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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14 옥갑야화 玉匣夜話 행재잡록 行在雜錄 - 오디오북

2021.12.11


열하일기 14 옥갑야화 玉匣夜話 행재잡록 行在雜錄   - 오디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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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갑야화」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옥갑야화(玉匣夜話) 중국 상인을 속여 치부한 어느 역관이 결국은 패가망신한 일화, 역관 이추(李樞)는 

그러한 시류에 초연하여 군자다운 풍모가 있었다는 일화,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창기로 팔린 여인을 

구해준 의협적인 행동으로 중국인의 신망을 모은 일화, 북경의 한 부상(富商)이 죽은 뒤에 예전에 그의 

고용인이던 상인 하나가 영락한 그 손자를 돌보아 준 일화, 중국 상인들의 신용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일화, 

국중의 갑부로 유명했던 역관 변승업(卞承業)에 관한 일화 등이 실려 있다.「옥갑야화」는 역관들이 

밀무역으로 축재하여 종종 거부가 되기도 했던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신의에 바탕을 둔

 해외 통상의 발달을 긍정하는 실학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러한 일화들은

 허생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펴기 위한 도입부의 구실을 한다.서울 남산골 선비 허생은 변승업의 조부인 변씨로부터

 빌린 돈으로 상품을 매점매석하여 거금을 마련한다. 그리고 군도(群盜)를 회유하여 무인도에 이상촌을

 건설한다. 이로 인하여 허생이 비범한 인물임을 깨달은 부자 변씨는 북벌(北伐)에 대비하여 인재를 찾고 

있던 어영대장 이완(李浣)에게 허생을 천거한다. 허생은 자신이 제시한 북벌책에 대하여 이완이 난색을

 표하자 사대부의 무사안일을 질타한 뒤 종적을 감추고 만다. 

행재잡록 行在雜錄

 출처:https://shindonga.donga.com /3/all/13/106984/2 

청(淸)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보고 들은 모든 기록이다.

 특히 청(淸)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까닭을 밝혔다. 북경에서 닷새째 되던 날, 갑자기 열하로 오라는

 황제의 지시를 받고 곧장 밤낮 가리지 않은 채 ‘나는 말을 믿고 말은 제 발을 믿고 발은 땅을 믿으며’

 열하로 향했다. 그리고 열하에 도착한 지 엿새 만인 8월14일 어스름 저녁, 또 한 번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오고 가는 것이 조선 사절 마음대로가 아닌, 청나라 황제의 지시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판인데 조선 사절과 예부 사이에 오가는 ‘상주(上奏·임금에게

 말씀을 아뢰던 일)’와 ‘칙유(勅諭·임금의 말씀)’에 터무니없는 ‘잠개(潛改)’, 그러니까 몰래 개필하는 짓이 

자행되고 있음에 연암의 분노가 폭발했다. 3000리를 발섭(跋涉)했다가 겨우 엿새 만에 되돌아가는 

것만으로 분통이 터지는데 하물며 예부와 역관의 농간이라니! 그래서 8월15일자 일기는 조선 사신이 

예부에 항의하는 정문(呈文)에 대한 잠개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일기 전후로 보아 우리 사절의 상주에 

모호한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같으나 북경으로 귀환하라는 결정은 전적으로 예부의 단독 결정이거나 잠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절은 강경하게 항의했지만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도리어 예부와 각을 세우는

 결과만 초래했다. 따질 수도 참을 수도 없는 곤경을 연암은 따로 ‘행재잡록(行在雜錄)’에 털어놓았다. 

오랑캐 본성은 골짜기 같아 ‘행재잡록’은 황제가 여행 중인 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한 글이다.

 8월4일부터 14일까지 청나라 예부와 조선사절 사이에 올리고 내린 주유(奏諭) 외에, 연암이 나라를 걱정하고 

겨레를 걱정한 나머지 허심탄회하게 피력한 국가관이 있다. 주유 내용에는 예부가 역관(譯館)의 대사를 통해

 조선 사절로 하여금 열하로 오게 하라는 분부를 비롯해 경축 사절의 규모를 알리는 유시, 그리고 8월9일까지는

 꼭 도착하라는 칙유가 포함돼 있다. 또한 황제가 조선 사절을 2품, 3품의 반열에 세웠으니 거기에 감사하는

 주문을 올리고 차스룬부(札什倫布)를 찾아 반첸을 배알하고, 조선의 국왕은 조공을 하되 번잡한 허례허식은

 그만두라는 내용의 칙유가 있었다. 그뿐 아니다. 읽어 내려가는 필자의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다. 청나라 황제는

 조선 사절의 일거일동을 시시콜콜하게 지시했다. 오늘날 국제간의 외교 관례나 의전 절차가 복잡다단하다지만 

이렇게 일방적일 수 없다는 생각에 분이 치밀었다. 연암은 진보적인 현실 절충론자였다. 그는 여기서 18세기

 당시 조선인이 겪은 고뇌를 대변했다. 그때 청나라가 들어선지 140년이 지났건만 성리학파들의 존명(尊明)·

호청(胡淸)론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그럼에도 청황의 초청으로 만수절에 열하까지 간 것이 당시 조선의 현실이다. 그래서 연암은 ‘행재잡록’ 첫머리를 이렇게 열었다. (어허! 명나라는 우리 윗나라다. 왜 윗나라인가? 중국이었다.

