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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계동 군밤장수를 잡아 죽여라!

2022.10.19

 




            계동 군밤장수를 잡아 죽여라! 


 흥선군 이하응은 영조대왕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이다. 그러니 유력한 왕위 계승 권자였던 셈이다. 이하응은 이 사실 때문에 늘 몸을 사려야했다. 이는 당시 세도를 잡고 있던 안동김씨의 요시찰 인물이라는 뜻과 같았다. 까닥 잘못 했다가는 무슨 트집을 잡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위험이 있었다. 철종 14년간 이하응은 살얼음 밟듯 조심 또 조심하며 김씨 일문의 눈치를 보아야하는 아주 위태한 시절이었다. 


이하응은 운현궁에 살고 있었다. 말이 궁이지 초가삼간 보잘것없는 사저에서 거지나 다름없이 살아야했다. 살림이 너무 빈한하여 체면 차릴 새도 없이 이곳저곳에서 늘 꾸어다 먹고 살았다. 그래도 명색이 왕손인지라 여유 있는 대갓집을 찾아가면 처음 몇 번은 응대하고 도와주었지만 이런 방문이 몇 차례 반복되고 나면 잘 만나주지도 않았고 그 댁 하인들마저 대놓고 멸시하며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하응은 자신의 야심을 숨기기 위해 미친놈 행세를 하며 김씨 일문의 경계심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다. 아니 어쩌면 명색이 왕가의 적자로서 비참할 정도의 생활고와 생존의 위태로움 속에 맨 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어 미친 짓으로 세월을 참아 냈다고도 볼 수 있다. 


권문세가의 잔칫날은 귀신같이 꿰고 앉아 비루먹은 초라한 행색을 하고 끼어들어 한상 얻어먹길 즐겼다. 거지발싸개 같은 행색이지만 엄연히 왕손이기에 대놓고 내쫓지는 못하고 잔치마당 한구석에 마지못해 음식상 한상을 차려주었다. 그 초라한 행색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상가집개’라고 별명을 붙여준 뒤 희롱했다. 이하응은 이런 조소와 비난에 아랑곳없이 잡놈들과 어울려 투전판을 벌리고 공짜 술을 먹다 매를 맞고 쫓겨나는 등 권문세가인 김씨 일문에게 ‘인간 이하의 말종 왕손’의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힘썼다. 이게다 그들의 경계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초가삼간의 허물어져가는 운현궁은 왕기(王氣)가 서린 터였다. 


운현궁 터는 본시 관상대가 있었던 자리다. 관상대는 일명 서운관(書雲觀)이라했으므로 서운관의 구름운(雲)자를 따서 운현궁이라 했다. 관상대는 천기(天氣)를 살피는 기관이다. 왕이 된다는 것은 천기를 타고 천운을 얻어야 가능한 것인데 운현궁에 왕기가 서린다느니 성인(聖人)이 난다느니 하는 소문은 벌써 철종원년 부터 있어왔다. 그래서 김씨 일문은 눈을 부릅뜨고 이하응의 행색을 살폈고 등골이 오싹해진 이하응은 ‘미친개 같은 짓’을 하며 그들의 경계심 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이가 왕이 된 데에는 운현궁 터에 왕기가 서려 있기도 했으나 그의 관상이 좋았다는 설도 있다. 


경북 청도에 사는 유명한 애꾸눈 관상쟁이 백운학 이가 우연히 운현궁 근처에 왔다가 운현궁에 왕기가 서려있음을 보고 그 집 앞에 갔다. 집 앞에서 놀고 있던 명복이의 관상을 본 백운학 은 깜짝 놀라 명복이 앞에 납작 엎드려 절을 올렸다. 외출했다 귀가하다 이를 본 이하응이 기이하게 여겨 그를 집안에 들여 연유를 물은 즉 “이 댁의 도령께서는 존귀한 상을 타고 나셨습니다. 틀림없이 일국의 왕이 될 상이십니다!” 라고 답하자 이하응은 깜짝 놀라 백운학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이놈! 그 무슨 망녕된 소리냐? 우리가문을 멸문지화 시키려고 망말을 하는구나!” 하며 야단을 쳤다. 백운학은 이에 대해 씩 웃으며 “천기를 어찌 함부로 누설 하겠습니까? 아무염려 마시고 두둑이 복채나 주십시요!” 라고 했다한다. 


