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차니 지식인의 글 희롱
'힐링' 비판하는 '진보'의 믿음도 환상의 위안일 뿐!
[정치를 거부하기 위한 정치] 존 그레이의 <동물들의 침묵><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손희정 페미니스트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4.25 19:42:52크게 작게 스크랩 바로가기 복사 프린트페이스북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미투데이 보내기 요즘 보내기 C로그 보내기 구글 북마크
1.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도 같은 독서. 이처럼 독창적인 책을, 이처럼 진부한 말로 표현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그레이를 읽는다는 것을 이보다 더 적절히 묘사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환상 속에서 그 사유와 행동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왔다는 신화를 품고 사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그레이의 작업은 최근 읽은 어떤 책보다도 지적으로 자극적이고, 정치적으로 급진적이며, (역사의 진보를 믿고 싶어 안달이 난 나 같은) 사람을 끊임없이 좌절케 했다. 그러니 연작이라도 해도 좋을만한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와 <동물들의 침묵>(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을 함께 읽으면서 나는 "아!"하고 탄성을 지르거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낄낄거리다가 버럭 짜증을 내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온전히 지적일 수만은 없었던 롤러코스터의 정점에는 그레이라면 그저 인간이 헤쳐 나가야 할 '비극적인 우연성의 한 사건'이라고 말했을 법한 세월호 침몰이 있었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그레이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 정점에 이르러서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라고 일갈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 <동물들의 침묵>(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이후 그레이에 따르자면 '인류'라는 것은 "수십억 명의 개인들로 구성된 허구"에 불과하다. 일종의 상상의 공동체인 셈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를 말하는 것 역시 강력한 실효를 가진 허구에 기반을 둔 거대한 환상에 불과하다. 만약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면, 이는 각 인생들의 알 수 없는 총합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통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입에 담을 수 있다면, 이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역사는 두 번 만이 아니라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기실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산포되어 있는 우연적인 사건들의 엮어낼 수 없는 뭉치일 따름이다. 더군다나 세월호 참사가 재차 확인시켜주고 있듯이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레이는 말했다. 지식은 축적될 수 있으나 지혜는 쌓이지 않는다고.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미신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이유들에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인류'라는 허구와 '역사'라는 환상, 그리고 '인류 역사의 진보'라는 신화를 가지게 되었을까? 방대한 인용과 그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자랑하는 그레이의 저작에 다가가기 위해 위대한 문학의 일부분을 인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문명의 속성은 사물에게 잘못된 명칭을 붙인 다음 그 결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는 데 있다. 그리고 잘못 붙여진 이름은 진실한 꿈과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사물들은 다른 것이 된다. 우리가 그들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펴냄), 135쪽)
▲ <불안의 서>(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펴냄). ⓒ봄날의책 이는 그레이가 인간의 하찮음을 이해했던 몇 안 되는 유럽 작가 중 하나로 꼽았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허구적 일기의 한 부분이다. 이 일기가 수록되어 있는 <불안의 서>의 일부분을 비평의 언어로 번역하면 그레이의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 작가는 유사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서 페소아가 말하는 인간의 사유 속에서 세계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즉 인간적 허구로 만들어버린 이 '이름 붙이기'는 <동물들의 침묵>에서 그레이가 주목하는 인간만의 특수성인 '언어와 상징체계'에 다름 아니다. 하찮은 인간 동물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를 다루기 위해서 반드시 언어라는 상징체계에 의존해야 하며, 그 상징체계는 모든 것을 왜곡한다.
