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代 대통령 통치 스타일-김영삼 편
<金泳三·金寧 金氏, 신라의 적통을 잇는 자부심>
●정계 진입 희망하던 정치학 교수 매제(妹弟)를 끝까지 만류하고…
●차남 현철씨만 유일한 예외, 결국 거대한 덫이 되어 정권 발목잡아
●야당 시절부터 YS 주변에 포진한 금녕 김씨 종친들의 동반 성장
김대중 대통령의 가락 김씨가 거족임에도 불구하고 망국의 한을 삭여온 ‘정치적 변방’의 후예라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통일신라의 ‘적통’을 잇는 신라계 김씨의 후손이다. 본관이 금녕(金寧) 김씨(金氏)다. 신라 경순왕의 8세손인 김시흥(金時興)을 시조로 모신다. 따라서 김시흥은 신라 김씨의 원조 김알지(金閼智)의 35세손이 된다.
김시흥은 의성(義城)에서 출생해 고려 인종때 묘청의 난을 평정해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 지명을 따 본관을 금녕으로 하다 고려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수로왕 계통의 김해 김씨와의 구분을 위해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금녕 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 사람인 김문기의 명성이 크게 알려진 뒤 여러 사람이 그 후손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등 종통(宗統)을 어지럽히자 1865년(고종 2년)에 다시 금녕으로 확정하였다.금녕 김씨가 배출한 인물로는 조선 개국공신 김인찬, 사육신의 한 사람인 김문기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김문기 이후 이렇다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다 해방 이후 문중에서 김홍일 장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나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중에서는 시조 이래 처음으로 등장한 ‘임금’이 되는 셈이다.
친인척 정치권 진입 불가
YS는 금녕 김씨 문정공파(文正公派) 28대손으로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1371번지에서 태어났다. 1928년 12월4일 생이지만 호적에는 1927년 12월20일 생으로 기록되었다. 실제 나이보다 한 살 더 많게 되어 있다.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金洪祚)와 모친 박부연(朴富連, 작고)씨 사이에서 태어난 1남5녀 중 첫째. 이름 ‘영삼’(泳三)은 ‘물을 세번 헤엄쳐야 금빛을 만난다’는 뜻으로 조부 김동옥(金東玉)씨가 지었다. 집안에서는 금빛이 대권을 암시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많았다고 한다. YS의 모친 박부연씨는 1960년 여름 무장간첩에 의해 피살됐다.
야당 시절부터 친인척 정계 입문 고집스럽게 말려
YS는 집안 식구들이 정치에 나서는 것을 극구 말렸다. 그래서인지 여동생 다섯은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았다. 큰동생 호금(好今)씨는 김상기씨와 결혼해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다. 김상기씨는 장인 김홍조옹과 함께 마산에서 수산업에 종사했는데 일찍 작고했다. 둘째동생 호아(好兒)씨의 남편 김영모(작고)씨는 생전에 도로공사 차장을 지냈다. 슬하에 1남3녀가 있다.
셋째동생 호임(好任)씨의 남편 김상한(金庠漢)씨는 YS와 인연이 깊다. 부산에서 멸치어장과 배 5척을 갖고 있었던 사업가 상한씨는 YS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 비공식 지역구 관리자로 불릴 정도였다. 슬하에 1남4녀를 두었고 사업도 탄탄했다. 넷째동생 두선(斗善)씨의 남편 안양성결교 신학교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는데 평소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YS가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접었다.
막내동생 두아(斗岳)씨는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남편 김창원(金昌源)씨와 함께 도미, 워싱턴에서 무역업을 했다. 김창원씨는 중앙고를 나와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YS 재임 기간 귀국해 한국경영경제연구소 소장, 한일경제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1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의사, 장녀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창원씨의 형이 현재 세종대학교 국제교류원 원장으로 있는 김정원(金正源)씨. 김정원씨는 경기고를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을 지낸 수재다. 미국유학을 떠날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YS가 직접 공항으로 가서 배웅할 정도로 재능을 아끼는 인물이었다. 1987년 대선때 YS의 외교안보특보를 지냈고, 문민 정부에서 안기부 2차장을 맡아 주목받았다. 그러나 국적 시비로 곧 낙마했고 이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YS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의 사이에 혜영(惠英)·혜경(惠京)·은철(恩哲)·현철(賢哲)·혜숙(惠淑)씨 등 2남3녀를 두었다.
큰딸 혜영씨는 YS의 자식들 중에서 차남 현철씨와 함께 성격이 활달하고 정치적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맏사위 이창해(李昌海)씨는 혜영씨의 연세대 선배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는데, 이 때문에 YS가 결혼을 반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창해씨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 과정에 등록했지만, 야당 시절 YS가 극구 말려 뜻을 접고 LA에서 무역업을 했다.
