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13회] 인기있는 교사 속내는 군인동경

2018.12.13

박정희는 문경교사 시절에 학생들에게는 인기있는 교사였다. 가정실습 지도 때, 문경에서 12km나 떨어진 벽촌에 있는 학생의 집까지 자전거로 찾아가 감동을 주었는가 하면 여학생들을 하숙방으로 불러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일본인 교장과 다투기도 했다. 


                                                   

박정희의 엄친

학생들과의 관계를 제외한 그의 학교 생활은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공격적이고 투쟁적일 뿐만 아니라 불평불만도 매우 많은 듯한 모습이다. 하숙집에서는 술을 통째로 받아다 마시기 일쑤였고, 동료들과 사소한 일로 갈등을 빚는 경우도 많았다. 월급을 받고 있으면서도 가족(박정희는 1937년 말에 아내 김호남과의 사이에서 큰딸 박재옥을 얻었다)을 돌보지 않아 형 박상희에게 심한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를 일기로 병사한다. 부임한 지 2년째인 1938년의 일이었다.  


아버지 사후에 박정희는 더 거칠게 변한 듯한 느낌을 주는데, 대표적인 예가 학교장 폭행사건이다. 당시는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이 날로 격화되는 시점이었고, 일제는 이른바 ‘황국신민’에 대한 정신교육 차원에서 대대적인 장발 단속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규정을 무시한 채 머리를 길렀고, 장학사와 일본인 교장 아리마가 이를 나무라자 술을 마신 뒤에 그들을 폭행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볼 때 박정희는 1936년의 강제 결혼 이후 약 4년간 성격이 지속적으로 난폭해졌음을 알 수 있다. 검도나 복싱 등 격한 운동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된 공격성이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칼을 들고 대적하는 식의 불안정한 행동을 거쳐 나중엔 학교장 폭행사건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교사 재직시부터 군인이 될 생각이 깊었던 것 같다. 대구사범 재학시절에도 인문 교양보다 비인문쪽에 기량을 보였다. 일요일이면 학생들을 학교 앞산으로 데리고 가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시켰다. 목검을 만들어 검도를 가르치기도 하고 학예회 때 지원병 관련 연극 각본을 써서 아이들에게 연극을 공연케 하였다.

 

                                               


박정희의 ‘군인에 대한 동경’은 대구사범 동기생 김병희(전 인하대학장)의 회고록에서 잘 드러난다. 


어느 날 신관(新館) 복도에서 이성조, 박정희와 나는 북창(北窓) 너머 흰 구름을 바라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한 조선 사람이 ‘전도다망(前途多望)’을 일본어로 ‘젠토타보’가 아닌 ‘젠토타바’로 읽은 데 대해 핀잔을 주던 중이었다.


박정희 : 우리는 과연 ‘젠토타바’ 일까?

이성조 : 평생 선생질이나 해야지. 운이 좋으면 군수까지는 될 수 있다더라만.

김병희 : 군수가 되면 뭘 해. 왜놈의 종질이지. 그러나저러나 조선사람은 아무리 날뛰어도 관리생활에서는 현실이 증명하듯 도지사가 한계란다.

박정희 : 난 선생을 때려치우고 군인이 될 거야.

김병희 : 넌 나팔을 잘 부니까 군악대장이 될 거야.

박정희 : 아니야. 나는 육군 대장이 될 거야.

이성조 : 엿장사 마음대로? 의무 연한은 어쩌고? 나는 의무 연한만 채우면 선생질을 때려치우고 발명가가 될란다.

 

1959년 박정희 장군은 당시 중앙대학 교수이던 김병희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이 ‘젠토타바’로 시작된 학창 시절의 대화를 기억해 내었다.

 

“병희야, 우리 동기 중에 니가 가장 출세했구나. 그러나 이놈아 두고 보자. 계엄령만 내리면 넌 내 앞에서 꼼짝 못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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