"상징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를 다루는 데 도움을 주는 유용한 도구 노릇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상징들을 가지고 만든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으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우리가 인간인 한, 바꿀 수 없는 성향이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이 우주를 모델로 설계되었다고 생각한다. 철학과 종교는 상당 부분 이러한 기만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동물들의 침묵>, 150쪽)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왜곡된 세계 안에서 철학은 인간 이성을, 종교는 인간 구원을 인간 동물 스스로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하는 증거로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자신의 하찮음으로부터 비롯된 환상을 자신의 위대함으로 치환해 내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동물의 진정으로 희귀한 점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믿음은 그야말로 언제든지 미끄러지고 깨질 수 있는 환상이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다. 페소아는 이 일기와 함께 묶여져 있는 또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피곤하다. 모든 환상에 지치고, 환상들이 불러오는 모든 증세에 지친다. 환상 자체에 내재된 상실, 환상을 갖는다는 것의 무익성, 상실하기 위해 환상을 가져야 한다는 선행피곤, 환상을 가졌다는 사실이 주는 근심, 환상의 종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환상을 가졌다는 수치." (<불안의 서>, 139쪽)
그레이로 하여금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 이어 <동물들의 침묵>을 내놓게 한 동력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피곤'이었을 것이다. 페소아가 말하는 것처럼 문명에는 이미 그 문명이 기반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또 악착같이 품고 있는 환상으로부터 비롯된 피곤이 내재되어 있다. 인류가 이룩한 '근대화'와 그 근대화를 추동한 자본의 욕망이 우리의 생활 공간을 '피로사회'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류라는 환상과 함께 탄생한 문명이라는 허구 속에 세계의 피로가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문명이 세계의 '피로물질'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터다.)
그러나 이 피곤함을 해소하기 위해 문명이라는 허구를 관상(觀想)하고자 하는 그레이와 달리 하찮은 인간 동물은 '말씀이 계셨던 그 태초'로부터 이 피곤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자연 세계를 정복하려 해왔다. 그러므로 이 피곤은 세계 생명을 파괴해 온 사건들의 뭉치인 '인류 역사'에 또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관상이란 그레이가 인간 동물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긍정적인 행위로 제안했던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아마도 '응시'에 가깝지 않을까.)
이런 사고의 과정을 거쳐 그레이는 문명이 초래한 피곤으로부터 벗어난 '동물들의 침묵'이라는 독특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동물에게는 침묵이 자연적인 휴식의 상태이지만 인간에게는 내면의 소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변덕스러운 데다 정신없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속성을 가진 인간 동물은 자신의 속성대로 존재하는 데서 놓여나기 위해 침묵에 기대려 한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은 일종의 타고난 권리로 침묵을 즐긴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침묵을 추구하지만 동물은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침묵 속에서 살아간다." (<동물들의 침묵>, 184쪽)
그레이는 이에 덧붙인다. "동물에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에서 결여는 인간이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이상이다."
3.
▲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이후 인간 동물의 하찮음에 대한 통찰과 그 비판은 1989년 이후 역사가 그 목적을 달성했다며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자유주의자나 자본주의 이후를 꿈꾸는 코뮤니스트를 가리지 않고 역사의 진보를 믿는 모든 '휴머니스트'들을 향해 있다. 그레이에게 '휴머니즘'이란 "진보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이 발달하는 과학 지식이 주는 새로운 힘을 사용해서 동물은 벗어나지 못하는 제약을 벗어버릴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은 "고도로 창의력이 있는 종이면서, 또한 가장 약탈적이고 파괴적인 부류의 종"으로서 남아있을 것이다.
그의 이런 태도는 정치의 완전한 무용성에 대한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레이에게 오히려 "좋은 삶이란 진보를 꿈꾸는데 있지 않고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 나가는 데 놓여있다." 하지만 "우리는 비극의 경험을 부정하는 종교와 철학에 길들여져 있"으며, "'행동'이 주는 위안에 기대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그레이에 따르면 너무 무식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다. 결국 좌파들이 그렇게 코웃음 치는 상품으로서의 '힐링'이나, 그레이가 코웃음 치는 환상으로서의 '역사 진보에 대한 믿음'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양자 모두 비극이라는 문명의 본질을 관상하지 않고 비극을 발판으로 삼아 '위안'으로서의 유토피아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레이를 읽으면 누구나 즉각적으로 질문하게 된다. "그래서 뭐? 당신은 신자유주의적 허무주의로 우리를 내몰아 결과적으로 기존 체제에 복무하게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레이가 우리 앞에 내던지는 것은 염세와 같은 우리 시대에 주어진 허무의 한 형태는 아니다. 허무주의적 염세에 빠지는 것은 그레이가 주장하는 바도, 우리가 그레이의 책을 읽고 도출해 낼 결론도 아닌 것이다.
그레이는 '세계에 대한 염오(厭惡)'를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에 대한 인식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그가 염오하는 세계는 하찮은 인간들이 구성해낸 인간적 환상으로서의 세계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레이는 적극적인 인간 사유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가장 급진적인 정치학으로서 생태주의와 만난다. 물론 이는 별 수 없는 휴머니스트인 나의 그레이에 대한 오독이다. 하지만 이것은 왜 (그레이가 그렇게도 비웃는) 인간적 사유의 한 면이 아니란 말인가.