차녀 혜경씨는 경기여고·이화여대 음대 성악과 출신. 경기여고 재학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딸 서영씨와 동급생이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서영씨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조용하게 지낸 반면, 혜경씨는 활달하게 학교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재미교포 송영석(宋英錫)씨와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하와이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송영석씨의 원래 이름은 송영삼(宋永三).
장인 이름과 발음이 똑같아 결혼 뒤 영석으로 개명했다.
장남 은철씨는 한양대 공대를 졸업하고 황경미씨와 결혼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오퍼상을 했다. YS 임기말 귀국, 할아버지의 멸치어장을 이어받았다. 상도동에서는 집안 장남으로서 가업을 잇는 것이라고 설명해 왔지만, 문민정권 시절 동생 현철이 소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사에 개입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유일한 예외(현철)가 거대한 덫으로
문민정부의 ‘황태자’ 차남 현철씨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경복고와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에서 국제금융을 전공했다. 1987년 쌍용투자증권에 입사했지만 대권 주자를 아버지로 둔 덕에 곧 그만두었다. 그해 대선때 막후에서 활동하며 여론조사 등 과학적인 선거운동 기법을 도입해 YS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선거에 여론조사를 도입한 것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현철씨는 대학 진학 때 정치학 전공을 희망했지만 역시 부친의 만류로 사학으로 바꿨다. 집안 식구를 정치판에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YS의 고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철씨는 성심여대 의상학과를 나온 김정현(金姃炫)씨와 결혼했다. 김정현씨는 현철씨의 여동생 혜숙씨의 초등학교·중학교·대학교 동기동창으로, 현철씨는 동생의 중매로 결혼에 골인한 셈이다. 장인이 남광토건·우창건설·동양고속 사장을 역임한 전문경영인 김웅세(金雄世)씨다. 김웅세씨는 경복고와 서울대 상대를 나와 철도청에서 국장을 지낸 뒤 경영인으로 변신한 케이스. 사돈인 YS가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일 때인 1991년 롯데월드 대표를 맡았다. YS의 술친구이자 정치 조언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YS는 1987년 대선 때부터 자신을 도운, 성격마저 자신을 쏙 빼닮은 차남 현철씨에 대해서는 ‘친인척 정치개입 불가’라는 고집을 꺾었고, 그로 인해 문민 권력이 무너지는 화를 불렀다. 지금도 상도동 주변에서 ‘땅을 치며’ 아쉬워하는 일화가 있다. 문민정권 초기 실세 중 한명이었던 김덕룡 의원은 YS에게 차남 현철씨를 해외로 유학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YS도 그런 진언에 귀를 귀울였다. 그러나 현철씨는 아버지에게 강력 반발했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YS는 아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현철씨와 김덕룡 의원은 아직까지 서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보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김현철씨가 국정에 개입한다는 사실은 단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으로만 존재했다. 언론에 김현철은 성역이었다. 1996년 그가 유엔청년협회 회장으로 공식 직함을 갖게 되면서 겨우 동정기사가 언론을 장식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한보사건이 터지면서 YS의 국정장악력은 급속히 와해됐고, 현철씨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모든 것’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사실상 김현철씨는 한보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국정 농단 혐의들에 묻혀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는 처음으로 쇠고랑을 찼다. 정국은 이미 ‘한보게이트’에서 ‘소산(김현철의 별명)게이트’로 바뀌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대신해 정국 운영의 컨트롤타워 노릇을 했던 김현철 세력은 붕괴됐고, 덩달아 문민 권력의 사령탑은 쑥대밭이 되었다. YS는 사실상 정치적 식물인간 상태로 임기말을 맞았고, 정치권력은 진공상태였다. 한보사건이 민주계의 정치적 무덤이라면, 천하의 승부사 YS가 쓰러진 곳은 포연 자욱한 ‘소산게이트’라는 전쟁터였다. 집안 식구가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던 YS는 자신이 ‘유일한 예외’로 인정했던 차남 현철씨 때문에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친인척 문제를 다룰 때 어떠한 예외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남긴 사례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막내딸 혜숙씨는 성심여대와 이화여대 성악과를 나왔다. 미국 뉴욕에서 치과의사를 하면서 한인회 활동에 열성을 보인 이춘근(李春根)씨의 아들 이병로(李炳魯)씨와 결혼했다. YS의 막내사위 이병로씨는 미국 코넬대와 뉴욕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 두사람의 혼인을 주선한 인물이 1980년대 뉴욕에서 YS후원회를 조직했던 임정규씨다. 임씨는 YS의 비서 출신으로 미국유학을 떠났다가 뉴욕에 눌러앉았다. YS 재임 기간 민자당 부대변인, 수자원공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막내사위 이병로(미국명 부르스 리)씨는 문민정부때 한국전력·LG 등 국내 공기업과 대기업들이 미국의 PCS 업체인 넥스트웨이브사에 2억여달러를 투자했다 사업 실패로 투자대금을 날린 이른바 ‘넥스트웨이브사건’에 연루돼 현 정부에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손명순 여사는 ‘마산 재벌’ 손상호(孫相鎬)씨의 딸이다. 손상호씨는 마산에서 ‘경향고무’라는 기업을 경영했는데, 당시 영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전쟁 직후 ‘하얀고무신’을 찍어낸 공장으로 유명했다. 손상호씨는 슬하에 2남7녀를 두었는데, 손여사가 맏딸이다. 그 아래로 은배(恩培)·태자(泰子)·태강(泰江) 영식(英植)·태희(泰熙)·귀희(貴嬉)·은혜(恩惠)·은주(恩珠) 등이 있다. 둘째 은배씨와 넷째 영식씨가 남자 형제다.
