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隨筆]
<시대정신(時代精神)을 의심(疑心)하라: Zeitgeist을 넘어서는 최립(崔岦)의 정관(靜觀)>
오늘(今日) 우리는 눈부시게 빠른 시대(時代)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人工知能)은 생각(思考)하고, 쓰고, 판단(判斷)하는 영역(領域)까지 확장(擴張)되며 인간(人間)의 자리(自利)를 끊임없이 재정의(再定義)하고 있다. 그러나 속도(速度)가 빨라질수록,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능력(能力)을 잃어가고 있다. 바로 ‘멈추어 바라보는 힘(力)’이다.
시대(時代)마다 그 시대(時代)를 규정(規定)하는 보이지 않는 공기(空氣)가 있다. 이를 우리는 시대정신(時代精神, Zeitgeist: Zeit=age, Geist=spirit)이라 부른다. 독일어로 ‘시대의 정신’으로쯤 번역할 수 있을 듯 하다. 어떤 시대(時代)는 신앙(信仰)이, 어떤 시대(時代)는 이성(理性)이, 그리고 오늘날(今日)은 기술(技術)이 그 중심(中心)을 이룬다. 그러나 시대정신(時代精神)은 언제나 인간(人間)의 선택(選擇)과 태도(態度)에 의해 완성(完成)된다.
조선(朝鮮) 중기(中期), 혼란(混亂)과 변화(變化)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던 간이(簡易) 최립(崔岦) 역시 자신의 시대정신(時代精神)과 마주해야 했다. 외침(外侵)과 정치적(政治的) 갈등(葛藤), 사회적(社會的) 불안(不安) 속에서도 그는 단순히 반응(反應)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바라봄 속에서 길(道)을 찾았다.
최립(崔岦)의 삶(生)은 관통(貫通)하는 핵심(核心)은 행동(行動) 이전(以前)의 사유(思惟), 즉 정관(靜觀)이었다. 그는 사물(事物)을 급히 판단(判斷)하지 않았고, 현상(現象)을 넘어 본질(本質)을 보려 했다. 그의 시(詩)와 글은 단순한 표현(表現)이 아니라 깊은 관찰(觀察)에서 비롯된 사유(思惟)의 결실(結實)이었다.
오늘날(今日) 우리는 문제(問題)를 만나면 곧바로 검색(搜索)하고, 즉시(卽時) 답(答)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빠른 답(答)은 깊은 이해(理解)를 대신(代身)하지 못한다. 오히려 생각(思考)의 깊이(深度)를 얕게 만들고, 판단(判斷)을 피상적(皮相的)으로 만든다.
인공지능(人工知能)은 방대한 데이터(data, 資料)를 기반(基盤)으로 최적(最適)의 답(答)을 제시(提示)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답(答)이 ‘옳은가’ 혹은 ‘의미(意味) 있는가’를 묻는 일은 여전히 인간(人間)의 몫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정관(靜觀)이다.
정관(靜觀)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積極的)인 사유(思惟)의 시작(始作)이다. 소리(音)를 멈추고, 속도(速度)를 늦추며, 사물(事物)의 이면(裏面)을 바라보는 행위(行爲)이다. 이 과정(過程)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던 연결(連結)과 의미(意味)를 발견(發見)하게 된다.
최립(崔岦)은 자연(自然)을 바라보며 인간(人間)을 이해(理解)했고, 인간(人間)을 이해(理解)하며 사회(社會)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詩) 속의 산(山)과 물(水)은 단순한 풍경(風景)이 아니라, 인간(人間) 마음(心)의 반영(反映)이었다. 그는 자연(自然) 속에서 질서(秩序)와 조화(調和)를 읽어냈다.
현대인(現代人)은 자연(自然)보다 화면(畫面)을 더 오래 바라본다. 그러나 화면(畫面)은 정보(情報)를 주지만, 통찰(洞察)을 주지는 않는다. 통찰(洞察)은 고요(寂靜) 속에서, 반복(反復)된 관찰(觀察) 속에서, 스스로 사유(思惟)할 때 생겨난다.
시대정신(時代精神)은 우리를 끊임없이 앞으로 밀어낸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효율적(效率的)으로. 그러나 그 흐름(流動)에 무조건 따르는 것은 지혜(智慧)가 아니다. 때로는 멈추어 흐름(流動)을 바라보는 것이 더 깊은 선택(選擇)이 된다.
최립(崔岦)은 지식(知識)을 쌓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삶(生活)에 적용(適用)했다. 이것이 바로 실학적(實學的) 태도(態度)이며, 오늘날(今日)에도 여전히 유효(有效)한 사고방식(思考方式)이다. 지식(知識)은 행동(行動)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完成)된다.
인공지능(人工知能) 시대(時代)의 인간(人間)은 단순한 지식(知識)의 축적자(蓄積者)가 아니라, 의미(意味)의 해석자(解釋者)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解釋)의 출발점(出發點)은 정관(靜觀)이다. 서두르지 않고, 충분히 바라보는 것에서 진짜 이해(理解)가 시작(始作)된다.
우리는 종종 ‘생각(思考)할 시간(時間)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實相)은 생각(思考)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環境)에 익숙(慣熟)해진 것이다. 자동화(自動化)된 추천(推薦)과 즉각적(卽刻的)인 답변(答辯)이 우리의 사유(思惟)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의도적(意圖的)인 정관(靜觀)이 필요(必要)하다. 하루(日) 중 짧은 시간(時間)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간(時間)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낭비(浪費)가 아니라 가장 생산적(生産的)인 투자(投資)이다.
최립(崔岦)은 학문(學問)과 예술(藝術), 정치(政治)와 외교(外交)를 넘나들며 통합적(統合的) 사고(思考)를 실천(實踐)했다. 이는 단순한 재능(才能)이 아니라 깊은 관찰(觀察)과 사유(思惟)에서 비롯된 결과(結果)였다. 그는 시대(時代)를 따라가지 않고, 시대(時代)를 읽었다.
오늘날(今日) 우리는 기술(技術)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그러나 기술(技術)을 이해(理解)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것은 위험(危險)하다. 기술(技術)을 올바르게 사용(使用)하기 위해서는 그 본질(本質)과 영향(影響)을 성찰(省察)해야 한다.
정관(靜觀)은 우리에게 질문(質問)을 던지게 한다. 이것이 왜 필요한가?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것이 가져올 결과(結果)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質問)이야말로 인간(人間)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시대정신(時代精神)은 변하지만, 인간(人間)의 본질(本質)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의미(意味)를 찾고, 관계(關係)를 맺으며, 더 나은 삶(生活)을 추구(追求)한다. 정관(靜觀)은 이러한 본질(本質)로 돌아가는 길(道)이다.
최립(崔岦)의 삶(生)은 우리에게 말한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바르게 보는 것이 중요(重要)하다고. 많이 아는 것보다, 깊이 이해(理解)하는 것이 중요(重要)하다고.
결국 인공지능(人工知能) 시대(時代)의 경쟁력(競爭力)은 더 빠른 계산(計算)이 아니라 더 깊은 사유(思惟)에 있다. 그리고 그 사유(思惟)의 출발점(出發點)이 바로 정관(靜觀)이다.
오늘(今日) 하루(日), 잠시(暫時) 멈추어 바라보라. 그 고요(寂靜)한 순간(瞬間)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시대(時代)를 넘어서는 지혜(智慧)를 얻게 될 것이다. ***
2026. 3. 17.
崇善齋에서
{솔티}
English Translation: https://www.ktown1st.com/blog/VALover/348637
日本語 飜譯: https://www.ktown1st.com/blog/VALover/3486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