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경제사 플랜더스의 개 (펌)
http://www.huffingtonpost.kr/2017/02/18/story_n_14850534.html?utm_hp_ref=korea

넬로와 파트라슈가 걸었던 길, 돈과 욕망이 넘쳤던 길
한겨레 | 작성자 최우성
게시됨: 2017년 02월 19일 12시 23분 KST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19일 12시 27분 KST

[토요판] 최우성의 동화경제사 플랜더스의 개


“정말 너무해. 가난해서 돈을 못 낸다는 이유로 그림을 볼 수 없다니 (…) 저걸 볼 수만 있다면 난 죽어도 좋아.”

어디를 가도 오래된 석조 건물이 눈에 띄는 벨기에 안트베르펜 시내. 다닥다닥 붙은 낮은 지붕 위로 우뚝 솟은 성모대성당 앞에만 이르면, 넬로는 단짝 파트라슈를 남겨두고 안으로 사라지곤 했다. 어느 날 비밀이 풀렸다. 성당 관리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파트라슈도 안으로 들어가봤다. 휘장으로 가려진 제단 양쪽의 커다란 그림 두 점 앞에 서 있는 넬로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넬로와 파트라슈. 둘은 플랜더스(플란데런, 플랑드르) 지방의 어느 작은 마을 오두막에 함께 살았다. 둘은 마음씨 착한 예한 다스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은, 묘한 운명을 공유한 사이다. 젖소를 기르는 이웃들한테 우유통을 받아 수레에 싣고 안트베르펜 시내까지 날라다 주며 품삯을 받는 게 할아버지의 일이다. 넬로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 품에서 자랐고, 플랜더스 지방 토종개인 파트라슈는 그릇 장수의 짐꾼 노릇을 하다 버려진 뒤 할아버지네에서 새 보금자리를 얻었다. 셋이 모여사는 오두막엔 사랑이 가득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기력은 갈수록 쇠했다. 새벽부터 놋쇠 우유통을 실은 초록색 수레를 끄는 건, 어느덧 온전히 넬로와 파트라슈 둘의 몫이 됐다. '플랜더스의 개'의 줄거리 앞토막이다.

'플랜더스의 개'는 원래 벨기에에서도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이었다. 하지만 원작을 토대로 일본 후지TV가 방영한 애니메이션이 선풍적 인기를 끈 뒤 일본 관광객이 대거 몰려오자, 원작의 무대로 추정되는 안트베르펜 외곽 ‘호보컨’이란 마을에 넬로와 파트라슈를 상징하는 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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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무대는 오늘날의 벨기에 북부 일대인 플랜더스 지방의 거점도시 안트베르펜 변두리. ‘50년도 더 지난 옛날에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았다’는 문장으로 짐작건대, 시대적 배경은 1850~60년대 즈음일 게다. 19세기 중엽의 유럽 여느 곳이 다 그러했듯, 이곳 민초들의 삶도 가난의 무게에 짓눌렸다. 다스 할아버지와 넬로, 파트라슈 세 식구 역시 하루에 한끼를 먹기 힘든 날도 많았다. 넬로가 그림을 보는 값으로 성당에 내야 할 ‘은화 한 닢’은 이들에겐 다른 세상 같았다. “넬로, 가난한 사람은 선택권이 없단다. (…) 할아버지는 네가 이 오두막과 작은 땅의 주인이 되고 이웃 사람들한테 ‘나리’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텐데.” 다스 할아버지가 넬로를 앉혀두고 들려주는 이야기는, 평범한 플랜더스 농부들의 평생 소원이 무엇인지 일러준다.

하지만 넬로의 생각은 달랐다. ‘가난한 사람도 선택을 할 수 있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거야.’ 넬로의 꿈을 키워준 건 들판 너머 솟아 있는 성모대성당의 뾰족탑. 그 성당엔 단 한번만이라도 눈으로 보고 싶은 거장의 그림이 있었다. 넬로는 훗날 거장이 된 자기 모습을 상상했다. 게다가 넬로 곁엔 늘 응원해주는 여자친구 알루아도 있었다. 알루아는 마을 뒤편 언덕 위 빨간 풍차 방앗간 주인이자 마을에서 첫째가는 부자인 코제 아저씨의 외동딸. 송판에 숯으로 파트라슈와 알루아를 그린 그림을 빼앗듯 채가며 불쑥 1프랑짜리 은화를 내미는 코제 아저씨에게, 넬로는 “그림은 그냥 가져가세요”라고 말했다. ‘알루아의 그림은 돈 받고 팔 수 없어.’ 거장의 그림을 몇번이고 보고도 남을 돈이나, 넬로에게 알루아는 그런 존재였다.

틈틈이 돌 위에 분필로 주변 풍경을 그리며 놀던 넬로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무려 200프랑의 상금이 걸린 그림대회였다. 넬로는 어둠이 내리는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에 홀로 걸터앉아 있는 노인 그림을 출품했다. 이어 여러 에피소드가 꼬리를 문다. 알루아네 방앗간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나자 코제 아저씨와 마을 사람들은 넬로를 의심하고(…),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어느 밤 죽음의 신이 다스 할아버지를 데려가는데…. 드디어 수상작 발표날. 넬로의 그림은 거기 없었다. “사랑하는 파트라슈, 다 끝나버렸어.”

