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연예

열하일기 2 성경(심양)잡지-오디오북-연암박지원

2021.11.16



줄거리 출처: https://www.usjournal.kr

성경잡지’(심양의 이모저모)-심양에서 북진


다시 발로 읽는 열하일기


성경잡지(盛京雜識)는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성경은 심양의 다른 이름이다. 십리하로부터 소흑산에 이르기까지 여정이다. 참고로 십리하는 현재 심양시 관할이고, 소흑산은 금주시 관할로 흑산이다.


심양(성경)과 심양성(성경성)


연암은 7월 10일에, 백탑보를 거쳐 혼하를 건너 심양성으로 들어올 때의 광경을 “삼사(三使)가 차례로 말을 타고 간다. 대개 문관과 무관이 반(班)을 짜서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 둘레가 10리인데 벽돌로 여덟 문루를 쌓았다. 누는 모두 3층이며 옹성(甕城, 성문 밖의 반달 모양의 작은 성)을 쌓아서 보호했다. 좌우에는 또한 동·서 두 대문이 있는데 네거리를 통하도록 돈대(누대)를 쌓고, 그 위에 3층으로 문루를 세웠다. 문루 밑에는 저절로 십자로가 트였는데 수레바퀴는 서로 부딪히고 어깨가 서로 닿을 정도다. 그 번화함이 바다 같다”라고 했다. 이어 “심양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혹은 이르기를, ‘한(漢)이 4군을 두었을 때에는 이곳이 낙랑의 군청[治所]이더니 원위(元魏)·수(隋)·당(唐) 때 고구려에 속했다’ 한다. 지금은 성경이라 일컫는다”라고 기록했다. 앞부분은 당시 심양성을, 뒷부분은 심양을 지배했던 고구려의 역사에 중심을 둔 말이다. 


 

역사적으로 심양을 차지하면 요동 지역을 지배했다. 청나라 역시 이 지역에서 국력을 길렀다. 심양은 초기 청나라 통치자인 누루하치와 홍타이지가 역량을 발휘한 곳이다. 청나라 초기 때 심양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1616년 초대 왕인 태조(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워 1621년 요양을 수도로 삼았다가 1625년 심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 해 누루하치는 영원성 전투에서 패해 사망하고 2대 태종(홍타이지)이 뒤를 이었다. 1634년 심양을 성경으로 개칭했다. 1636년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이 해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했다. 1644년 3대 세조(순치제) 때 북경(연경)으로 천도했다. 그 후 4대 강희제, 5대 옹정제, 6대 건륭제 등으로 이어가다가 12대 선통제(부의) 때인 1912년 멸망했다. 


 

당시 연암이 보았던 심양성의 옛 모습은 <성경통지>(1683년) ‘성경성도’에 나타난 그대로다. 이 지도를 보면 심양성은 외성과 내성, 심양고궁 세 구역으로 돼 있다. 연암 일행은 주로 조선 사신단이 출입하는 심양성의 외성인 남쪽 대남문을 지나 내성인 덕성문으로 들어와 심양고궁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연암이 첫날 심양성에서 본 ‘장군부와 패루’는 당시 덕성문 안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심양고궁 앞이다. 오늘날 심양성의 외성과 내성은 모두가 사라지고 없다. 오직 심양고궁만이 온전히 보존돼 남았다.

 


옛 조선 사신관


연암과 조선 사신단이 머물던 숙소는 현재 심양시 대남가를 따라가다가 남순성로 교차로에서 조양가 쪽으로 가면 있다. 참고로 중국의 길 표지판에서 ‘가(街)’는 남북 방향 길이고, ‘로(路)’는 동서 방향의 길을 뜻한다.


조양가에 있는 옛 조선 사신관은 현대식 건물 사이에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 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머물렀다 하여 세자관이라 했다.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거처는 이처럼 여유가 있었지만 다른 인질들은 세자관 부근 바깥에서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나중에 이곳은 조선 사신들의 숙소로 제공됐다. 이 건물 벽 표지판에는 ‘원일본만주철도주식회사(原日本滿洲鉄道株式会社)봉천공소구지(奉天公所旧址)’라 적혀 있다. 일제가 지배할 때 이곳에 만철주식회사 사무실을 두었다는 내용이다. 봉천은 심양의 다른 이름이다. 1921년 일제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청나라 궁궐 모양으로 황금색 유리기와를 올리고 지붕 선은 녹색으로 칠했다. 그렇지만 이 건물은 일본 건축 양식이 아닌, 입 구(口)자 모양에 가운데 정원을 두는, 중국의 전통 건축 양식이다. 이 건물은 1993년에는 아동도서관으로 사용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중앙건물 현수막에 ‘심양시아동소년아동도서관’이라 써놓았다. 그 아래에는 ‘태권도반’ 모집 안내막이 함께 걸렸다. 조선 사신 대신에 한국의 태권도가 이미 그곳에 머물고 있다. 한류 문화가 드라마나 전자 제품뿐만 아니라 이런 형태로도 전파돼 있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만 가면 심양고궁이다.

 

▲ 심양 옛 조선 사신관

 

심양고궁에서


연암은 심양고궁을 먼저 관람한 후에 고궁 앞 거리를 배회하면서 이틀 밤을 예속재와 가상루라는 상점에서 상인들과 필담을 나눴다. 우리는 반대로 고궁 앞 거리를 거닐면서 연암의 발자취를 확인한 후에 심양고궁을 관람했다. 



