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先輸出(선수출) 後分配(후분배)
소위 5-16군사혁명이 일어나던 해는 1961년이었다. 2월 16일에 진눈깨비가 내리는 남산국민학교 교정에서 하루종일 기다리다 가짜 기피로 겨우 군에 입대하였고 3개월 후에 의정부 북쪽에 위치한 101보충대에서 전방으로 배치되기를 기다리던 때였다. 다음날 아침에 우리 훈병을 마당에 모아놓고 '혁명공약'이란 것을 읽어주고 암기하도록 강요했다.
그 제1조가 '우리는 反共(반공)을 國是(국시)로 삼는다'. 제2조는 '기어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한다' 뭐 어쩌구, 저쩌구...남어지는 기억하는 것이 없다. 그러고 나더니 '서울에 사는 사람은 손을 들라' 해서 논산훈련소의 마루바닥에서 자다가 처음 두툼한 요와 이불이 그렇게 좋은 것인줄 처음 알게 되었다.
어째서 군사혁명이 나던 그 즈음에 군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서 하룻밤을 자게 조치했는가? 여기에 우리 국민들 속에 깊이 들어가 박혀있는 治富(치부)의 비결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수백명을 그 몇일동안 집에 가서 자고 먹고 싸게하면 쌀가마니와 기타 부식비가 누구에게 남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국가의 재정을 절약하자고 했다면 그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다. 그곳에 책임자들의 뱃속으로 들어갔을 것은 너무나 뻔한 추리다. 다시 말해서 먼저 재벌들을 키우고 후에 그 떨거지들에게 배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박정권이 막상 백성의 배를 더 이상 골리지 않겠다고 공언했으나 군인들이 무슨 뽀죽한 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똑똑한 사람을 등용해서 先輸出 後分配라는 정책이 시작되었다. 그 똑똑한 사람이 누구였던고? 바로 南悳祐(남덕우)교수였다.
내가 1962년 6월 중반에 제대, 8월에 復學(복학)해서 강의실에 앉았더니 바로 이 양반이 강의실에 나타났다. 당시에 그는 국민대학의 정교수였고, 우리 서울상대에는 강사를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후에 이현재교수도 같은 길을 택했지만. 내 경제과 동창되는 민아무개가 이승윤교수(후에 국회의원)와 남교수가 경제학사전을 편찬하던 차에 군대동창도 되는 그를 따라서 남교수 집을 찾은 적이 있다. 우리는 불광동에 살던 시절인데 이 분이 살던 되는 우리들 국민주택보다는 더 좋은 데였다. 그래 봤자지만.
1960년에 입학하자 마자 4-19학생의거에 휘말려들어서 학교는 휴강의 연속이었다. 어쩌다 교수의 얼굴을 보는둥 마는둥 하다가 1학년을 배운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던지라 이럴 바에는 병역의무라도 일지감치 때우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되어 빵빵군번의 1년 6개월을 마치자던 계획이 2년의 공백을 초래하고 말았다.
남교수가 무었을 강의했는지 전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경제원론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처지에 그가 '선성장 후배분'의 강의를 했을 법했지만 지금 두어달 남겨놓은 76세에 그가 한국경제 성장의 청사진을 박통에게 제시했던 장본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2013년에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사실도 이제 접하게 됐다.
1968년에 미국 Stanford에서 초청교수로 갔다고 돼있는데, 그 다음해인 1969년에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위원을 했으면 그 외출이 그저 바람쏘기 나들이가 아니었나 한다. 아무튼 그 날 이후로 1983년 박통의 곁을 떠나기 까지 14년간에 한국의 경제발전의 마도구찌를 한 주역인물이었다. 그의 업적으로 100억불 달성을 처준다는데 이것 역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새발의 피에 해당한다.
삼성전자가 2016년의 4분기의 매출액이 53.33조라고 하는데 이를 한화가 1,000원/1 dollar로 계산하기 쉽게 잡아서 대략 50억불에 해당한다. 크게 잡아서 삼성전다 혼자서만 년간 200억불을 수출하고 있다. 이거 웃기는 얘기는 이야기가 아니오? 박정희대통을 한국이 알아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메.
남덕우 장관이 시작한 선수출이 오늘날 이처럼 성장했으니 그가 주도한 수출정책이 한국을 고도로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 후광을 업고 등장한 그의 딸이 무었을 했는가? 그녀가 後分配(후분배)가 뭔지를 알았겠으며 그것을 위하여 무엇을 했다는 말이냐는 거다.