4.
그레이가 "저 게으른 것"이라며 혀를 쯧쯧 차는 꼴을 보게 되더라도 결국 우리는 여전히 치열하게 사유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에겐 인간적으로 사유하고 인간적으로 행동하기를 멈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독서의 정점에서, 또다시, 문명의 민낯과 준비 없이 마주하게 된 이 상황에서도 염세나 허무를 섣부르게 말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탓이리라. 다만 우리가 그레이의 조언에 기대어 할 수 있는 행위란 사건들의 뭉치들이 남겨놓은 폐허로부터 섣부르게 다른 희망으로 눈을 돌려버리지 않는 것 아닐까. 그리고 사유와 행동을 멈출 용기가 없다면, 폐허를 관상할 용기라도 내야함을 깨닫는 것일 터다.
이렇게 인간 동물이 '문명'이라고 믿어온 것의 난폭함을 관상함으로써 우리는 급하게 결론나지 않을 아주 긴 싸움을 다시 또 시작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하찮은 인간 동물이 이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단 한 번의 우연한 기회를 더 이상 망치지 않기 위한 싸움을 말이다. 이 싸움은 흔히 사용하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라는 수사에서 타자화되고 있는 실체 없는 미래를 위한 싸움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레이가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은 세상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아주 겸허한 마음으로 행하는 온전히 나의 동물적 생을 위한 싸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망할 일은 아니다. 세상은 구원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이 싸움의 대상은 어떤 특정한 정권도, 어떤 특정한 전지구적 헤게모니도 아닌, 바로 나, 인간 동물 자신이자, 그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다.
그리하여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레이의 정의에 따르자면) 휴머니스트인 일개 독자가 오독의 과정을 거쳐서 내리는 미련하기 때문에 위안을 주는 결론. 오직 우리 하찮은 인간 동물의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하여, 폐허 속에 남겨졌다는 절망을 안고, 정치를 거부하기 위한 정치. VOTE FOR GREEN.
[정치를 거부하기 위한 정치] 존 그레이의 <동물들의 침묵><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손희정 페미니스트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4.25 19:42:52크게 작게 스크랩 바로가기 복사 프린트페이스북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미투데이 보내기 요즘 보내기 C로그 보내기 구글 북마크
1.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도 같은 독서. 이처럼 독창적인 책을, 이처럼 진부한 말로 표현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그레이를 읽는다는 것을 이보다 더 적절히 묘사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환상 속에서 그 사유와 행동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왔다는 신화를 품고 사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그레이의 작업은 최근 읽은 어떤 책보다도 지적으로 자극적이고, 정치적으로 급진적이며, (역사의 진보를 믿고 싶어 안달이 난 나 같은) 사람을 끊임없이 좌절케 했다. 그러니 연작이라도 해도 좋을만한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와 <동물들의 침묵>(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을 함께 읽으면서 나는 "아!"하고 탄성을 지르거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낄낄거리다가 버럭 짜증을 내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온전히 지적일 수만은 없었던 롤러코스터의 정점에는 그레이라면 그저 인간이 헤쳐 나가야 할 '비극적인 우연성의 한 사건'이라고 말했을 법한 세월호 침몰이 있었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그레이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 정점에 이르러서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라고 일갈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 <동물들의 침묵>(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이후 그레이에 따르자면 '인류'라는 것은 "수십억 명의 개인들로 구성된 허구"에 불과하다. 일종의 상상의 공동체인 셈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를 말하는 것 역시 강력한 실효를 가진 허구에 기반을 둔 거대한 환상에 불과하다. 만약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면, 이는 각 인생들의 알 수 없는 총합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통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입에 담을 수 있다면, 이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역사는 두 번 만이 아니라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기실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산포되어 있는 우연적인 사건들의 엮어낼 수 없는 뭉치일 따름이다. 더군다나 세월호 참사가 재차 확인시켜주고 있듯이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레이는 말했다. 지식은 축적될 수 있으나 지혜는 쌓이지 않는다고.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미신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이유들에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인류'라는 허구와 '역사'라는 환상, 그리고 '인류 역사의 진보'라는 신화를 가지게 되었을까? 방대한 인용과 그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자랑하는 그레이의 저작에 다가가기 위해 위대한 문학의 일부분을 인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문명의 속성은 사물에게 잘못된 명칭을 붙인 다음 그 결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는 데 있다. 그리고 잘못 붙여진 이름은 진실한 꿈과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사물들은 다른 것이 된다. 우리가 그들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펴냄), 135쪽)
▲ <불안의 서>(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펴냄). ⓒ봄날의책 이는 그레이가 인간의 하찮음을 이해했던 몇 안 되는 유럽 작가 중 하나로 꼽았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허구적 일기의 한 부분이다. 이 일기가 수록되어 있는 <불안의 서>의 일부분을 비평의 언어로 번역하면 그레이의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 작가는 유사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서 페소아가 말하는 인간의 사유 속에서 세계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즉 인간적 허구로 만들어버린 이 '이름 붙이기'는 <동물들의 침묵>에서 그레이가 주목하는 인간만의 특수성인 '언어와 상징체계'에 다름 아니다. 하찮은 인간 동물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를 다루기 위해서 반드시 언어라는 상징체계에 의존해야 하며, 그 상징체계는 모든 것을 왜곡한다.