심양고궁 정문 앞 거리 동쪽에는 문공방 패루가, 서쪽에는 무공방 패루가 있다. 연암이 밤을 세웠던 곳은 무공방 패루가 있는 대서문 거리였다. 또한, 그가 보았던 형부도 이 거리에 있었다. ‘성경잡지’에서, “집 이름은 가상루다. 모두 여섯 사람인데 의관의 차림이 깨끗하고 행동과 인상이 모두 단아하므로 또한 밤이 되면 예속재에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기로 약속했다. 형부(刑部, 지금의 재판소) 앞을 지나니 아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앞에는 나무를 어긋나게 둘러쳐서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나는 스스로 외국 사람임을 믿고 거리낄 것이 없을뿐더러, 여러 아문 중에 오직 이 문만 열렸으므로 관부의 제도를 속속들이 봐 두리라 생각하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막는 이가 없었다”라고 한 부분이 이곳이다. 거리 끝에 모형물인 대서문 3층 누각과 뒤편 우뚝 선 현대식 빌딩이 보인다. 청나라 때 형부에서 재판을 받은 죄인들은 대서문 밖에서 처형됐다. 그 처형장이 오늘날 심양시 중심가로 변했다. 


현재 심양고궁 정문이 태청문이다. 태청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비룡각과 상봉각이 있고 정면에 직선으로 늘어선 숭정전·봉황루·청녕궁이 있다. 숭정전은 홍타이지가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고, 봉황루는 당시 심양성에서 최고 높은 건물이었으며, 청녕궁은 왕의 침소였다. 동쪽에는 대정전과 10채의 건물로 된 시왕전이 있다. 대정전은 1624년 누루하치가 지은 건물로 정사를 논하고 예식, 연회 등의 행사를 하던 곳이다. 시왕전의 앞 2채는 왕들과 정사를, 나머지 8채는 팔기군의 대표가 자리하던 곳이다. 연암이 직접 들어와 관람했던 곳은 숭정전 앞으로 현재 등탑과 항로가 놓여 있다. 동쪽은 대정전 입구로 연암은 여기서 제지당해 대정전은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바라만 보았다. ‘성경잡지’에 “현판에 숭정전이라 했고, 또 정대광명전이라는 현판도 붙어 있다. 왼편은 비룡각, 오른편은 상봉각이라 했고, 그 뒤에는 3층 높은 다락이 있는데, 이름은 봉황루다. 좌우에 곁문이 있고 문 안에는 군사 수십 명이 있어서 길을 막는다. 할 수 없이 문밖에서 멀리 바라본즉, 높은 누각 겹으로 된 전각과 겹겹이 둘린 회랑들이 모두 오색 찬란한 유리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2층 8각 집은 대정전(大政殿)이다”라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 심양고궁 앞 대서문(고층 건물 앞) 거리, 연암이 본 형부와 상점이 있던 곳

 

▲ 심양고궁 앞 무공방 패루, 연암이 필담을 나눴던 예속재와 가상루가 있던 곳



11월 초 심양 날씨가 싸락눈을 흩뿌린다. 우리는 심양고궁을 나와 서둘러 심양 시내 중산광장을 지나 요녕성 박물관으로 내달렸다. 박물관 관람을 하고 나오니 눈이 쏟아진다. 옛 사신들이 갔던 국도는 출입이 통제돼 재빨리 경심(북경-심양)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로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저녁 무렵에야 북진시에 도착했다.


심양에서 북진으로 가는 옛 사신 길


날씨와 사고로 인해 갈 수 없었던 심양과 소흑산 구간의 기행은 지도와 선행 자료를 참고해 머리로 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동안의 준비가 헛수고가 되지 않게 ‘성경잡지’ 여정을 따라 연암의 발자취를 그렸다.



1780년 7월 12일, 연암은 심양에서 G304번 국도를 따라 영안교를 거쳐 흥륭점을 지나 고가자에서 머물렀다. 지도를 보면 흥륭점은 국도에서 한참 들어간 현재의 흥륭진이고, 그 다음 마을이 고가자다. 다음날 7월 13일, 연암은 새벽에 고가자를 떠나 거류하를 건너 신민시에 도착했다. 신민시에서 전당포 주인에게 국수집에서 애용하는 ‘기상새설(欺霜賽雪, 서리를 속이고 눈과 다툴 만큼 희다)’ 넉 자를 써주고 호기를 부렸다. 여기서 거류하는 구려하, 구류하, 주류하라고 하는데 요하이다. 이 요하를 경계로 좌우가 요동과 요서로 나뉜다. 또한, 요하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적에 진펄 2백여 리에 모래를 깔아 다리를 놓아 건넜다는 곳이다. 신민시에서 G102번 국도를 따라 북진시로 향하는데, 옛 사신 길은 국도에서 3~4㎞ 정도 벗어나 유하구를 지나 백기보(현 소백기보)로 향했다. 연암 일행은 백기보 가는 길에서 한족에게 참외 값을 사기당했다. 7월 14일, 백기보를 출발해 일반랍문(현 반랍문)과 이도정을 지나고 고가포(현 호가진)를 거쳐 소흑산(현 흑산)에 이른다. 연암은 반랍문과 이도정 사이 구간은 습지 지대로, “땅이 움푹 파인 곳이어서 비가 조금만 와도 시궁창이 되고, 봄에 얼음 풀릴 무렵에는 잘못 시궁창에 빠지면, 사람도 말도 삽시에 보이지 않게 돼 지척에 있어도 구출하기 어렵다”라고 했다. 또한, 이 구간은 고구려와 관련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는 도중에 진흙 수렁에 막혀 수레와 말이 빠져서 곤경을 당한 곳이 발착수다. 연암은 이 발착수를 지금의 반랍문(당시 일판문)과 이도정 사이의 거리라고 보았다. 연암은 그날 소흑산에서 자고 다음 날 중안을 거쳐 북진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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