990년까지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의 장관을 지냈다. 이후 1992년부터는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고, 한문 고전에도 능했기 때문에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도산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다음 해 정계에 입문하여 민주당에 입당하고 민선 1기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었다. 김대중의 정계 복귀 이후 민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지내오다가 1997년 다시 잔류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영입되어 대선레이스에 나섰다. 그러나 군소 정당의 세불리를 느끼고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합하여 합당하고 초대 한나라당 총재가 되었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김윤환, 이기택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구성했으나 당선되지 못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에서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莊子가 말하는 習慣的으로 저지르는 8가지 過誤
1. 자기 할 일이 아닌데 덤비는 것은 '주착(做錯)'이라 한다.
2. 상대방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망령(妄靈)' 이라 한다.
3.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말하는 것을 '아첨(阿諂)'이라고 한다.
4. 시비를 가리지 않고 마구 말을 하는 것을 '푼수(分數)' 적다고 한다.
5. 남의 단점을 말하기 좋아하는 것을 '참소(讒訴)'라고 한다.
6. 남의 관계를 갈라놓는 것을 '이간(離間)질'이라고 한다.
7. 나쁜 짓을 칭찬하여 사람을 타락시킴을 '간특(奸慝)'하다고 한다.
8.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비위를 맞춰 상대방의 속셈을 뽑아보는 것을
'음흉( 陰凶)'하다고 한다.
나는 사람의 일생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것으로 보고 있다.
‘고중유락(苦中有樂)’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은 원래 즐거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 인구가 이렇게 많을 수 있겠는가?
“그럼 늙고 죽는 것도 즐겁단 말이오?”
아마 이런 반론이 있을 것이다.
글쎄 늙고 죽는 것이 꼭 즐거운 것은 아니겠지만
그 의미를 잘 안다면 얼마든지 달관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항아리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죽고 사는 것을 항상 보니, 이제 눈물이 없네’ 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인생을 즐겁게 보내자면, 일정한 계획과 수련이 필요하다.
중국 송(宋)나라에 주신중이라는 훌륭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인생에는 다섯 개의 계획(五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생계(生計),
둘째는 신계(身計),
셋째는 가계(家計),
넷째는 노계(老計),
다섯째 사계(死計) 가 그것이다.
生計는 내 일생을 어떤 모양으로 만드느냐에 관한 것이고,
身計는 이 몸을 어떻게 처신하느냐의 계획이며,
家計는 나의 집안, 가족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이다.
老計는 어떤 老年을 보낼 것이냐에 관한 계획이고
死計는 어떤 모양으로 죽을 것이냐의 설계를 말한다.
“당신에게도 노계가 있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있지요” 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것이 무엇이오?”라는 물음에는 '소이부답' 말을 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만, 내가 사는 집 이야기를 한다면 그 속에 나의 대답 일부분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달동네로 유명한 봉천동에 살고 있다.
25년 전 나는 관악산을 내다보는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대지를 사서 집을 지었다. 당시에는 주변도 비교적 좋았고 공기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집 주위는 그때와는 전혀 딴판이 됐다.
단독주택은 거의 다 없어지고, 주변에 5층짜리 다세대주택이 밀집해 있다.
주차도 어렵고, 지하철에서 이 집까지 오자면
가파른 언덕길을 허덕이며 올라와야 한다.
처음 오는 사람 중에는 ‘이 집이 정말 조순의 집이냐?
동명이인이 아니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25년을 한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 마을에 나밖에 없다.
아이들은 날보고 이사를 가자고 한다.
좀 더 넓은 곳, 편한 곳으로 가자고 한다.
자기들이 모시겠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한결 같다.
“여기가 어떻다고 이사를 간단 말이냐?
불편한 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많다.
다소의 불편은 참고 지내야지, 사람은 너무 편해도 못 써.
어딜 가도 먹는 나이는 막을 수 없고, 인생의 황혼은 짙어지는 법.
지난 25년의 파란 많은 세월을 이 집에서 사고 없이 지냈고,
지금도 건강이 유지되고 있으니, 그만하면 됐지,
내겐 이 집이 좋은 집이야.”
이 집에는 좁은 대지에 나무가 많다.
모두 내가 심은 나무들이다.
해마다 거름을 주니,
나무들은 매우 잘 자라서 이제 이 집은 숲 속에 묻혀 버렸다.
감나무엔 월등히 좋은 단감이 잘 열리고,
강릉에서 가지고 온 토종 자두나무는 꽃도 열매도 고향 냄새를 풍긴다.
강릉에서 파온 대나무도 아주 무성하고, 화단은 좁지만 사계절 꽃이 핀다.
이 집과 나무, 그리고 화단은 아침저녁 내게 눈짓한다.
“당신이 이사를 간다구요? 가지 마시오!”
지난 25년의 파란이 압축된 이 애물단지!
내게 이런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버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순/前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생애
조순은 1928년 2월 1일에 강원도 주문진에서 태어났다. 194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문부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생도들에게 영어를 강의하였다. 미국 유학을 마친 후 1968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교수로 재직했다. 케인즈 학파의 일원으로서 많은 학문적 업적과 제자를 남겨 대한민국 경제학계에서 학현학파와 서강학파에 버금가는 '조순 학파'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인맥을 구축하였다.
육사 교관 시절 육사 생도였던 노태우를 가르쳤던 인연으로 1988년에 노태우 정부에 입각하여 1990년까지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의 장관을 지냈다. 이후 1992년부터는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고, 한문 고전에도 능했기 때문에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도산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다음 해 정계에 입문하여 민주당에 입당하고 민선 1기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었다. 김대중의 정계 복귀 이후 민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지내오다가 1997년 다시 잔류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영입되어 대선레이스에 나섰다. 그러나 군소 정당의 세불리를 느끼고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합하여 합당하고 초대 한나라당 총재가 되었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김윤환, 이기택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구성했으나 당선되지 못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에서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좋아요 0
태그
DISCLAIMER
이곳에 게시된 글들은 에이전트 혹은 사용자가 자유롭게 올린 게시물입니다. 커뮤니티 내용을 확인하고 참여에 따른 법적, 경제적, 기타 문제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케이타운 1번가는 해당 컨텐츠에 대해 어떠한 의견이나 대표성을 가지지 않으며, 커뮤니티 서비스에 게재된 정보에 의해 입은 손해나 피해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