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54회] 굴욕회담 5억달러에 식민지배 면죄부

2019.04.11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원조가 대폭 삭감된 상황에서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대규모 투자재원의 확보가 필요했다. 여기에 미국의 지역통합전략, 일본의 자본 해외진출 욕구 등이 맞아떨어져 한일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밖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박정희 자신을 비롯한 정권 핵심요인들의 심정적인 친일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일본 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들로서 일본에 대해 다분히 애정과 향수를 갖고 있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1961년 10월 20일 제6차 한일회담이 재개되었는데, 합의사항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이견과 양국 내의 격렬한 반대분위기로 타결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는 비밀리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 이케다 수상과 비밀회담을 갖고 타결조건에 대한 합의를 이루도록 했다. 그러나 한국의 거듭된 양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고자세의 버티기 전략으로 맞섰다.


박정희 정권에 있어서 1962년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첫해로서 시급한 외자도입이 요구되었고, 느닷없이 강행한 화폐개혁의 실패로 경제상황이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어서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김종필이 다시 일본에 건너가 김종필, 오히라(大平) 회담을 열고 여기서 비밀메모(김ㆍ오히라 메모)를 통해 대일청구권문제 등에서 우리에게 크게 불리한 합의를 해주었다. 따라서 청구권 협상의 타결로 무상 3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지불하고, 경제협력의 명목으로 정부간의 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로 제공하며, 상업 베이스에 의한 무역차관 1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확정하였다.


오히라(大平)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박정희 정권은 청구권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독립축하금’이란 이름으로 무상 3억 달러에 36년 식민통치에 따른 모든 배상문제를 마무리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일본측 협상대표가 “독도를 폭파해서 분쟁의 요인을 없애자”는 등 그야말로 굴욕적인 협상이었다. 


일본 외상 오히라가 “국제사법재판소에 맡기자” 하고, 김종필은 덩달아 “제3국에 조정을 맡기자”는 매국적 발언을 하였다. 


‘독도폭파’ 발언은 박정희도 하였다. 1965년 존슨 대통령과 회담을 마치고 미국무장관 러스크와 논의하던 중 “수교 협상에서 비록 작은 것이지만 화나게 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 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섬을 폭파시켜 버리고 싶다” 고 말했다. 


그나마 이와 같은 굴욕적인 협상내용도 즉각 밝혀지지 않은 채 1964년에 이르기까지 2년 동안 비밀에 묻혀졌다.


한일회담의 진행과정을 비밀에 부쳐온 박정희 정부는 1964년 3월에야 한일회담의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의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라 야당과 재야는 즉각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유세에 돌입한 데 이어, 3월 24일 서울대생들은 ‘한일회담의 즉각중지’를 요구하는 집회를 갖고 이케다 일본수상과 ‘현대판 이완용’의 김종필화형식을 거행한 뒤 가두시위를 벌였다.



한일협정 반대를 외치며 거리를 뛰고 있는 시위대.


학생들의 시위는 삽시간에 전국대학으로 번져나가서 5월 20일 서울시내의 대학생연합이 박 정권이 표방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4ㆍ19민족ㆍ민주이념에 정면 도전한 군사쿠데타정권 타도투쟁을 선언했다. 이날 시위로 학생 1백여 명이 부상하고 2백여 명이 연행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단식농성 등을 벌이면서 투쟁을 계속하여 6월 3일에 이르러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 파출소가 방화되기에 이르렀으며, 군사쿠데타, 부정부패, 정보정치, 매판독점자본, 외세의존 등 군사정권의 본질적인 문제제기로 확대, 고조되어 정권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학생들의 데모에 많은 시민이 가담하면서 시위의 규모가 커지자 박정희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어, 그날 밤 8시를 기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했다. 계엄사령부는 포고령으로 일체의 시위금지와 언론ㆍ출판의 사전검열, 모든 학교의 휴교를 명령했다.


4개사단 병력을 서울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 가량 진행된 계엄통치는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이 구속되고, 이 기간 포고령 위반으로 890건에 1,120명이 검거되었으며, 그중에서 540명이 군사재판, 68명이 민간재판, 216명이 즉결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정희는 계엄을 선포한 지 이틀 후인 6월 5일 공화당의장 김종필을 문책, 당의장직에서 사임시키고 두 번째 외유에 나서도록 조처했다. 김종필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박정희는 야당과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투쟁을 위수령ㆍ계엄령으로 억압하면서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외무장관 이동원, 한일회담 수석대표 김동조와 일본외상 시이나, 수석대표 다카스키 사이에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과 부속된 4개의 협정 및 25개의 문서로 된 ‘한일협정’을 일괄 타결하였다.


이 협정에 의해 평화선이 철폐되었으며, 우리 측의 40해리 전관수역 주장이 철회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독도문제를 분명히 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에 빌미를 남겼다.


또한 재일교포의 법적지위 및 영주권문제 등이 일본정부의 임의적 처분에 맡겨지게 되었고,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은 일제가 불법으로 강탈해간 모든 한국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해버리고 여성위안부, 사할린교포, 원폭피해자 등의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못한 졸속, 굴욕회담으로 끝나 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12월 17일 청와대에서 한일기본조약문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이후락(비서실장), 정일권(국무총리), 이동원(외무장관), 김동조(주일대사) 등 친일관리들의 모습이 보인다.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이고 졸속적인 한일국교정상화로 인해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침략조약의 원천무효, 그리고 정당한 배상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기간 3~4년을 지배한 동남아 각국에도 5~10억 달러의 배상금을 주었다.


박정희가 5억 달러에 일제 36년 식민지배의 면죄부를 준 반세기 후 박근혜는 10억 엔을 받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면죄부를 주었다.

좋아요
태그
인기 포스팅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