처사촌 손주환은 ‘노태우 사람’
YS의 처가 쪽도 정치적으로 표난 인물은 없다. 문민 정부에서 약간의 잡음을 일으킨 사례가 손여사 바로 밑 동생 은배씨인데,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한국교사협의회 회장에 추대되어 항간에 친인척 시비가 일기도 했다. 당시 은배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친인척이니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것은 엄청난 모욕이다.
대통령 친인척은 자기 능력을 실현할 기회도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라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YS의 오른팔이었던 김동영 전 의원과 동국대 동창이다.YS의 첫째동서 도재영(태자씨의 남편)씨는 한양대 공대,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YS 재임 시절 기아서비스 전무이사, 기아자동차 사업부문 사장과 기아그룹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민주국민당 당무위원으로 있다.
손주환(孫柱煥)씨는 손명순 여사의 사촌동생이다. “경향신문”·“중앙일보” 등을 거친 언론인 출신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수석과 공보처 장관, 전국구 의원 등을 역임했다. YS쪽보다 노태우 사람으로 통했다. 그래서 한때 상도동에서는 ‘남보다 못한 사람’으로 평하기도 했으나 1992년 대선 때는 YS 캠프에 합류했다. 문민정부에서 “서울신문” 사장을 지냈다. 현재는 경남대 북한대학원 초빙교수.
전 청와대 총무수석 홍인길씨는 YS의 6촌동생이다. YS의 조부와 홍인길씨의 조모가 남매지간이다. 고향도 YS와 같은 거제도이다. ‘상도동 집사’가 그의 별명이듯 야당 시절 상도동의 대소사를 챙긴 살림꾼이다. 문민정권에서 청와대 총무수석으로 발탁됐고, YS의 지원을 받아 15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YS정권을 몰락시킨 한보 사건때 정태수 총회장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 권노갑 현 민주당 고문과 함께 옥살이를 했다. 당시 ‘깃털론’을 제기해 한보게이트의 불길이 소산게이트로 옮겨붙는 데 일조했다.
종친을 중용
YS는 25세에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최다선 의원(9선), 최다 원내총무(5회),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연소 총재(47세) 등 우리 헌정사에서 숱한 기록을 갈아치운 ‘신기록 메이커’다. 금녕 김씨 문중에서는 YS 말고 정치적으로 도드라진 인물이 거의 없었다.
오랜 정치역정에서 YS는 집안 식구들이 정치에 발을 내딛는 것을 극력 반대했지만, 학연과 지연 그리고 금녕 김씨 종친으로 대표되는 혈연으로 얽힌 사람들을 주위에 포진시켰다. 주변에서는 3공에서 5공까지 암울한 상황에서 독재권력과 투쟁해야 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인물을 고르다 보니 인적자원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런 사건이 있었다. 7대 국회의원 선거 때의 일이다. 6대 국회에서 YS의 비서였던 정태수(원래 경찰 정보과 출신)라는 인물이 갑자기 무소속으로 YS의 지역구인 부산 서구에서 출마해 YS의 스캔들을 폭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YS에게 적잖은 정신적 충격을 주었고, 이때부터 사람을 선별해 기용하는 조심함이 생겼다.
주변의 배신 경험이 금녕 김씨 종친 기용으로
이 글에서는 YS때 주요 직책에 오른 학연·지연·혈연에 얽힌 인물들 중에서 혈연, 즉 금녕 김씨 종친들만 일별한다. YS는 다른 정치지도자들보다 종친을 많이 기용한 편이다. 물론 대다수가 자신의 능력으로 주요 직책에 올랐지만, 야당 시절부터 YS와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하면서 ‘동반성장’한 경우도 많이 눈에 띈다.
