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다 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Vanity of vanities, saith the Preacher,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 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Ecclesiastes(전도서)1장
어느 아침이라도 잠이 깨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6시경에는 달랐다. 아직도 컴컴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그 시간에는 밝은 아침이었는데...... 아! 어느듯 9월의 가을이구나. 지난 6월 23일 쯤에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그 후에는 차차 밤이 길어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현실로 느꼈다는 이야기인가?
옛 시인은 그러나 세상에는 변한 것이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老子는 오래 전에 세상의 모든 것은 盛(성)했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衰(쇠)하는 것은 自然(자연)의 理致(이치)라고 이야기 했고, 이를 이어받아서 佛家(불가)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생멸변화(生滅變化)하여 잠시도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 고로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겨나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불변(恒常不變)을 바란다. 여기에서 고(苦)가 생기게 마련이라는 모순에 봉착한다는 논리인데......
어느 것이 맞느냐? 서양이랄까 Judea-Christian의 생각은 "모든 것이 영원하다"고 보았고, 중국 및 한국사람들은 "항상 세상은 변한다(Everything is impermanent.)라고 말하니 내 삶의 기본틀에 혼동을 가져온다고.
'모든 것이 다 헛되다' 한다면 뭐 미쳤다고 세상의 富貴榮華(부귀영화)를 위하여 허겁지겁 하겠는가 말이다. 한편 불교나 道家(도가)에서 말하는 대로 현실은 늘상 변하는 고로 뭐든지 간에 세상적인 것에 愛憎(애증), 즉 사랑하고 미워하질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하지가 않다.
엎어치나 자쳐치나 양쪽이 결국에 가서는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 같다. 한쪽은 '허무한 짓을 왜 하는가'를 노래했고, 또 한쪽은 '늘 변하는 현실이건만 영원한 것처럼 착각해서 온갓 고생과 고통에서 신음한다. 그런 헛된 짓을 왜 하느냐구?
그러나 사람들이 하는 데야. 이래서 無知(무지)를 한탄하는 것이리라.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한 말, "저들이 제 하는 짓을 모른다. 고로 이 무식한 인간들을 용서해달라. 다시 말해서 "구원해달라"고. 어디에서 어디로 건져내달라는 건가? 그것을 알려면 우선 '너 자신을 알아야 하겠지비', 지금 어느 싯점에서 허우적거리는 가를......
禪涅槃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 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Ecclesiastes(전도서)1장
어느 아침이라도 잠이 깨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6시경에는 달랐다. 아직도 컴컴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그 시간에는 밝은 아침이었는데...... 아! 어느듯 9월의 가을이구나. 지난 6월 23일 쯤에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그 후에는 차차 밤이 길어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현실로 느꼈다는 이야기인가?
옛 시인은 그러나 세상에는 변한 것이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老子는 오래 전에 세상의 모든 것은 盛(성)했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衰(쇠)하는 것은 自然(자연)의 理致(이치)라고 이야기 했고, 이를 이어받아서 佛家(불가)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생멸변화(生滅變化)하여 잠시도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 고로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겨나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불변(恒常不變)을 바란다. 여기에서 고(苦)가 생기게 마련이라는 모순에 봉착한다는 논리인데......
어느 것이 맞느냐? 서양이랄까 Judea-Christian의 생각은 "모든 것이 영원하다"고 보았고, 중국 및 한국사람들은 "항상 세상은 변한다(Everything is impermanent.)라고 말하니 내 삶의 기본틀에 혼동을 가져온다고.
'모든 것이 다 헛되다' 한다면 뭐 미쳤다고 세상의 富貴榮華(부귀영화)를 위하여 허겁지겁 하겠는가 말이다. 한편 불교나 道家(도가)에서 말하는 대로 현실은 늘상 변하는 고로 뭐든지 간에 세상적인 것에 愛憎(애증), 즉 사랑하고 미워하질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하지가 않다.
엎어치나 자쳐치나 양쪽이 결국에 가서는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 같다. 한쪽은 '허무한 짓을 왜 하는가'를 노래했고, 또 한쪽은 '늘 변하는 현실이건만 영원한 것처럼 착각해서 온갓 고생과 고통에서 신음한다. 그런 헛된 짓을 왜 하느냐구?
그러나 사람들이 하는 데야. 이래서 無知(무지)를 한탄하는 것이리라.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한 말, "저들이 제 하는 짓을 모른다. 고로 이 무식한 인간들을 용서해달라. 다시 말해서 "구원해달라"고. 어디에서 어디로 건져내달라는 건가? 그것을 알려면 우선 '너 자신을 알아야 하겠지비', 지금 어느 싯점에서 허우적거리는 가를......
禪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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