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51회] ‘사상논쟁’ 끝에 민선대통령 당선

2019.04.05

군사쿠데타를 주동한 인물이 여당의 후보로 나선 가운데 ‘민정이양’이라는 기묘한 대통령선거가 1963년 10월 15일 실시되었다. 제5대 대통령선거인 것이다.


1963년 5월 27일 민주공화당의 개편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박정희는 재야세력으로부터 지명수락에 앞서 공직을 사퇴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는 8월 13일 지포리에서 가진 전역식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이 나라에서 다시는 나와 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면서 군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대통령 선거전에 나섰다.


반면에 야권의 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재야정당 통합을 위해 추진되었던 ‘국민의 당’이 결렬되면서 몇 갈래로 흩어진 야권은 9월 15일에 마감된 대통령후보 등록에서 민정당의 윤보선, 국민의 당의 허정, 자유민주당의 송요찬(옥중출마), 추풍회의 오재영, 정민회의 변영태, 신흥당의 장이석 등 도합 6명이 나섰다. 


이들 중 허정과 송요찬이 막바지에 후보직을 사퇴함으로써 선거전은 대체로 여권의 박정희와 야권의 윤보선으로 압축되었다. 


대통령후보의 난립상태를 보인 가운데 10ㆍ15대통령 선거일이 공고되자 7대 1의 비율로 선거전은 개막되었다. 사전조직을 갖춰 리, 동, 반에 이르기까지 조직책을 갖고 있던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은 방대한 전국조직과 고무신, 밀가루 살포 등을 감당할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것에 비해 야권은 난립상태에서 군정종식을 바라는 국민여론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 기호 5번으로 출마한 윤보선 대통령의 포스터.


초반에 각 당 후보자들은 지방유세를 갖고 각종 공약을 제시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런데 박정희 후보가 9월 23일 방송연설을 통해 “이번 선거는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된 자유민주주의와 강렬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대결”이라고 말한 데서 이른바 ‘사상논쟁’의 불이 붙었다. 박정희는 전력으로 보아 ‘민족주의’를 입에 담을 처지가 아니었지만 선거전의 핵심 이슈가 되었다.


바로 다음날 지방유세 도중에 전주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윤보선 후보는 “여순반란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으며 이번 선거야말로 이질적 사상과 민주사상의 대결”이라고 응수함으로써 사상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윤 후보는 이어 “박정희 후보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 라는 뜻을 펴서 국민을 놀라게 했다. 


같은 날 윤 후보의 찬조연사로 나선 윤재술 의원은 여수에서 “이곳은 여순반란사건이란 핏자국이 묻은 곳이다. 그 사건을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 죽었으냐, 살았느냐? 살았다면 대한민국에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여러분은 아는가, 모르는가? 여러분이 모른다면 저 종고산(鐘鼓山)은 알 것이다”라고 박정희를 공격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긴급회의를 소집한 최고회의는 윤 후보의 발언을 국가안보의 차원에서 대처키로 하고, 공화당에서는 선거법위반으로 고발하면서, “윤 씨가 대통령에 재직하고 있을 때부터 5ㆍ16사태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폭로하여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자 대통령후보를 낸 재야 6당은 박정희 후보의 등록취소를 청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는가 하면, 공명선거투쟁위원회 주최의 선거집회에서는 “간첩 황태성의 책략에 의해 공화당의 2원제 사전조직이 추진되었으며 밀봉교육이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삐라가 뿌려져 사상논쟁을 부채질했다. 


이 무렵 국민의 당 대통령 후보인 허정은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의장이 한일회담에서 양보한 대가로 일본 민간회사로부터 거액의 수표를 받았다는 설이 있다.”고 폭로했으며, 민정당 기획위원회는 “박 의장의 사상은 이질적이며 위험한 존재”라는 성명을 발표해 쌍방의 논쟁은 더욱 확산돼 갔다. 


또한 9월 25일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자민당 대표 김준연은 1961년 5월 26일자 <타임>지의 박정희 프로필을 인용, “박 소장은 전에 공인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군반란(여순사건)을 조직하는 데 협력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 씨의 장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향하여 반란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형을 면제받았다. 그는 지금 분명히 강력한 반공주의자다.”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에 대해 박 후보는 기자회견에서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됐다는 야당 측 주장을 해명할 수 없느냐?”는 물음에 “허무맹랑한 일이어서 해명할 필요조차 없으며 법이 가려낼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리고 여순사건 당시 진압작전을 지휘한 원용덕을 내세워 “박 의장은 여순사건에 관련이 없으며 토벌작전 참모로서 공을 세웠다.”고 상반된 주장을 펴도록 했다. 


종반 과정에서 윤 후보를 구속하자는 최고회의의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으나 ‘인지사건’으로 수사한다는 선에서 일단락되고, 선거전은 끝까지 정책대결 아닌 사상논쟁으로 전개되었다. 선거전은 종반에 접어들면서 야당 단일후보의 실현을 위해 허정이 사퇴한 데 이어 송요찬도 사퇴함으로써 박ㆍ윤의 양자대결로 압축되었다. 투표일을 5일 남겨둔 10월 10일 민정당의 찬조연사 김사만이 경북 안동 연설에서 “대구, 부산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등 망언을 하여 선거분위기를 더욱 과열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회오리바람을 몰고 온 사상논쟁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투표가 진행되었다. 선거분위기의 과열 탓이었는지 투표율은 84.99%로 높게 나타났다. 


선거결과 개표집계는 16일 밤 늦게까지 윤 후보가 리드하다가 17일 새벽부터 박 후보가 우세하여 15만 6천여 표의 차이로 박정희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중앙정보부는 한때 윤 후보의 우세로 집계되자 그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후일 밝혀졌다.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


대통령 선거전이 끝나고 ‘사상논쟁’의 뒤끝은 월간 <사상계>가 1963년 11월호에서 ‘특집 진(眞)ㆍ위(僞)를 가려라!를 게재하면서 다시 한 번 국민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이 특집기사는 <경향신문> 정치부장 김경래의 “전향자냐? 아니냐? - 인간 박정희의 전향주변”, 정종식 <한국일보> 정치부장의 “군사혁명과 윤보선.” 신상초 정치평론가의 “무엇이 사상논쟁이냐?”, 임방현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자주ㆍ사대논쟁의 저변”, 서기원 <서울경제신문> 기자의 “정치자금 수수께끼의 실마리”로 구성되었다. 


세간의 관심은 김경래의 박정희 전향 관련기사였다. 헌정사 이래 최초로 전개된 대선의 사상논쟁, 특히 좌익으로 몰린 박정희가 당선되면서, 그의 전력은 비상한 관심사였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여 940일 동안 군정의 철권통치 끝에 민정이양이라는 요식절차를 거쳐 합법적인 대통령이 되었다. ‘군인 박정희’가 ‘정치인 박정희’로 변신하는 계기였다. 


정치학계에서는 박정희의 제2기 집권기를 ‘제3공화국’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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