▷김광일(金光日): 경남 합천 출신으로 박찬종과 경남중 동기다. YS 시절 국민고충처리위원장, 대통령 비서실장, 대통령정치특보 등을 역임했다. 지난 총선에서 민국당 간판으로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김광일씨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전주 등지의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개업했다. 유신 시절부터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약해 ‘부산지역 재야 대부’로까지 불렸다. 원래 재야에서도 YS 계열이라기보다 DJ쪽과 가까웠다. 1980년 DJ가 사형선고를 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변론을 맡기도 했다. 정계 입문은 YS의 손에 이끌려 이루어졌다. 13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된 후 통일민주당 기획조정실장·정책위의장 등을 지냈지만, 3당합당 때는 YS와 결별했다. 이후 국민당에 입당해 YS의 반대편에 서기도 했으나 결국 YS 품으로 돌아왔다.
▷김기수(金基洙): 한양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YS가 1980년대 정치규제에 묶였을 때 상도동에 합류했다. 이후 민추협 의장 비서실장 등 줄곧 수행을 하다 문민정부 때에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지냈다.
▷김재석(金在錫): 전남 영광 출신이다. 광주고와 조선대 총학생회장을 거쳐 1971년 YS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민추협, 신민당 농수산국장, 括渼?총무국장을 거쳐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지냈고,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기섭(金己燮): 대구 출신. 영남고와 한국외국어대를 나온 후 늦깎이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신라호텔에서 의전 업무를 담당하다 YS 눈에 띄어 상도동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신라호텔 상무를 거쳐 상도동 캠프에 합류하여 의전업무를 담당하다 정권 출범후 안기부 운영차장과 기조실장을 지냈다. 한보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고, 현재는 안기부 예산전용 사건으로 구속 수감중.
▷김봉조(金奉祚): YS와는 집안 17촌 아저씨뻘이다. 연세대 법대를 졸업한 뒤 김영삼 의원의 비서를 지냈으며, 거제에서 12대부터 15대까지 내리 3선을 했다. 1996년부터 2년간 한국마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15대 총선때 YS의 차남 현철씨가 거제 출마를 강하게 희망하는 바람에 지역구를 내줬으나 총선에 악영향을 준다는 판단으로 현철씨의 발이 묶였고, 대신 김기춘 의원이 공천을 받았다.
▷김운용(金雲龍): 현재 민주당 의원이고, 대한체육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61년 국방장관 보좌관을 끝으로 정치권을 떠나, 체육계 인사로서 국제 스포츠외교 무대를 누볐다. 얼마전 IOC 위원장 선거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금녕 김씨 종친이 낳은 정치인도 꽤 많다. YS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인물들만 정리했다.
▷김찬우(金燦于): 경북 영덕 출신이다. 한나라당 소속 4선 의원이다. 의사 출신인데 15대 국회에서는 보건복지위원장을 지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경북 청송·영덕에는 약 3,000세대의 금녕 김씨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금녕 김씨 종친 표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는 지역구다. 내리 7대째 금녕 김씨 문중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김동규(金東圭): 충북 청주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를 나와 상공부 차관보, (주)대우 사장을 역임했다. 이후 YS 비서로 변신해 12대 총선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서울 강동에서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했다. YS의 비서실장을 거쳐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후 문민정부에서는 대한주택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김성룡(金成龍): 금녕 김씨가 배출한 두명의 공군 참모총장 중 한명(김창규 총장과 함께)이다. 공사 교장과 공군참모총장, 영남화학 사장을 지낸 뒤 13대 국회에서 YS의 통일민주당 소속 전국구 의원이 됐다.
▷김형경(金炯璟): 부산고·동아대 법대를 나와 오위영 의원의 비서관을 지냈다. 이후 운수업에 뛰어들어 극동운수 사장과 전국택시조합 부산지부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 들어 YS 특보,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고 3당통합 후에는 민자당 정책평가위원을 지냈다. 현재 한나라당 국책자문위원이다.
▷김문원(金文元): 의정부 출신으로 중앙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신아일보” 정치부장을 지냈다. 1980년 서울의 봄때 YS 캠프에 합류해 당 기관지인 “민주전선”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나 11대 국회에서 민한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13대 때에는 JP의 신민주공화당 간판으로 의정부에서 당선됐다. 현 정부 들어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현재는 한나라당 의정부지구당 위원장으로 또 다시 변신했다.
▷김진재(金鎭載): 현 한나라당 부총재로 5선 의원이다. 금녕 김씨 전국종친회 중앙회장. 부산 동일고무벨트 사업체를 운영하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11대 국회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여의도에서도 알아주는 재력가다. YS정권 출범후 민자당 국책자문위원장과 금녕 김씨 전국종친회 중앙회장이 됐다.
