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서방의 횡설수설(사후(死後)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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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누가 나를 이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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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8059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를 읽고 댓글로 올리려다 너무 길어서 여기 따로 올린다. 대체적으로 #5 Jinghis Khan 님의 의견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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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내가 어릴 때 선친이 나를 다리고 추석이면 벌초를 다니셨는데 그 때 기억하고 있던 선대의 묘를 언젠가 선친이 이장(移葬)이 아니고 개장(改葬)을 하여 아주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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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25가 나고 서울이 수복되자 나는 서울로,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가서 살게 되었고 얼마 후 경기도 의정부에 직장을 가지게 된 형을 따라 부모님이 의정부에서 사시다가 거기서 선친은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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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선친은 늘 살아계실 때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에 대하여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있었다. 선친의 뜻도 그러하고 해서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을 해서 북한산 뒤쪽 송추 가는 길의 어느 좁디좁은 흘러내리는 깨끗한 골자기 물에 한 줌의 가루가 된 아버님을 뿌려서 보내 드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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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는 그 자리를 특별히 지정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영구차를 타고 가면서 산 속 깨끗한 곳만 찾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 지금은 거기가 어딘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장소라도 기억을 하고 있다면 서울에 갈 때면 의례히 이곳을 들릴 테고
그래서 잠시나마 선친을 회상 하는 일이 일어나겠지....
아마도 이래서 선친은 이것을 미리 아시고 이렇게 해 줄 것을 우리들에게 바라셨을 것 같다는 걸, 그의 철없는 아들은 70이 넘은 이 나이에야 겨우 선친의 깊은 뜻을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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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선친이 직접 개장을 한 선대의 묘 자리는 지금 아파트가 들어 서 있다. 어쩌다 아주 오랜만에 그래도 어릴 때 살던 고향이라 그리워 한국에 가본 김에 한 번 가보자고 가면 선대 묘 터 위에 서 있는 아파트들을 보곤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 아파트 사람들이 나의 조상을 짓밟고 그 위에 서 있는 기분을 느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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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선친이 생전에 말씀하시던 묘에 관한 선친의 사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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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나라도 좁은데 죽은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땅을 죽이는 것이다.
(이는 국토는 좁은데 농토로 활용치 않고 버린다는 의미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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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자식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왜냐면 언제 어디 가서 살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왜 죽은 조상 묘 때문에 자식이 신경을 쓰게 해서 자식들 앞날에 방해가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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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후대들에게 짐이 된다.
(예를 들면 어느 특정일이 되면 묘가 있으면 거기에 가 보고 싶어지고 못 가면 불효하다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그래도 묘에 자주 갈 수 있다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 하는 자식은 늘 마음에 짐을 안고 살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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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간에도 자주 가지 못 하는 사람에겐 형편이 안 되어 못 가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좋은 쪽으론 생각지는 않는다. 이렇게 해서 형제간의 우애를 해 칠 수도 있고 불효도 만든다고 본다는 의미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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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렇게 살다가 나는 서울에서 계속 살았고 형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 버리니 선친을 정점으로 한 우리의 가족이란 이렇게 갈라지고 헤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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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을 오면서 모시고 온 어머님은 나와 같이 L.A.에서 오래 사시다가 돌아가시기 수 년 전 동부 형네 집으로 가셨고 거기서 몇 년을 더 사시다가 83수로 돌아가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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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나는 형에게 가서 화장한 어머님의 유분을 모시고 와서 일부는 L.A. Griffith Park 어느 나무 밑에 뿌리고 나머지는 한국으로 가서 어머님이 시집와서 선친과 가정을 이룬 곳, 나의 고향 땅의 뒤 산에 가서 뿌려드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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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어느 스님이 말씀을 주시길 유분을 찹쌀밥과 섞어 작은 새알 크기만큼의 뭉치로 만들어 산속 깨끗한 바위위에 올려놓으면 새나 짐승들이 먹게 되면 죽은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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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지나 그 자리에 가 보았더니 깨끗하게 없어져 기분이 아주 좋았었다.
정말로 나의 어머닌 떠나시면서 그간 여러 생물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가셨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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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만간(?) 나의 차례가 올 것인데 이렇게 나도 나의 후손들이 내가 어머니에게 해드린 것과 같이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은연중 집 사람을 통해 일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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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은 죽음이야 당연히 거부감 없이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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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려는 그 순간에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몸부림이라도 친다면 어쩌나 싶고
또한 이걸 가족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 이왼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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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것도 인력으로 되지 않는다면 허는 수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날이 내일이 되더라도 오늘 이 순간은 바른 자세로 깨어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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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전면허엔 만일 사고로 사망 시 나의 시신을 donation한다는 싸인이 되어있다. 죽고 나면 나의 시신을 의학 검사용이나, 아직도 쓸 수 있는 장기가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주어 다른 생명체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자세로 살고 있다.