플랜더스의 개'는 1872년 출간된 마리 루이즈 드 라 라메(필명 ‘위다’)의 작품이다. 위다의 초기작은 상류사회 연애소설에 집중됐으나, 후기작엔 예술이 단골소재로 등장한다. '플랜더스의 개'는 작가의 시야가 사회 현실을 끌어안는 쪽으로도 넓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크리스마스 이야기’란 부제는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크리스마스의 참의미를 되새겨보자는 속내를 엿보게 한다. 비극적 결말이라 여운이 더 짙다. 모든 희망을 잃은 넬로는 크리스마스이브 자정 미사가 끝난 뒤 열려 있는 성당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넬로는 뒤따라온 파트라슈를 끌어안은 채 굶주림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휘장을 걷어버렸다. “드디어 봤어. 하느님 이제 됐어요.” 온 누리가 축복으로 가득 차야 할 크리스마스 아침. 성당 제단 앞엔 넬로와 파트라슈가 쓰러져 있었다. 둘은 살아 있는 동안 늘 함께였고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플랜더스의 개'는 인간(넬로)과 개(파트라슈)의 교감을 그려낸다. 하지만 줄거리를 떠받치는 기둥은 넬로가 “그가 아신다면 나에게 상을 주실 거야”라고 말했던, 그리고 그의 그림 앞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만 거장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바로 안트베르펜이 낳은 화가 루벤스다. ‘루벤스의 무덤인 이 도시는 루벤스 덕분에, 오직 루벤스의 도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도시가 된다.’ 작품 속 이 문장은 화가를 꿈꾼 넬로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안트베르펜에 루벤스가 어떤 의미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신교도 가정에서 태어난 루벤스는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열두살 때 어머니와 함께 안트베르펜으로 이주했다. 소년 루벤스는 이곳에서 외려 가톨릭 영향 아래 성장했다. 신·구교 갈등이 전쟁으로 치닫던 시기에 살았던 루벤스가 반종교개혁 가치를 설파하는 제단화를 주로 그린 배경이다. 특히 스물셋(1600년)에 떠나 서른하나(1608년)에 안트베르펜에 되돌아오기까지, 이탈리아에서 보낸 8년의 세월은 루벤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매듭이다. 베네치아·피렌체·로마·제노바 등 당대 첨단문명의 현장을 옮겨다니며 르네상스 거장들의 영양분을 흠씬 빨아들이고 돌아온 루벤스에게 안트베르펜은 궁정화가의 문호를 열어줬다. '십자가에 올려지는 예수'(1610)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1611~1614)는 그가 안트베르펜 성모대성당에 남긴 걸작이다. 넬로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간절히 원했던 바로 그 그림!

루벤스가 이탈리아에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 뒤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작품 속 넬로는 그토록 소원했던 이 그림을 본 뒤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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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중개무역의 요충지 안트베르펜

플랜더스~이탈리아~플랜더스. 20대 청년화가 루벤스에겐 종교의 고귀함과 예술의 위대함을 깨우치는 ‘구도의 길’이었으리라. 하지만 역사는 이 여정이 근대 세계경제 제1막의 틀을 주조한, 욕망과 이윤이 흘러넘친 ‘세속의 길’이기도 했음을 기억한다. 멀리 떨어진 두 지역은 특히 바다로 한데 묶인 운명공동체였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대서양무역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 두 지역 사이의 뱃길은 유럽 대륙의 일상생활을 지탱한, 말 그대로 ‘기간망’이었다. 상술 좋은 이탈리아 상인들은 지중해를 타고 거슬러 올라 플랜더스 지방까지 갖가지 동방상품을 싣고 와서는 주로 영국과 스페인산 양모와 맞바꿔 돌아갔다. 앞선 기술의 이탈리아 직물산업은 영국과 스페인산 양모의 주요 수요자임과 동시에, 다시 안트베르펜을 거쳐 유럽 대륙 전체에 완제품을 쏟아내는 최대 공급자였다.

처음이자 끝에 안트베르펜이 있었다. 안트베르펜은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 동방과 아프리카, 영국과 대륙 내지, 북부 유럽을 사통팔달로 연결하는 당대 해상 중개무역의 최대 요충지로 떠올랐다. 외국 상인의 신분과 상업거래의 자유가 보장된 이 도시엔 여러 나라의 상관(무역소)이 잇달아 설치됐다. 당시 안트베르펜이 유럽 대륙 전체를 통틀어 다섯손가락 안에 너끈히 들 만큼 번성했던 비밀은 여기에 있다. 1351년에 짓기 시작해 170년 만에 1단계 공사를 끝낸 성모대성당은 찬란했던 안트베르펜의 옛 영화를 증명하는 이정표다.