 우리 선왕과 역대 조정이 승인을 받은 나라다.) 그런 다음 연암은 400년 동안 천자로 받든 형제 관계를 회고했다. 그중에서도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은혜를 기렸다. 그리고 지금의 청나라 현실과 그들이 베푼 특혜를 나열했다. 청나라는 조선에 조공을 줄여주고 대신의 반열에 세우는 등 특전을 베풀지만 정작 조선은 그것을 은혜나 

영광으로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직 오랑캐의 회유로 생각했다. 그건 우리가 청나라를 끝내 중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청 또한 조선을 이웃으로 보지 않았다. 여기서 연암은 청나라 야성을 

간파했다. ‘噫! 戎狄之性如溪壑不可厭也.’ (슬프다! 오랑캐의 본성은 골짜기와 같아서 만족하지 못한다.) 

결국 걱정거리임을 밝히면서 상주와 칙유를 모으는 잡록의 머리말로 삼았다. 아무쪼록 이 글이 ‘천하의 걱정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걱정을 뒤로하는(先天下之憂而憂) 선비’에게 거울이 되길 넌지시 바랐다. 이 글의 말미에선

 조청(朝淸) 외교의 미래를 위한, 단호하면서도 아픈 지적을 해뒀다. 그동안 조-청 두 나라 사절의 진퇴에 관한

 모든 업무를 예부가 관장했고, 그 성사 여부는 역관의 통역에 달려 있었다. 조선의 사절은 140여 년 동안 

3000리 어간(於間)을 오가면서도 청을 오랑캐로 매도할 뿐 지방 관소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면서 

모든 것을 역관에 의존했다. 이에 연암은 ‘역관의 농간이 늘고 사절은 역관의 입만 바라볼 뿐’이라며, 

마침내 ‘사신 된 자로서 반드시 한번 연구할 문제(爲使者不可以不講)’라고 고언했다. 지금 들어도 뜨끔하다.

 외교사절이 통역을 지팡이 삼은 벙어리마냥 여러 나라를 누비는 일은 요새도 가끔 들리는 이야기다. 

북순의 어도, 목란위장 길목 8월15일, 마침내 귀환 길에 올랐다. 미련 때문에 터덕거리다가 열하를 나설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연암은 인연에 관한 불가의 고사를 빌려 이렇게 말했다. ‘상하삼숙(桑下三宿), 뽕나무 아래서

 사흘을 잔 것도 큰 인연이랬는데 하물며 공자를 기리는 태학관에서 엿새를 묵었음에랴!’ 더구나 연암이

 흠모했던 신라의 최치원이나 고려의 이제현조차 얼씬할 수 없었던 새북지방이니 말이다. 연암은 연신

 ‘세상사 알 수 없노라(人生世間無定期)’고 탄식했다. 연암의 귀로는 갈 때와 좀 달랐다. 갈 때는 

고북구(古北口)에서 삼간방(三間房), 삼도랑(三道梁)을 지나 합라하(哈河)와 난하를 건너 쌍탑산(雙塔山)

 아래로 열하에 입성했다. 지금의 국도 101번을 대체로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귀로는 열하에서 서쪽으로

 광인점(廣仁店), 삼분구(三盆口)를 거쳐 역시 쌍탑산을 지나고 다시 난하를 건너 하둔(河屯), 왕가영(王家營),

 황포령(黃鋪嶺), 마권자(馬圈子)를 거쳐 고북구로 들어선다. 약간 서쪽으로 들어갔다가 남쪽으로 선회하는 

궁벽 지대였다. 그 길은 강희가 강희 16년(1677)에 제1차 북순(北巡)을 시작해서 가경(嘉慶) 25년(1820)까지

 근 150년 동안 어도(御道)를 구축하고 거기에 더덩실 행궁을 지었는가 하면, 강희 20년(1681)에 내몽골

 이손하(伊遜河) 및 난하 상류지역 1만5000㎢에 650여㎞ 둘레의 황가 사냥터 목란위장(木蘭圍場)을 건설, 

가경 25년까지 105차례 황가 사냥-목란추선(木蘭秋?)을 벌이던 곳이다. 

그러니까 북순의 어도요, 목란위장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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