해서 의료기관에서 필요치 않는 부분은 위의 나의 뜻과 같이 나의 후손들이 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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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건강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으면 누가 나를 이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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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8059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를 읽고 댓글로 올리려다 너무 길어서 여기 따로 올린다. 대체적으로 #5 Jinghis Khan 님의 의견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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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내가 어릴 때 선친이 나를 다리고 추석이면 벌초를 다니셨는데 그 때 기억하고 있던 선대의 묘를 언젠가 선친이 이장(移葬)이 아니고 개장(改葬)을 하여 아주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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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25가 나고 서울이 수복되자 나는 서울로,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가서 살게 되었고 얼마 후 경기도 의정부에 직장을 가지게 된 형을 따라 부모님이 의정부에서 사시다가 거기서 선친은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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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선친은 늘 살아계실 때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에 대하여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있었다. 선친의 뜻도 그러하고 해서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을 해서 북한산 뒤쪽 송추 가는 길의 어느 좁디좁은 흘러내리는 깨끗한 골자기 물에 한 줌의 가루가 된 아버님을 뿌려서 보내 드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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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는 그 자리를 특별히 지정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영구차를 타고 가면서 산 속 깨끗한 곳만 찾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 지금은 거기가 어딘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장소라도 기억을 하고 있다면 서울에 갈 때면 의례히 이곳을 들릴 테고
그래서 잠시나마 선친을 회상 하는 일이 일어나겠지....
아마도 이래서 선친은 이것을 미리 아시고 이렇게 해 줄 것을 우리들에게 바라셨을 것 같다는 걸, 그의 철없는 아들은 70이 넘은 이 나이에야 겨우 선친의 깊은 뜻을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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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선친이 직접 개장을 한 선대의 묘 자리는 지금 아파트가 들어 서 있다. 어쩌다 아주 오랜만에 그래도 어릴 때 살던 고향이라 그리워 한국에 가본 김에 한 번 가보자고 가면 선대 묘 터 위에 서 있는 아파트들을 보곤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 아파트 사람들이 나의 조상을 짓밟고 그 위에 서 있는 기분을 느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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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선친이 생전에 말씀하시던 묘에 관한 선친의 사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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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나라도 좁은데 죽은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땅을 죽이는 것이다.
(이는 국토는 좁은데 농토로 활용치 않고 버린다는 의미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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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자식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왜냐면 언제 어디 가서 살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왜 죽은 조상 묘 때문에 자식이 신경을 쓰게 해서 자식들 앞날에 방해가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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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후대들에게 짐이 된다.
(예를 들면 어느 특정일이 되면 묘가 있으면 거기에 가 보고 싶어지고 못 가면 불효하다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그래도 묘에 자주 갈 수 있다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 하는 자식은 늘 마음에 짐을 안고 살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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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간에도 자주 가지 못 하는 사람에겐 형편이 안 되어 못 가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좋은 쪽으론 생각지는 않는다. 이렇게 해서 형제간의 우애를 해 칠 수도 있고 불효도 만든다고 본다는 의미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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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렇게 살다가 나는 서울에서 계속 살았고 형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 버리니 선친을 정점으로 한 우리의 가족이란 이렇게 갈라지고 헤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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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을 오면서 모시고 온 어머님은 나와 같이 L.A.에서 오래 사시다가 돌아가시기 수 년 전 동부 형네 집으로 가셨고 거기서 몇 년을 더 사시다가 83수로 돌아가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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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나는 형에게 가서 화장한 어머님의 유분을 모시고 와서 일부는 L.A. Griffith Park 어느 나무 밑에 뿌리고 나머지는 한국으로 가서 어머님이 시집와서 선친과 가정을 이룬 곳, 나의 고향 땅의 뒤 산에 가서 뿌려드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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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어느 스님이 말씀을 주시길 유분을 찹쌀밥과 섞어 작은 새알 크기만큼의 뭉치로 만들어 산속 깨끗한 바위위에 올려놓으면 새나 짐승들이 먹게 되면 죽은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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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지나 그 자리에 가 보았더니 깨끗하게 없어져 기분이 아주 좋았었다.
정말로 나의 어머닌 떠나시면서 그간 여러 생물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가셨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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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만간(?) 나의 차례가 올 것인데 이렇게 나도 나의 후손들이 내가 어머니에게 해드린 것과 같이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은연중 집 사람을 통해 일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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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은 죽음이야 당연히 거부감 없이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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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려는 그 순간에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몸부림이라도 친다면 어쩌나 싶고
또한 이걸 가족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 이왼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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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것도 인력으로 되지 않는다면 허는 수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날이 내일이 되더라도 오늘 이 순간은 바른 자세로 깨어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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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전면허엔 만일 사고로 사망 시 나의 시신을 donation한다는 싸인이 되어있다. 죽고 나면 나의 시신을 의학 검사용이나, 아직도 쓸 수 있는 장기가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주어 다른 생명체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자세로 살고 있다.
해서 의료기관에서 필요치 않는 부분은 위의 나의 뜻과 같이 나의 후손들이 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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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건강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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