2001년 10월호 | 입력날짜 2001.09.26
[출처] 歷代 대한민국 대통령의 宗親 그리고 친인척 大解剖|작성자 이사람
●정계 진입 희망하던 정치학 교수 매제(妹弟)를 끝까지 만류하고…
●차남 현철씨만 유일한 예외, 결국 거대한 덫이 되어 정권 발목잡아
●야당 시절부터 YS 주변에 포진한 금녕 김씨 종친들의 동반 성장
김대중 대통령의 가락 김씨가 거족임에도 불구하고 망국의 한을 삭여온 ‘정치적 변방’의 후예라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통일신라의 ‘적통’을 잇는 신라계 김씨의 후손이다. 본관이 금녕(金寧) 김씨(金氏)다. 신라 경순왕의 8세손인 김시흥(金時興)을 시조로 모신다. 따라서 김시흥은 신라 김씨의 원조 김알지(金閼智)의 35세손이 된다.
김시흥은 의성(義城)에서 출생해 고려 인종때 묘청의 난을 평정해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 지명을 따 본관을 금녕으로 하다 고려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수로왕 계통의 김해 김씨와의 구분을 위해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금녕 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 사람인 김문기의 명성이 크게 알려진 뒤 여러 사람이 그 후손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등 종통(宗統)을 어지럽히자 1865년(고종 2년)에 다시 금녕으로 확정하였다.금녕 김씨가 배출한 인물로는 조선 개국공신 김인찬, 사육신의 한 사람인 김문기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김문기 이후 이렇다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다 해방 이후 문중에서 김홍일 장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나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중에서는 시조 이래 처음으로 등장한 ‘임금’이 되는 셈이다.
친인척 정치권 진입 불가
YS는 금녕 김씨 문정공파(文正公派) 28대손으로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1371번지에서 태어났다. 1928년 12월4일 생이지만 호적에는 1927년 12월20일 생으로 기록되었다. 실제 나이보다 한 살 더 많게 되어 있다.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金洪祚)와 모친 박부연(朴富連, 작고)씨 사이에서 태어난 1남5녀 중 첫째. 이름 ‘영삼’(泳三)은 ‘물을 세번 헤엄쳐야 금빛을 만난다’는 뜻으로 조부 김동옥(金東玉)씨가 지었다. 집안에서는 금빛이 대권을 암시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많았다고 한다. YS의 모친 박부연씨는 1960년 여름 무장간첩에 의해 피살됐다.
야당 시절부터 친인척 정계 입문 고집스럽게 말려
YS는 집안 식구들이 정치에 나서는 것을 극구 말렸다. 그래서인지 여동생 다섯은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았다. 큰동생 호금(好今)씨는 김상기씨와 결혼해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다. 김상기씨는 장인 김홍조옹과 함께 마산에서 수산업에 종사했는데 일찍 작고했다. 둘째동생 호아(好兒)씨의 남편 김영모(작고)씨는 생전에 도로공사 차장을 지냈다. 슬하에 1남3녀가 있다.
셋째동생 호임(好任)씨의 남편 김상한(金庠漢)씨는 YS와 인연이 깊다. 부산에서 멸치어장과 배 5척을 갖고 있었던 사업가 상한씨는 YS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 비공식 지역구 관리자로 불릴 정도였다. 슬하에 1남4녀를 두었고 사업도 탄탄했다. 넷째동생 두선(斗善)씨의 남편 안양성결교 신학교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는데 평소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YS가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접었다.
막내동생 두아(斗岳)씨는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남편 김창원(金昌源)씨와 함께 도미, 워싱턴에서 무역업을 했다. 김창원씨는 중앙고를 나와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YS 재임 기간 귀국해 한국경영경제연구소 소장, 한일경제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1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의사, 장녀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창원씨의 형이 현재 세종대학교 국제교류원 원장으로 있는 김정원(金正源)씨. 김정원씨는 경기고를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을 지낸 수재다. 미국유학을 떠날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YS가 직접 공항으로 가서 배웅할 정도로 재능을 아끼는 인물이었다. 1987년 대선때 YS의 외교안보특보를 지냈고, 문민 정부에서 안기부 2차장을 맡아 주목받았다. 그러나 국적 시비로 곧 낙마했고 이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YS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의 사이에 혜영(惠英)·혜경(惠京)·은철(恩哲)·현철(賢哲)·혜숙(惠淑)씨 등 2남3녀를 두었다.
큰딸 혜영씨는 YS의 자식들 중에서 차남 현철씨와 함께 성격이 활달하고 정치적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맏사위 이창해(李昌海)씨는 혜영씨의 연세대 선배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는데, 이 때문에 YS가 결혼을 반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창해씨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 과정에 등록했지만, 야당 시절 YS가 극구 말려 뜻을 접고 LA에서 무역업을 했다.
