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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

보룸스(Worms, 루터 황제 앞에 서다.)

2020.03.19

독일의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 - 1546)의 길을 따라서 가는 체험 여행을 
지난번에 올린 비텐베르크 편에 이어서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종교 개혁가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 앞에 
그 당시 부패한 로마 카톨릭교회에 대항하여 95개 조항을 붙였습니다.



그후 1519년에는 루터가 교황에게 사실상 결별을 고하는 '라이프치히 논쟁' 이 있었습니다.



여기는 라이프치히 신시청 건물인데 여기서 그 당시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라이프치히 논쟁' 이란 종교개혁 당시인 1519년 6월 27일~7월 16일에 루터와 
로마 카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에크 교수 사이에 치열한 신학 논쟁을 벌인 사건을 말합니다.

여기서 루터는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며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교회의 권위가 
아닌 성경의 권위만을 주장하여 이단으로 낙인을 찍히고 결국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을 말합니다.



'루터의 길'이 있는 이 곳이 그 당시 '라이프치히 논쟁' 사건의 현장입니다.

그 결과 1520년 6월 15일에 교황 레오 10세는 파문교서를 발표하고 루터에게 6개월 안에 모든 잘못을 인정하라고 했지만 
그에 루터가 불복하자 1521년에 교황은 마침내 루터를 사제 자리에서 파문합니다.

그후 숱한 우여곡절을 격은 루터 삶의 이야기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1539년 성령 강림 주일에 루터는 라이프치히를 대표하는 
두 교회 설교단에 올라가서 회중에게 말씀을 선포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 토마스 교회' 이고,



다른 곳은 '성 니콜라이' 교회 입니다.



종교 개혁가 루터가 지나간 발자취입니다.

이번 편에서는 위 사진의 제일 아래쪽에 있는 보름스 (Worms)에서 루터가 겪은 이야기를 전하고 
다음편 에서는 가장 오른쪽에 있는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루터에게 일어난 이야기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제나흐' 는 루터가 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보름스' 에서  납치 되어 바르트부르그 성에 가서 
신약 성경을 번역하며 지낸 곳으로  '음악의 아버지' 인 바하의 고향이기도 한 도시입니다.




프랑크푸르트(Frankfurt)를 출발해서 기차를 이용하여 보룸스(Worms)에 왔습니다.

보룸스는 유럽에서 유서 깊은 도시 중 하나입니다.

기원전 14년 로마의 요새로 이미 이름을 알렸고 5세기에는 부르고뉴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435년에는 로마에 발란을 일으켰다가 훈족에게 파괴되었는데 이는 독일을 대표하는 
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 의 주요 배경이 됩니다.





억수 같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유태인 지역을 지나서 '루터 광장' 을 찾아서 갑니다.



고색 창연한 그런 분위기를 지닌 도시입니다.




'종교개혁 기념비'가 있는 '루터 광장' 에 왔습니다.

에른스트 리첼이 초안하고 담당하여 주요 인물들 모형을 12년 동안 만들어서 1868년에 케에츠, 돈도르프, 실링 
이렇게 조각가 3명이 함께한 종교개혁 기념비는 루터 기념비로는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입니다.

루터를 중앙에 두고 네명의 종교개혁 선구자가 앉아있고 네 귀퉁이에는 다른 네명이 서 있습니다.

네명의 종교개혁 선구자들을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태리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

루터 보다 약 한세대 앞서 살았던 '중세의 세례요한'
 


체코 종교개혁가 얀 후스(1369-1415)

"비록 당신들은 오늘 거위 한 마리를 태우지만 100년 후에 거위가 탄 재에서 백조가 나올 것이오. 
당신들은 그 백조를 절대로 구워 먹지 못할 것이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화형을 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가 죽은(1415)후 
거의 100년후인 1517년에 루터가 한 마리 백조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후스'라는 이름은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입니다.



영국의 종교개혁가 요한 위클리프(1320-1384)

손에 성경을 들고 있는 '종교개혁의 샛별' 이라 불림.



프랑스 종교개혁가 피터 왈도(1140-1205)는 최초 종교개혁자로 손에 성경과 지팡이가 있습니다.



루터가 세례를 받고 성찬을 집례하는 모습(왼쪽), 루터 부부가 결혼 하는 모습(오른쪽)



보룸스 의회에 불려나간 루터가 카를 5세 앞에서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장면



성경을 번역하고 설교하는 루터의 모습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교회 대문에 걸어놓는 모습



저항하는 슈파이어 (1529년)



평화의 잎과 함께한 아우크스부르크 (1555년)



슬퍼하는 마그데부르크 (1631년)



요하네스 로이힐린(1455-1522)



필립 멜란히톤(1497-1560)



헤쎈의 영주 필립 1세(1504-1567)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 3세(1463-1525)




중앙에 서 있는 마르틴 루터(1483년 11월 10일 -1546년 2월 18일)독일의 종교개혁가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중간에 있는 인물은 요한과 프리드리히 1세

아래엔 보룸스 제국의회시 황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루터의 모습이 있습니다.