"상징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를 다루는 데 도움을 주는 유용한 도구 노릇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상징들을 가지고 만든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으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우리가 인간인 한, 바꿀 수 없는 성향이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이 우주를 모델로 설계되었다고 생각한다. 철학과 종교는 상당 부분 이러한 기만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동물들의 침묵>, 150쪽)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왜곡된 세계 안에서 철학은 인간 이성을, 종교는 인간 구원을 인간 동물 스스로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하는 증거로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자신의 하찮음으로부터 비롯된 환상을 자신의 위대함으로 치환해 내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동물의 진정으로 희귀한 점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믿음은 그야말로 언제든지 미끄러지고 깨질 수 있는 환상이기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다. 페소아는 이 일기와 함께 묶여져 있는 또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피곤하다. 모든 환상에 지치고, 환상들이 불러오는 모든 증세에 지친다. 환상 자체에 내재된 상실, 환상을 갖는다는 것의 무익성, 상실하기 위해 환상을 가져야 한다는 선행피곤, 환상을 가졌다는 사실이 주는 근심, 환상의 종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환상을 가졌다는 수치." (<불안의 서>, 139쪽)
그레이로 하여금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 이어 <동물들의 침묵>을 내놓게 한 동력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피곤'이었을 것이다. 페소아가 말하는 것처럼 문명에는 이미 그 문명이 기반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또 악착같이 품고 있는 환상으로부터 비롯된 피곤이 내재되어 있다. 인류가 이룩한 '근대화'와 그 근대화를 추동한 자본의 욕망이 우리의 생활 공간을 '피로사회'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류라는 환상과 함께 탄생한 문명이라는 허구 속에 세계의 피로가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문명이 세계의 '피로물질'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터다.)
그러나 이 피곤함을 해소하기 위해 문명이라는 허구를 관상(觀想)하고자 하는 그레이와 달리 하찮은 인간 동물은 '말씀이 계셨던 그 태초'로부터 이 피곤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자연 세계를 정복하려 해왔다. 그러므로 이 피곤은 세계 생명을 파괴해 온 사건들의 뭉치인 '인류 역사'에 또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관상이란 그레이가 인간 동물이 할 수 있는 유일하게 긍정적인 행위로 제안했던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아마도 '응시'에 가깝지 않을까.)
이런 사고의 과정을 거쳐 그레이는 문명이 초래한 피곤으로부터 벗어난 '동물들의 침묵'이라는 독특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동물에게는 침묵이 자연적인 휴식의 상태이지만 인간에게는 내면의 소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변덕스러운 데다 정신없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속성을 가진 인간 동물은 자신의 속성대로 존재하는 데서 놓여나기 위해 침묵에 기대려 한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은 일종의 타고난 권리로 침묵을 즐긴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침묵을 추구하지만 동물은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침묵 속에서 살아간다." (<동물들의 침묵>, 184쪽)
그레이는 이에 덧붙인다. "동물에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에서 결여는 인간이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이상이다."
3.