차녀 혜경씨는 경기여고·이화여대 음대 성악과 출신. 경기여고 재학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딸 서영씨와 동급생이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서영씨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조용하게 지낸 반면, 혜경씨는 활달하게 학교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재미교포 송영석(宋英錫)씨와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하와이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송영석씨의 원래 이름은 송영삼(宋永三).
장인 이름과 발음이 똑같아 결혼 뒤 영석으로 개명했다.
장남 은철씨는 한양대 공대를 졸업하고 황경미씨와 결혼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오퍼상을 했다. YS 임기말 귀국, 할아버지의 멸치어장을 이어받았다. 상도동에서는 집안 장남으로서 가업을 잇는 것이라고 설명해 왔지만, 문민정권 시절 동생 현철이 소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사에 개입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유일한 예외(현철)가 거대한 덫으로
문민정부의 ‘황태자’ 차남 현철씨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경복고와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에서 국제금융을 전공했다. 1987년 쌍용투자증권에 입사했지만 대권 주자를 아버지로 둔 덕에 곧 그만두었다. 그해 대선때 막후에서 활동하며 여론조사 등 과학적인 선거운동 기법을 도입해 YS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선거에 여론조사를 도입한 것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현철씨는 대학 진학 때 정치학 전공을 희망했지만 역시 부친의 만류로 사학으로 바꿨다. 집안 식구를 정치판에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YS의 고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철씨는 성심여대 의상학과를 나온 김정현(金姃炫)씨와 결혼했다. 김정현씨는 현철씨의 여동생 혜숙씨의 초등학교·중학교·대학교 동기동창으로, 현철씨는 동생의 중매로 결혼에 골인한 셈이다. 장인이 남광토건·우창건설·동양고속 사장을 역임한 전문경영인 김웅세(金雄世)씨다. 김웅세씨는 경복고와 서울대 상대를 나와 철도청에서 국장을 지낸 뒤 경영인으로 변신한 케이스. 사돈인 YS가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일 때인 1991년 롯데월드 대표를 맡았다. YS의 술친구이자 정치 조언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YS는 1987년 대선 때부터 자신을 도운, 성격마저 자신을 쏙 빼닮은 차남 현철씨에 대해서는 ‘친인척 정치개입 불가’라는 고집을 꺾었고, 그로 인해 문민 권력이 무너지는 화를 불렀다. 지금도 상도동 주변에서 ‘땅을 치며’ 아쉬워하는 일화가 있다. 문민정권 초기 실세 중 한명이었던 김덕룡 의원은 YS에게 차남 현철씨를 해외로 유학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YS도 그런 진언에 귀를 귀울였다. 그러나 현철씨는 아버지에게 강력 반발했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YS는 아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현철씨와 김덕룡 의원은 아직까지 서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보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김현철씨가 국정에 개입한다는 사실은 단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으로만 존재했다. 언론에 김현철은 성역이었다. 1996년 그가 유엔청년협회 회장으로 공식 직함을 갖게 되면서 겨우 동정기사가 언론을 장식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한보사건이 터지면서 YS의 국정장악력은 급속히 와해됐고, 현철씨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모든 것’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사실상 김현철씨는 한보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국정 농단 혐의들에 묻혀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는 처음으로 쇠고랑을 찼다. 정국은 이미 ‘한보게이트’에서 ‘소산(김현철의 별명)게이트’로 바뀌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대신해 정국 운영의 컨트롤타워 노릇을 했던 김현철 세력은 붕괴됐고, 덩달아 문민 권력의 사령탑은 쑥대밭이 되었다. YS는 사실상 정치적 식물인간 상태로 임기말을 맞았고, 정치권력은 진공상태였다. 한보사건이 민주계의 정치적 무덤이라면, 천하의 승부사 YS가 쓰러진 곳은 포연 자욱한 ‘소산게이트’라는 전쟁터였다. 집안 식구가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던 YS는 자신이 ‘유일한 예외’로 인정했던 차남 현철씨 때문에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친인척 문제를 다룰 때 어떠한 예외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남긴 사례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막내딸 혜숙씨는 성심여대와 이화여대 성악과를 나왔다. 미국 뉴욕에서 치과의사를 하면서 한인회 활동에 열성을 보인 이춘근(李春根)씨의 아들 이병로(李炳魯)씨와 결혼했다. YS의 막내사위 이병로씨는 미국 코넬대와 뉴욕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 두사람의 혼인을 주선한 인물이 1980년대 뉴욕에서 YS후원회를 조직했던 임정규씨다. 임씨는 YS의 비서 출신으로 미국유학을 떠났다가 뉴욕에 눌러앉았다. YS 재임 기간 민자당 부대변인, 수자원공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막내사위 이병로(미국명 부르스 리)씨는 문민정부때 한국전력·LG 등 국내 공기업과 대기업들이 미국의 PCS 업체인 넥스트웨이브사에 2억여달러를 투자했다 사업 실패로 투자대금을 날린 이른바 ‘넥스트웨이브사건’에 연루돼 현 정부에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손명순 여사는 ‘마산 재벌’ 손상호(孫相鎬)씨의 딸이다. 손상호씨는 마산에서 ‘경향고무’라는 기업을 경영했는데, 당시 영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전쟁 직후 ‘하얀고무신’을 찍어낸 공장으로 유명했다. 손상호씨는 슬하에 2남7녀를 두었는데, 손여사가 맏딸이다. 그 아래로 은배(恩培)·태자(泰子)·태강(泰江) 영식(英植)·태희(泰熙)·귀희(貴嬉)·은혜(恩惠)·은주(恩珠) 등이 있다. 둘째 은배씨와 넷째 영식씨가 남자 형제다.
