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의 의거가 나라를 구한다.
1945년 2월 중순, 연합군은 독일의 드레스덴 시를 폭격하여 약 35,000명의 시민들이 죽었다. 1945년 5월 7일, 미군은 라인 강을 건넜다.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은 마지막 공격을 통하여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을 포위하였다. 소련군이 독일 제3제국 궁전을 향하여 진격할 때인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하였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은 랭스에서 서방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였고 5월 9일에는 베를린에서 소련군에게 항복하였다. 같은 해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여 12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태평양 전쟁도 종료되었다. 일본은 9월 2일에 정식으로 항복하였다.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은 1943년 11월 27일 미·영·중의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5일간에 걸친 회담에는 루스벨트·처칠·장제스 등이 대표로 참가했으며, 회담 결과 발표한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했다. 또한 회담에서 연합국은 승전하더라도 자국(自國)의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를 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을 받았다. '한국의 독립'과 관련한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포츠담 선언에서 재확인됐다. 포츠담 회의(Potsdam Conference) 또는 포츠담 회담은 나치 항복 후 1945년 7월 17일 ~ 8월 2일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있었다.
카이로 선언서에 적시된 ‘조선이 독립하여야한다’는 기록은 윤봉길의사의 훙커우 공원 사건(虹口公園事件)이 성공을 거두었기에 가능했다. 훙커우 사건은 1932년 4월 29일 중화민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건이다.
홍커우사건을 두고 장세스(蔣介石)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한국 용사가 단행하였다.”며 감탄 하였다. 그 이전에 까지만 해도 그는 조선인에 대해 그리 호감을 가지지 않았지만 윤봉길 의거 이후 조선인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어 “조선은 작지만 혼은 무시 할 수 없다.”義擧로 각인 되면서 가능하면 조선인들을 도와주려 하였다.
카이로 선언은 일본 항복이후 영토권을 어떻게 처리 할 것 인가에 대한 토의가 중요한 의제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루즈벨트나 처칠은 한국의 독립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김구(金九)는 장제스를 만나길 희망하였고 어렵게 만나 조선의 독립이 필요함을 역설하였고 조선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김구(金九)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한 사람의 의거(義擧)가 나라를 구 할 수도 있다"는 역사의 흐름을 읽게 된다.
출처: 국제망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은 1943년 11월 27일 미·영·중의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5일간에 걸친 회담에는 루스벨트·처칠·장제스 등이 대표로 참가했으며, 회담 결과 발표한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했다. 또한 회담에서 연합국은 승전하더라도 자국(自國)의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를 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을 받았다. '한국의 독립'과 관련한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포츠담 선언에서 재확인됐다. 포츠담 회의(Potsdam Conference) 또는 포츠담 회담은 나치 항복 후 1945년 7월 17일 ~ 8월 2일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있었다.
카이로 선언서에 적시된 ‘조선이 독립하여야한다’는 기록은 윤봉길의사의 훙커우 공원 사건(虹口公園事件)이 성공을 거두었기에 가능했다. 훙커우 사건은 1932년 4월 29일 중화민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건이다.
홍커우사건을 두고 장세스(蔣介石)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한국 용사가 단행하였다.”며 감탄 하였다. 그 이전에 까지만 해도 그는 조선인에 대해 그리 호감을 가지지 않았지만 윤봉길 의거 이후 조선인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어 “조선은 작지만 혼은 무시 할 수 없다.”義擧로 각인 되면서 가능하면 조선인들을 도와주려 하였다.
카이로 선언은 일본 항복이후 영토권을 어떻게 처리 할 것 인가에 대한 토의가 중요한 의제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루즈벨트나 처칠은 한국의 독립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김구(金九)는 장제스를 만나길 희망하였고 어렵게 만나 조선의 독립이 필요함을 역설하였고 조선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김구(金九)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한 사람의 의거(義擧)가 나라를 구 할 수도 있다"는 역사의 흐름을 읽게 된다.
출처: 국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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