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광대
어깨가 축 처진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가서 말한다. “의사선생님, 사는 게 너무 팍팍하고 고달파요.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이 험한 세상에 저 혼자 버려진 것 같아요.” 의사가 대답한다. “아 그 건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에 유명한 광대가 마을에 오는데, 거기 한 번 가 보세요. 금방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그 남자가 울음을 터뜨리면서 말한다. “선생님, 근데... 제가 바로 그 광대거든요.”
지난 주 로빈 윌리엄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앨런 무어의 유명한 만화소설 ‘경비원(Watchmen)’에 나오는 장면이다. 세상사람들에게 늘 웃음을 선사하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개인적인 고뇌와 허무감으로 괴로워 하던 또 한 사람의 ‘슬픈 광대’가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함으로써 우리곁을 떠났다.
그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우울증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울증은 사람들이 심한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인 스트레스 또는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느낄 때 흔히 빠지기 쉬운 심리적 상태로 심할 경우에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하므로 흔히 ‘악마의 병’이라고 부른다. 남성의 약 10%, 여성의 약 20%가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그 중 약 10-15%가 자살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인간이 다른 동식물들과 다른 점은 살아가는데 나름대로의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생존의 조건만 충족되면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가는 다른 동식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단순한 생존의 차원을 넘어 뭔가 ‘살아가는 의미’를 필요로 하고, 이 의미를 찾지 못 하면 비록 육체적 생존을 위한 조건이 충분히 갖춰지더라도 괴로워 하고 심지어 삶을 포기하기도 하는 특이한 존재이다..
일찍이 석가모니는 인생이란 생노병사로 대표되는 고난의 연속이라고 했다. 신경정신과의사이며 의미치료법(Logotherapy)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괴롭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면서 좌절하지 않고 의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기의 독특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미찾기의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프랭클은 190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유태인관료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2차대전 때 가족과 함께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끌려가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고 네 곳의 수용소를 전전한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서 돌아왔다. 그는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야 했던 수용소의 처참한 생활속에서도 자신의 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힘든 시간을 견뎌내도록 용기를 북돋움으로써 아름답고 의미있는 삶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처럼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남을 위해 뭔가를 함으로써 자신의 시련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가는 이들을 보면서, 프랭클은 “살아가는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현실적인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랭클은 ‘인간의 의미추구(Men’s Search for Meaning)’란 책(한국에서는 ‘죽음의 수용소’란 제목으로 출간)을 써서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많은 현대인들이 소위 ‘실존적 공허(Existentilelles Vakuum)’속에서 남이 하는대로 따라 하는 ‘동조주의’나 남이 시키는대로 하는 ‘전체주의’에 목을 매거나 , 아니면 아예 ‘의미상실’의 심연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그는 이런 상태를 의미추구의 의지를 잃어버린 상태 즉, ‘누제틱 노이로제(Noogetic Neurosis)’라고 부르고, 병의 원인을 심리적인 차원이 아닌 인간실존의 정신론적 차원에 두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의미치료법’을 창안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쾌락에의 의지’를 가진 존재로 파악했고, 아들러는 ‘권력에의 의지’를 가진 존재로 파악했지만, 프랭클은 인간을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 봤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 가지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고 주장했다. 그 첫째는 훌륭한 예술품이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고 가치를 느끼고 의미를 찾는 경험적 가치로서 세상을 받아들이는데서 생기는 가치이다. 두번째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에 의한 자아실현을 통해서 얻는 가치로 세상에 뭔가 가치있는 것을 내놓음으로써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할 아름다움도, 창조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반응은 오직 수용뿐이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이 태도적가치이다. 어느 의사가 아내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괴로워 하면서도 ‘이 슬픔은 아내에 대한 사랑의 댓가로 치르는 값’이라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참을 수 있게 된다는 식이다. 열정, 용기, 유머감각등이 이 태도적 가치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인간은 비록 나치수용소와 같은 극한상황에서도 ‘내가 그 상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를 결정할 자유’까지는 빼앗을 수 없다는 점을 자각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김상용시인은 그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서 “…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했듯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늘 무슨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니다. 그저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생이 무의미하고 허무한 생각이 들다가도 가끔씩 조그만 즐거움과 행복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또 때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에 의해서 괴로움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런데, 자신이 처한 현실이 어떻든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남들보기에 죽지 못해 사는 듯한 삶도 본인에게는 의미있는 삶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겉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이 갖춰진 삶이라 할지라도 당사자는 사는 의미를 찾지 못해 괴롭고 허무하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조그마한 일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갈 일이다. http://blog.naver.com/damianrah
지난 주 로빈 윌리엄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앨런 무어의 유명한 만화소설 ‘경비원(Watchmen)’에 나오는 장면이다. 세상사람들에게 늘 웃음을 선사하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개인적인 고뇌와 허무감으로 괴로워 하던 또 한 사람의 ‘슬픈 광대’가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함으로써 우리곁을 떠났다.