처사촌 손주환은 ‘노태우 사람’
YS의 처가 쪽도 정치적으로 표난 인물은 없다. 문민 정부에서 약간의 잡음을 일으킨 사례가 손여사 바로 밑 동생 은배씨인데,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한국교사협의회 회장에 추대되어 항간에 친인척 시비가 일기도 했다. 당시 은배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친인척이니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것은 엄청난 모욕이다.
대통령 친인척은 자기 능력을 실현할 기회도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라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YS의 오른팔이었던 김동영 전 의원과 동국대 동창이다.YS의 첫째동서 도재영(태자씨의 남편)씨는 한양대 공대,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YS 재임 시절 기아서비스 전무이사, 기아자동차 사업부문 사장과 기아그룹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민주국민당 당무위원으로 있다.
손주환(孫柱煥)씨는 손명순 여사의 사촌동생이다. “경향신문”·“중앙일보” 등을 거친 언론인 출신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수석과 공보처 장관, 전국구 의원 등을 역임했다. YS쪽보다 노태우 사람으로 통했다. 그래서 한때 상도동에서는 ‘남보다 못한 사람’으로 평하기도 했으나 1992년 대선 때는 YS 캠프에 합류했다. 문민정부에서 “서울신문” 사장을 지냈다. 현재는 경남대 북한대학원 초빙교수.
전 청와대 총무수석 홍인길씨는 YS의 6촌동생이다. YS의 조부와 홍인길씨의 조모가 남매지간이다. 고향도 YS와 같은 거제도이다. ‘상도동 집사’가 그의 별명이듯 야당 시절 상도동의 대소사를 챙긴 살림꾼이다. 문민정권에서 청와대 총무수석으로 발탁됐고, YS의 지원을 받아 15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YS정권을 몰락시킨 한보 사건때 정태수 총회장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 권노갑 현 민주당 고문과 함께 옥살이를 했다. 당시 ‘깃털론’을 제기해 한보게이트의 불길이 소산게이트로 옮겨붙는 데 일조했다.
종친을 중용
YS는 25세에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최다선 의원(9선), 최다 원내총무(5회),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연소 총재(47세) 등 우리 헌정사에서 숱한 기록을 갈아치운 ‘신기록 메이커’다. 금녕 김씨 문중에서는 YS 말고 정치적으로 도드라진 인물이 거의 없었다.
오랜 정치역정에서 YS는 집안 식구들이 정치에 발을 내딛는 것을 극력 반대했지만, 학연과 지연 그리고 금녕 김씨 종친으로 대표되는 혈연으로 얽힌 사람들을 주위에 포진시켰다. 주변에서는 3공에서 5공까지 암울한 상황에서 독재권력과 투쟁해야 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인물을 고르다 보니 인적자원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런 사건이 있었다. 7대 국회의원 선거 때의 일이다. 6대 국회에서 YS의 비서였던 정태수(원래 경찰 정보과 출신)라는 인물이 갑자기 무소속으로 YS의 지역구인 부산 서구에서 출마해 YS의 스캔들을 폭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YS에게 적잖은 정신적 충격을 주었고, 이때부터 사람을 선별해 기용하는 조심함이 생겼다.
주변의 배신 경험이 금녕 김씨 종친 기용으로
이 글에서는 YS때 주요 직책에 오른 학연·지연·혈연에 얽힌 인물들 중에서 혈연, 즉 금녕 김씨 종친들만 일별한다. YS는 다른 정치지도자들보다 종친을 많이 기용한 편이다. 물론 대다수가 자신의 능력으로 주요 직책에 올랐지만, 야당 시절부터 YS와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하면서 ‘동반성장’한 경우도 많이 눈에 띈다.