금융 분야에선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단연 선구자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를 떠난 배가 안트베르펜에 짐을 부린 뒤, 다시 물건을 가득 싣고 출발지로 되돌아오기까지 최대 6개월이 걸렸다. 가격변동, 기후변화, 해적 등 곳곳엔 숱한 위험이 도사렸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상인들은 11~12세기 무렵부터 벌써 어음할인에 눈떴고, 외환업무의 이치도 깨쳤다. 둘 다 금융업의 역사에서 매우 결정적인 장면이다. 원래 서구 기독교 전통에선 대금업이 엄격히 금지됐다. 창조는 오직 신의 권능인데, 돈이 돈을 ‘창조’(이자)하는 대금업은 교리에 정면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대금업자의 주검은 개·소·말의 사체와 함께 묻어야 한다는 규정이 존재할 정도였다. 이탈리아 상인들의 천재성이 빛난 건 이 대목이다. 장사 셈법이 탁월했던 그들은 돈과 돈을 ‘교환’(!)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금융 발전을 억압하던 기독교 교리를 피할 우회로를 찾아냈다. 엄연히 금융기능을 지닌 어음업무(발행·할인·유통)를 두고, 그들은 무역거래를 뒷받침하므로 대금업이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이자수익은 외국돈과 맞바꾸는 겉포장(환차익) 속에 꽁꽁 감춰졌다. 현실은 그들 편이었다.

다시 루벤스. 예술혼을 불사르며 이탈리아 도시를 옮겨다니던 루벤스는 르네상스 거장들의 걸작에 완전 매료됐다. 과연 르네상스 예술을 활짝 꽃피운 버팀목은? 정답은 플랜더스와 이탈리아를 오간 세속의 뱃길 덕택에 차곡차곡 부를 쌓아올린 신흥 상인가문들이다. 이들은 예술가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물류와 금융의 중심지는 곧 예술과 사상이 교류하는 마당이었고, 플랜더스와 이탈리아엔 거대한 예술시장(투자시장)이 형성됐다.

하지만 황혼의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어림잡아 루벤스가 안트베르펜에 되돌아온 무렵부터다. 스페인(구교)에 맞선 네덜란드 독립전쟁(80년전쟁)이 한창이었는데, 상대적으로 구교도의 위세가 더 강했던 안트베르펜은 독립연방(신교)에 참여하지 않았다.(※당시까지 플랜더스는 네덜란드에 속했고, 독립연방에 참여하지 않은 지역이 오늘날의 벨기에로 떨어져 나왔다.) 이때 돈 많은 신교도들이 200㎞가량 북쪽의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옮겨가면서 안트베르펜의 위상은 급속도로 약화됐다.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세계 무역의 중심축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완전히 옮겨간 것. 고만고만한 도시국가들이 이탈리아의 주도권 싸움에 몰두하는 사이, 세상은 국민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스페인·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이 신대륙(대서양무역)을 무대로 패권을 다투는 더 큰 싸움판으로 탈바꿈했다.


넬로의 나이, 15살에서 10살로 낮춰

일본 '후지TV'가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의 하나로 1975년 방영한 애니메이션 '플랜더스의 개' 포스터. 52회짜리물로 일본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모았다.

'플랜더스의 개'가 국내 독자들에게 유독 친숙한 건 일본 후지TV가 1975년 방영한 애니메이션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국내엔 이듬해 옛 동양방송이 들여와 방영했고, 1981~1982년 한국방송을 통해 다시 전파를 탔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선 지나친 각색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플랜더스의 개'가 안겨주는 마음속 ‘잔상’을 결정적으로 바꾼 계기는 원작에선 15살과 12살인 넬로와 알루아의 나이를 10살, 8살로 크게 낮춘 것이다. “알루아, 언젠가는 그 조그만 송판 조각이 그 무게만큼의 은과 맞먹는 가치를 지니게 될 거야. 그땐 네 아버지도 내게 문을 열어주시겠지.” 알루아에게 송판 그림을 선물하며 이렇게 말하는 넬로의 성숙한(!) 풍모는 앙증맞은(!) 꼬마들의 일상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꽤나 낯설지도 모르겠다.(※나폴레옹이 플랜더스 지방을 점령한 뒤 병력으로 강제징발한 최저연령이 16살이다.)

아주 오랜 옛날, 중세사회의 어둠을 이겨내고 멀리 떨어진 플랜더스와 이탈리아를 바삐 오갔던 뭇 상선들의 뱃길. 그 길은 지중해를 축으로 한 근대 세계경제의 제1막을 잉태한 젖줄이었다.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약탈·채굴한 어마어마한 은이 그 젖줄을 타고 은화와 은괴의 형태로 전 유럽에 퍼져갔다. ‘은화 한 닢’조차 없어 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소원을 이룬 넬로의 도시는, 한때 그 풍요로운 젖줄의 길목이었다. 예술도 거장도, 어쩌면 종교도 그 덕에 살을 찌웠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림 한번 볼 수 없던 넬로는 먼동이 트는 이른 아침부터 끝없이 가로수가 펼쳐진 길을 수레로 끌다가 결국 하늘과 맞닿은 길로 단짝 파트라슈와 함께 떠났다. 성화(정신)와 가난(물질)의 극적 대비가 정작 예술을 먹여살렸던 저 세속의 도시 후예의 운명인 건, 정말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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