기껏한다는 것이 삼성의 돈을 탐내서 최순실, 박근혜 그리고 이재용 부회장이 뿜빠이를 했지 않았나 해서 전 국민이 지금 난리를 치고 있는 겁니다요. 워들 그랑 디야? 그만큼 가졌으면 배고푼 90% 국민들에게 좀 나누어주면 죽어, 죽냐구? 물론 좀더 두고 볼 일이기는 해도. -8번에서 계속함
禪涅槃
그 제1조가 '우리는 反共(반공)을 國是(국시)로 삼는다'. 제2조는 '기어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한다' 뭐 어쩌구, 저쩌구...남어지는 기억하는 것이 없다. 그러고 나더니 '서울에 사는 사람은 손을 들라' 해서 논산훈련소의 마루바닥에서 자다가 처음 두툼한 요와 이불이 그렇게 좋은 것인줄 처음 알게 되었다.
어째서 군사혁명이 나던 그 즈음에 군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서 하룻밤을 자게 조치했는가? 여기에 우리 국민들 속에 깊이 들어가 박혀있는 治富(치부)의 비결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수백명을 그 몇일동안 집에 가서 자고 먹고 싸게하면 쌀가마니와 기타 부식비가 누구에게 남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국가의 재정을 절약하자고 했다면 그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다. 그곳에 책임자들의 뱃속으로 들어갔을 것은 너무나 뻔한 추리다. 다시 말해서 먼저 재벌들을 키우고 후에 그 떨거지들에게 배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박정권이 막상 백성의 배를 더 이상 골리지 않겠다고 공언했으나 군인들이 무슨 뽀죽한 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똑똑한 사람을 등용해서 先輸出 後分配라는 정책이 시작되었다. 그 똑똑한 사람이 누구였던고? 바로 南悳祐(남덕우)교수였다.
내가 1962년 6월 중반에 제대, 8월에 復學(복학)해서 강의실에 앉았더니 바로 이 양반이 강의실에 나타났다. 당시에 그는 국민대학의 정교수였고, 우리 서울상대에는 강사를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후에 이현재교수도 같은 길을 택했지만. 내 경제과 동창되는 민아무개가 이승윤교수(후에 국회의원)와 남교수가 경제학사전을 편찬하던 차에 군대동창도 되는 그를 따라서 남교수 집을 찾은 적이 있다. 우리는 불광동에 살던 시절인데 이 분이 살던 되는 우리들 국민주택보다는 더 좋은 데였다. 그래 봤자지만.
1960년에 입학하자 마자 4-19학생의거에 휘말려들어서 학교는 휴강의 연속이었다. 어쩌다 교수의 얼굴을 보는둥 마는둥 하다가 1학년을 배운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던지라 이럴 바에는 병역의무라도 일지감치 때우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되어 빵빵군번의 1년 6개월을 마치자던 계획이 2년의 공백을 초래하고 말았다.
남교수가 무었을 강의했는지 전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경제원론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처지에 그가 '선성장 후배분'의 강의를 했을 법했지만 지금 두어달 남겨놓은 76세에 그가 한국경제 성장의 청사진을 박통에게 제시했던 장본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2013년에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사실도 이제 접하게 됐다.
1968년에 미국 Stanford에서 초청교수로 갔다고 돼있는데, 그 다음해인 1969년에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위원을 했으면 그 외출이 그저 바람쏘기 나들이가 아니었나 한다. 아무튼 그 날 이후로 1983년 박통의 곁을 떠나기 까지 14년간에 한국의 경제발전의 마도구찌를 한 주역인물이었다. 그의 업적으로 100억불 달성을 처준다는데 이것 역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새발의 피에 해당한다.
삼성전자가 2016년의 4분기의 매출액이 53.33조라고 하는데 이를 한화가 1,000원/1 dollar로 계산하기 쉽게 잡아서 대략 50억불에 해당한다. 크게 잡아서 삼성전다 혼자서만 년간 200억불을 수출하고 있다. 이거 웃기는 얘기는 이야기가 아니오? 박정희대통을 한국이 알아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메.
남덕우 장관이 시작한 선수출이 오늘날 이처럼 성장했으니 그가 주도한 수출정책이 한국을 고도로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 후광을 업고 등장한 그의 딸이 무었을 했는가? 그녀가 後分配(후분배)가 뭔지를 알았겠으며 그것을 위하여 무엇을 했다는 말이냐는 거다.
기껏한다는 것이 삼성의 돈을 탐내서 최순실, 박근혜 그리고 이재용 부회장이 뿜빠이를 했지 않았나 해서 전 국민이 지금 난리를 치고 있는 겁니다요. 워들 그랑 디야? 그만큼 가졌으면 배고푼 90% 국민들에게 좀 나누어주면 죽어, 죽냐구? 물론 좀더 두고 볼 일이기는 해도. -8번에서 계속함
禪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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