▷김광일(金光日): 경남 합천 출신으로 박찬종과 경남중 동기다. YS 시절 국민고충처리위원장, 대통령 비서실장, 대통령정치특보 등을 역임했다. 지난 총선에서 민국당 간판으로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김광일씨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전주 등지의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개업했다. 유신 시절부터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약해 ‘부산지역 재야 대부’로까지 불렸다. 원래 재야에서도 YS 계열이라기보다 DJ쪽과 가까웠다. 1980년 DJ가 사형선고를 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변론을 맡기도 했다. 정계 입문은 YS의 손에 이끌려 이루어졌다. 13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된 후 통일민주당 기획조정실장·정책위의장 등을 지냈지만, 3당합당 때는 YS와 결별했다. 이후 국민당에 입당해 YS의 반대편에 서기도 했으나 결국 YS 품으로 돌아왔다.
▷김기수(金基洙): 한양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YS가 1980년대 정치규제에 묶였을 때 상도동에 합류했다. 이후 민추협 의장 비서실장 등 줄곧 수행을 하다 문민정부 때에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지냈다.
▷김재석(金在錫): 전남 영광 출신이다. 광주고와 조선대 총학생회장을 거쳐 1971년 YS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민추협, 신민당 농수산국장, 括渼?총무국장을 거쳐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지냈고,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기섭(金己燮): 대구 출신. 영남고와 한국외국어대를 나온 후 늦깎이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신라호텔에서 의전 업무를 담당하다 YS 눈에 띄어 상도동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신라호텔 상무를 거쳐 상도동 캠프에 합류하여 의전업무를 담당하다 정권 출범후 안기부 운영차장과 기조실장을 지냈다. 한보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고, 현재는 안기부 예산전용 사건으로 구속 수감중.
▷김봉조(金奉祚): YS와는 집안 17촌 아저씨뻘이다. 연세대 법대를 졸업한 뒤 김영삼 의원의 비서를 지냈으며, 거제에서 12대부터 15대까지 내리 3선을 했다. 1996년부터 2년간 한국마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15대 총선때 YS의 차남 현철씨가 거제 출마를 강하게 희망하는 바람에 지역구를 내줬으나 총선에 악영향을 준다는 판단으로 현철씨의 발이 묶였고, 대신 김기춘 의원이 공천을 받았다.
▷김운용(金雲龍): 현재 민주당 의원이고, 대한체육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61년 국방장관 보좌관을 끝으로 정치권을 떠나, 체육계 인사로서 국제 스포츠외교 무대를 누볐다. 얼마전 IOC 위원장 선거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금녕 김씨 종친이 낳은 정치인도 꽤 많다. YS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인물들만 정리했다.
▷김찬우(金燦于): 경북 영덕 출신이다. 한나라당 소속 4선 의원이다. 의사 출신인데 15대 국회에서는 보건복지위원장을 지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경북 청송·영덕에는 약 3,000세대의 금녕 김씨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금녕 김씨 종친 표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는 지역구다. 내리 7대째 금녕 김씨 문중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김동규(金東圭): 충북 청주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를 나와 상공부 차관보, (주)대우 사장을 역임했다. 이후 YS 비서로 변신해 12대 총선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서울 강동에서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했다. YS의 비서실장을 거쳐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후 문민정부에서는 대한주택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김성룡(金成龍): 금녕 김씨가 배출한 두명의 공군 참모총장 중 한명(김창규 총장과 함께)이다. 공사 교장과 공군참모총장, 영남화학 사장을 지낸 뒤 13대 국회에서 YS의 통일민주당 소속 전국구 의원이 됐다.
▷김형경(金炯璟): 부산고·동아대 법대를 나와 오위영 의원의 비서관을 지냈다. 이후 운수업에 뛰어들어 극동운수 사장과 전국택시조합 부산지부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 들어 YS 특보,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고 3당통합 후에는 민자당 정책평가위원을 지냈다. 현재 한나라당 국책자문위원이다.
▷김문원(金文元): 의정부 출신으로 중앙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신아일보” 정치부장을 지냈다. 1980년 서울의 봄때 YS 캠프에 합류해 당 기관지인 “민주전선”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나 11대 국회에서 민한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13대 때에는 JP의 신민주공화당 간판으로 의정부에서 당선됐다. 현 정부 들어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현재는 한나라당 의정부지구당 위원장으로 또 다시 변신했다.
▷김진재(金鎭載): 현 한나라당 부총재로 5선 의원이다. 금녕 김씨 전국종친회 중앙회장. 부산 동일고무벨트 사업체를 운영하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11대 국회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여의도에서도 알아주는 재력가다. YS정권 출범후 민자당 국책자문위원장과 금녕 김씨 전국종친회 중앙회장이 됐다.
2001년 10월호 | 입력날짜 2001.09.26
[출처] 歷代 대한민국 대통령의 宗親 그리고 친인척 大解剖|작성자 이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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