▲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이후 인간 동물의 하찮음에 대한 통찰과 그 비판은 1989년 이후 역사가 그 목적을 달성했다며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자유주의자나 자본주의 이후를 꿈꾸는 코뮤니스트를 가리지 않고 역사의 진보를 믿는 모든 '휴머니스트'들을 향해 있다. 그레이에게 '휴머니즘'이란 "진보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이 발달하는 과학 지식이 주는 새로운 힘을 사용해서 동물은 벗어나지 못하는 제약을 벗어버릴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은 "고도로 창의력이 있는 종이면서, 또한 가장 약탈적이고 파괴적인 부류의 종"으로서 남아있을 것이다.
그의 이런 태도는 정치의 완전한 무용성에 대한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레이에게 오히려 "좋은 삶이란 진보를 꿈꾸는데 있지 않고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 나가는 데 놓여있다." 하지만 "우리는 비극의 경험을 부정하는 종교와 철학에 길들여져 있"으며, "'행동'이 주는 위안에 기대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그레이에 따르면 너무 무식하고, 게으르기 때문이다. 결국 좌파들이 그렇게 코웃음 치는 상품으로서의 '힐링'이나, 그레이가 코웃음 치는 환상으로서의 '역사 진보에 대한 믿음'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양자 모두 비극이라는 문명의 본질을 관상하지 않고 비극을 발판으로 삼아 '위안'으로서의 유토피아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레이를 읽으면 누구나 즉각적으로 질문하게 된다. "그래서 뭐? 당신은 신자유주의적 허무주의로 우리를 내몰아 결과적으로 기존 체제에 복무하게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레이가 우리 앞에 내던지는 것은 염세와 같은 우리 시대에 주어진 허무의 한 형태는 아니다. 허무주의적 염세에 빠지는 것은 그레이가 주장하는 바도, 우리가 그레이의 책을 읽고 도출해 낼 결론도 아닌 것이다.
그레이는 '세계에 대한 염오(厭惡)'를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에 대한 인식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그가 염오하는 세계는 하찮은 인간들이 구성해낸 인간적 환상으로서의 세계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레이는 적극적인 인간 사유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가장 급진적인 정치학으로서 생태주의와 만난다. 물론 이는 별 수 없는 휴머니스트인 나의 그레이에 대한 오독이다. 하지만 이것은 왜 (그레이가 그렇게도 비웃는) 인간적 사유의 한 면이 아니란 말인가.
4.
그레이가 "저 게으른 것"이라며 혀를 쯧쯧 차는 꼴을 보게 되더라도 결국 우리는 여전히 치열하게 사유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에겐 인간적으로 사유하고 인간적으로 행동하기를 멈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독서의 정점에서, 또다시, 문명의 민낯과 준비 없이 마주하게 된 이 상황에서도 염세나 허무를 섣부르게 말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탓이리라. 다만 우리가 그레이의 조언에 기대어 할 수 있는 행위란 사건들의 뭉치들이 남겨놓은 폐허로부터 섣부르게 다른 희망으로 눈을 돌려버리지 않는 것 아닐까. 그리고 사유와 행동을 멈출 용기가 없다면, 폐허를 관상할 용기라도 내야함을 깨닫는 것일 터다.
이렇게 인간 동물이 '문명'이라고 믿어온 것의 난폭함을 관상함으로써 우리는 급하게 결론나지 않을 아주 긴 싸움을 다시 또 시작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하찮은 인간 동물이 이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단 한 번의 우연한 기회를 더 이상 망치지 않기 위한 싸움을 말이다. 이 싸움은 흔히 사용하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라는 수사에서 타자화되고 있는 실체 없는 미래를 위한 싸움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레이가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은 세상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아주 겸허한 마음으로 행하는 온전히 나의 동물적 생을 위한 싸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망할 일은 아니다. 세상은 구원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이 싸움의 대상은 어떤 특정한 정권도, 어떤 특정한 전지구적 헤게모니도 아닌, 바로 나, 인간 동물 자신이자, 그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다.
그리하여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레이의 정의에 따르자면) 휴머니스트인 일개 독자가 오독의 과정을 거쳐서 내리는 미련하기 때문에 위안을 주는 결론. 오직 우리 하찮은 인간 동물의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하여, 폐허 속에 남겨졌다는 절망을 안고, 정치를 거부하기 위한 정치. VOTE FOR 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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