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서방의 횡설수설(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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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한창 젊었을 때의 일.
하루의 일을 마치고 퇴근 길, 가까이 지내는 친구와 퇴계로 어느 주점에서 긴 목로(木壚)를 가운데 하고 둘은 마주 앉아 막걸리를 죽이기 시작했었지.
안주라곤 빈대떡 넉 점, 양념장과 김치가 전부였다.
여기에 빠지지 않는 게 젊음만이 갖는 내일을 향한 일상의 푸념,
둘은 누가 지랴 이것을 씹고 씹으면서 막걸리 몇 되를 죽여야 일어나곤 했었지.
그런데 하루는 그 친구(고인)가 뜬금없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친구가 어떤 건지 아냐?” 하고...
그 친구는 제2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다가 콩고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로 순직한 고(故) 다그 얄마르 앙네 칼 함마르셸드 의 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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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 고(故) 유엔 사무총장이 보는 친구의 개념.
“ 만일에 내가 사무총장직에 있을 동안엔 수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날 친구하자고 찾아온다. 실제 그렇다.
그러나 내가 훗날 여길 그만 두고 아무도 모르는 산속 어딘가에 있다고 치자, 그 때 그런 환경에 처해 있는 나를 찾아올 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만일에 만일에 어떤 미친 놈이 있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가 보고 싶다고 산 넘고 물 건너
또 산 넘고 물 건너 물어 물어 날 찾아올 이 하나만 있다면 나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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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던 말이 기억나고 아직도 그 의미를 반추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친구?
우선 내가 가슴을 열자 그리고 보듬어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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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리운 이 보듯,
듣고 싶고 보고 싶은 말, 친구....
내겐 한 개도 없다. 물론 이것 모두가 내가 저지른 나의 업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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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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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그 얄마르 앙네 칼 함마르셸드(스웨덴어: Dag Hjalmar Agne Carl Hammarskjöld, 1905년 7월 25일 ~ 1961년 9월 18일)는 스웨덴의 정치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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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편집]
웁살라 대학교와 스톡홀름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1932년 스톡홀름 대학교 교수와 재무 장관,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됐으며 1945년 스웨덴 외교부 고문, 1948년 유럽 경제 협력 기구 수석 대표, 1951년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이후 유엔 수석 대표를 지낸 그는 1953년 제2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함마르셸드는 유엔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세계 평화를 위해 중동 휴전 특사로 파견되는 한편 수에즈 운하 문제와 1956년 헝가리 혁명 등에서 큰 활약을 했다. 이후 1958년 사무총장에 재선되었으나 1961년 콩고 내전을 조정하기 위해 가던 도중에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에서 비행기 사고(1961년 은돌라 UN DC-6 추락 사건)로 죽었다. 그는 같은 해에 최초로 사후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길잡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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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1975 삶을 돌이켜보며..+[9] gobawoo 님의 좋은 글을 읽고 나니 옛 생각에 잠깐 젖어...
gobawoo 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L.A.에 가면 7가와 Vermont Ave.에 있는 백 사장이 운영하는 “고바우” 식당엔 돼지 보쌈이 전문이고 맛있지요.
옛날(1950 년 후반과 60년)엔 동아일보에 시사만화로 김성환 씨가 수고를 해서 당시 사람들이면 고바우 하면 김성환 씨를 떠오르지요.
선생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선생의 필명을 보면 이 마당에서 분명 본 듯 한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이것 참 답답하군요. 분명 전에 여러 글을 올리신 걸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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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한창 젊었을 때의 일.
하루의 일을 마치고 퇴근 길, 가까이 지내는 친구와 퇴계로 어느 주점에서 긴 목로(木壚)를 가운데 하고 둘은 마주 앉아 막걸리를 죽이기 시작했었지.
안주라곤 빈대떡 넉 점, 양념장과 김치가 전부였다.
여기에 빠지지 않는 게 젊음만이 갖는 내일을 향한 일상의 푸념,
둘은 누가 지랴 이것을 씹고 씹으면서 막걸리 몇 되를 죽여야 일어나곤 했었지.
그런데 하루는 그 친구(고인)가 뜬금없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친구가 어떤 건지 아냐?” 하고...
그 친구는 제2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다가 콩고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로 순직한 고(故) 다그 얄마르 앙네 칼 함마르셸드 의 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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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 고(故) 유엔 사무총장이 보는 친구의 개념.
“ 만일에 내가 사무총장직에 있을 동안엔 수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날 친구하자고 찾아온다. 실제 그렇다.
그러나 내가 훗날 여길 그만 두고 아무도 모르는 산속 어딘가에 있다고 치자, 그 때 그런 환경에 처해 있는 나를 찾아올 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만일에 만일에 어떤 미친 놈이 있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가 보고 싶다고 산 넘고 물 건너
또 산 넘고 물 건너 물어 물어 날 찾아올 이 하나만 있다면 나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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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던 말이 기억나고 아직도 그 의미를 반추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친구?
우선 내가 가슴을 열자 그리고 보듬어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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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리운 이 보듯,
듣고 싶고 보고 싶은 말, 친구....
내겐 한 개도 없다. 물론 이것 모두가 내가 저지른 나의 업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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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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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그 얄마르 앙네 칼 함마르셸드(스웨덴어: Dag Hjalmar Agne Carl Hammarskjöld, 1905년 7월 25일 ~ 1961년 9월 18일)는 스웨덴의 정치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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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편집]
웁살라 대학교와 스톡홀름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1932년 스톡홀름 대학교 교수와 재무 장관,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됐으며 1945년 스웨덴 외교부 고문, 1948년 유럽 경제 협력 기구 수석 대표, 1951년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이후 유엔 수석 대표를 지낸 그는 1953년 제2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함마르셸드는 유엔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세계 평화를 위해 중동 휴전 특사로 파견되는 한편 수에즈 운하 문제와 1956년 헝가리 혁명 등에서 큰 활약을 했다. 이후 1958년 사무총장에 재선되었으나 1961년 콩고 내전을 조정하기 위해 가던 도중에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에서 비행기 사고(1961년 은돌라 UN DC-6 추락 사건)로 죽었다. 그는 같은 해에 최초로 사후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길잡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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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1975 삶을 돌이켜보며..+[9] gobawoo 님의 좋은 글을 읽고 나니 옛 생각에 잠깐 젖어...
gobawoo 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L.A.에 가면 7가와 Vermont Ave.에 있는 백 사장이 운영하는 “고바우” 식당엔 돼지 보쌈이 전문이고 맛있지요.
옛날(1950 년 후반과 60년)엔 동아일보에 시사만화로 김성환 씨가 수고를 해서 당시 사람들이면 고바우 하면 김성환 씨를 떠오르지요.
선생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선생의 필명을 보면 이 마당에서 분명 본 듯 한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이것 참 답답하군요. 분명 전에 여러 글을 올리신 걸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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