위 두사람은 존 칼빈과 울리히 츠빙글리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거쳐간 도시 20개의 문양이 따로 새겨져 있습니다.

알만한 도시를 몇개 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비텐베르크



라이프치히



프랑크프르트



아이슬레벤(루터 생가)



아니제나흐(성경 번역)



아무도 없는 종교개혁 기념비에서 자가 촬영을 합니다.




루터 공원을 둘러봅니다.



118 보병 연대 기념비



여기는 루드비히 광장입니다.



루터의 도시 답게 광장 바닥에 이런 그림이 있네요.



헤센 주의 대공 이었던 루드비히 4세를 위한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고 분수대도 함께 있습니다.



광장 근처에 있는 성 마틴 교회입니다. 



'보룸스 의회' 또는 '보룸스 제국회의'는 1521년 3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를 소환해서 루터의 견해를 심의한 사건입니다.



다음은 보룸스 대성당을 찾아서 갑니다.

보룸스 대성당은 마인츠 대성당, 슈파이어 대성당과 함께 오토 왕조의 3대 왕실 성당중 하나로 
독일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1018년 부터 시작해서 1320년에 완공 되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셔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당 안에는 이미 입장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여행객 무리가 보입니다.

실내에 있는 장식물을 돌아 보겠습니다.



이새의 뿌리(1488)



수태고지(1487)



아기 예수의 탄생(1515)



십자가에서 내리우신 예수님(1488)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1488)



스테인드 글래스는 비교적 최근인 1992년에 만들어졌다고합니다.



성당의 규모가 대단하고 각종 예술적인 작품들이 내부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단체 여행객들이 성당 밖으로 나와서 루터의 발자취를 찾아서 갑니다.



부르카르트 (965-1025) 보룸스 주교 동상입니다.

재임 당시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세우고 보룸스 성벽을 재건 하였으며 
20여권의 교회 법령집을 만들어 자신의 재위 기간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성당 옆으로 나있는 문으로 들어가서 보룸스의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갑니다.

헤일스호프 미술관 정원을 찾아서 갑니다.



좁은 문을 통해서 정원 안으로 들어가면 고대 시대의 헤라클레스 분수대를 만날수 있습니다.



교황에 의해서 파문당한 루터는 이번에는 황제에 의해서 제국의회 청문회에 소환되었습니다.

2021년은 그 사건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 입니다.



1521년 보룸스 제국의회때 루터를 소환한 황제는 루터의 신변 안전을 
보장 한다고 약속은 했지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숨길수 없었을겁니다.

그러나 수많은 루터 지지자들이 모여서 루터를 응원하며 그를 격려 함에 용기를 얻은 
루터는 그의 신념을 굽하지 않고 당당하게 황제에게 나아가서 자신의 주장을 지켰습니다.




"나는 성경에 굴복하며, 내 양심은 말씀안에 사로 잡혀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철회 할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안전하지도 건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도 어쩔수 없다.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루터의 최종 별론 마지막 부분)



이 자리에 서서 루터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루터가 보룸스 제국의회에 출두한 날은 1521년 4월 17일 입니다. 하루 동안 시간을 얻은 루터는 
다음날인 1521년 4월 18일에 그의 목숨을 황제 앞에 내놓으며 그의 최종 변론을 하였습니다.



그 현장은 이렇게 기념 부조로 되어 있습니다.



제국의회가 열렸던 보룸스 주교 궁정은 이미 사라졌지만 
지금은 미술관 정원에 이렇게 부조를 세워서 그 날의 일을 기념합니다.




그후 보룸스를 떠난 루터는 그를 몰래 도운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 3세가 보낸 사람에게 납치되어 어디론가 끌려갑니다.

만약 그렇치 않았다면 루터는 어느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죽임을 당할지 알수 없었습니다.

 

삼위일체 교회를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교회는 카톨릭 성당이 아닌 개신교회 입니다.



교회안에 들어서면 루터의 흉상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

교회 입구 전시실에는 종교개혁 500주년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보룸스 제국의회 당시 장면



마르틴 루터



황제 카알 5세




황제 카알 5세 앞에선 루터(모자이크 그림임)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루터가 95개 반박문 게시를 하는 장면



교회 안 모습



세계대전때 파괴된 모습



분수대와 교회 모습입니다. 분수대는 1921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용을 잡고 있는 기사가 보이고 뒤로 현재 모습의 트리니티 교회가 보입니다.



용의 모습 뒤로 교회가 보입니다.



여기 공원에도 용이 보입니다.



용분수 입니다.

보룸스에 용이 많이 보이는 것은 여기가 독일의 민족 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 서사시 배경이 되는 곳이라서 그렇습니다.



보룸스 시청입니다.



시청 주변을 돌아보고 보룸스 여행을 마치렵니다.



여기서도 용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다음에 방문하면 그때는 '리벨룽겐 박물관'을 보러 가야겠습니다.  



루터 공원에 가서 '종교개혁 기념비'를 한번 더 돌아보고 보름스 역으로 갑니다.

다음편에는 루터가 납치되어 '아이제나흐'로 끌려가서 갇혀 있던 곳을 찾아서 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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