그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우울증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울증은 사람들이 심한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인 스트레스 또는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느낄 때 흔히 빠지기 쉬운 심리적 상태로 심할 경우에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하므로 흔히 ‘악마의 병’이라고 부른다. 남성의 약 10%, 여성의 약 20%가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그 중 약 10-15%가 자살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인간이 다른 동식물들과 다른 점은 살아가는데 나름대로의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생존의 조건만 충족되면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가는 다른 동식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단순한 생존의 차원을 넘어 뭔가 ‘살아가는 의미’를 필요로 하고, 이 의미를 찾지 못 하면 비록 육체적 생존을 위한 조건이 충분히 갖춰지더라도 괴로워 하고 심지어 삶을 포기하기도 하는 특이한 존재이다..
일찍이 석가모니는 인생이란 생노병사로 대표되는 고난의 연속이라고 했다. 신경정신과의사이며 의미치료법(Logotherapy)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괴롭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면서 좌절하지 않고 의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기의 독특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미찾기의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프랭클은 190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유태인관료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2차대전 때 가족과 함께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끌려가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고 네 곳의 수용소를 전전한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서 돌아왔다. 그는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야 했던 수용소의 처참한 생활속에서도 자신의 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힘든 시간을 견뎌내도록 용기를 북돋움으로써 아름답고 의미있는 삶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처럼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남을 위해 뭔가를 함으로써 자신의 시련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가는 이들을 보면서, 프랭클은 “살아가는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현실적인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랭클은 ‘인간의 의미추구(Men’s Search for Meaning)’란 책(한국에서는 ‘죽음의 수용소’란 제목으로 출간)을 써서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많은 현대인들이 소위 ‘실존적 공허(Existentilelles Vakuum)’속에서 남이 하는대로 따라 하는 ‘동조주의’나 남이 시키는대로 하는 ‘전체주의’에 목을 매거나 , 아니면 아예 ‘의미상실’의 심연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그는 이런 상태를 의미추구의 의지를 잃어버린 상태 즉, ‘누제틱 노이로제(Noogetic Neurosis)’라고 부르고, 병의 원인을 심리적인 차원이 아닌 인간실존의 정신론적 차원에 두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의미치료법’을 창안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쾌락에의 의지’를 가진 존재로 파악했고, 아들러는 ‘권력에의 의지’를 가진 존재로 파악했지만, 프랭클은 인간을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 봤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 가지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고 주장했다. 그 첫째는 훌륭한 예술품이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고 가치를 느끼고 의미를 찾는 경험적 가치로서 세상을 받아들이는데서 생기는 가치이다. 두번째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에 의한 자아실현을 통해서 얻는 가치로 세상에 뭔가 가치있는 것을 내놓음으로써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할 아름다움도, 창조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반응은 오직 수용뿐이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이 태도적가치이다. 어느 의사가 아내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괴로워 하면서도 ‘이 슬픔은 아내에 대한 사랑의 댓가로 치르는 값’이라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참을 수 있게 된다는 식이다. 열정, 용기, 유머감각등이 이 태도적 가치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인간은 비록 나치수용소와 같은 극한상황에서도 ‘내가 그 상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를 결정할 자유’까지는 빼앗을 수 없다는 점을 자각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김상용시인은 그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서 “…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했듯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늘 무슨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니다. 그저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생이 무의미하고 허무한 생각이 들다가도 가끔씩 조그만 즐거움과 행복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또 때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에 의해서 괴로움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런데, 자신이 처한 현실이 어떻든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남들보기에 죽지 못해 사는 듯한 삶도 본인에게는 의미있는 삶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겉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이 갖춰진 삶이라 할지라도 당사자는 사는 의미를 찾지 못해 괴롭고 허무하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조그마한 일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갈 일이다. http://blog.naver.com/damianr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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