당장 저녁끼니 할 양식도 없는 판이라 아무것도 내줄게 없다하자 “지금 달라는 소리가 아니라 대업이 이루어지고 난 뒤 크게 주십시요!” 라고 했다 한다. 이하응은 말없이 백지어음 한 장을 백운학에게 써 주었고 1863년 명복이가 왕위(고종)에 오르자 백운학은 다시 운현궁을 찾았다. 와서 보니 운현궁은 옛날의 초라한 초가삼간 운현궁이 아니었다. 고종이 즉위하자 아버지 이하응은 대원군이 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그를 국태공(國太公)이라 불렀다. 운현궁은 초가삼간에서 대궐 같은 기와집으로 탈바꿈 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돈으로 1만 7천 830냥이나 들여 으리으리하게 신축했다. 아무튼 으리으리하게 바뀐 운현궁을 찾은 백운학이는 황소가 끄는 빈 수레를 두 대나 가져왔다. 


백지 어음에 천만냥 을 떡하니 써서 내밀었다. 그 돈을 다 싣자니 두 수레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황당한 요구에 대원군 이하응은 “그놈 배짱한번 커서 좋다!”고 하며 천만냥을 선선히 내주었다 한다. 그런데 백운학은 이에 만족 않고 이른바 ‘보너스’를 요구했다. 평생 못해본 벼슬을 한번 하게 해 달라는 요구였고 자신의 고향인 청도 현감자리를 요구했다. 대원군 이하응은 이 요구도 흔쾌히 들어주었다. 애꾸눈 백운학은 관상한 번 봐 준 댓 가로 천만냥 이라는 어마어마한 돈과 보너스로 청도 현감자리까지 얻어 금의환향하였다. 


1863년 강화 도령으로 널리 알려진 철종이 32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죽자 흥선군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극비리에 조대비와 내통하여 전격적으로 조대비가 자신의 둘째아들 명복이를 임금에 임명하도록 극비리에 추진했고 성공한다. 이때쯤에는 김씨 일문은 인간 같지도 않은 이하응을 경계하지도 않고 있었기에 전격적으로 이 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다. 즉위식은 지금의 창덕궁 안에 있는 인정문(仁政門)에서 거행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12살짜리 고종은 임금에 오르자마자 제일성으로 내린 어명이 “계동에 사는 군밤장수를 잡아다 죽여 버려라!” 였다. 평소 배고프게 자란 명복이는 자신에게 늘 박정하던 군밤장수에게 어린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였다. 


신하들이 황급히 제지하였다. “전하가 지금 보위에 오르시어 성선(聖善)의 덕으로서 정치를 하셔야하는데 어이하여 주살(誅殺)의 위엄을 먼저 보이시나이까?” 라고 하자 잔뜩 골난 표정으로 고종은 입을 씰룩거리며 “다른 이유는 없다. 내가 배가고파 한 두 번 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사정사정하며 군밤 하나만 달라고 그리도 사정을 했건만 그놈은 나를 멸시하고 한 번도 주지 않았으니 어찌 인심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같이 제 이익만 알고 인정이 없는 불선(不善)한 놈은 죽여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수렴청정 하게 된 조대비가 “오늘같이 신성한 날에 그깟 하찮은 놈 목을 효수하여 더럽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니 명령을 거두시고 너그럽게 봐 주시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라고 하여 졸지에 목이 달아나려던 계동 군밤장수는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배고팠던 서러움에 왕이 되고난 뒤 첫 명령을 이리 내렸던 것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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