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 잠재의식(Architype)의 문제
잠재의식을 無意識(Unconsciousness)이라고도 한다. 깨어있을때 추리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정신작용인 意識(의식)에 대치하여 부른다고. 심리학자인 Freud는 그의 "꿈의 분석"에서 말하기를 羞恥(수치)스럽다고 억눌렀던 잠재의식이 잠의 표면으로 노출되어 꿈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눈을 뜬 현실에서는 意識(의식)이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를 꾹꾹 눌러놓고는 사회적으로 가장 용납되는 행동을 意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에 수긍이 가는 많은 사례를 古書(고서)나 주위에서 보게된다. 공자는 말하기를 "혼자 있을때 어떻게 처신하는 가로써 君子(군자)임이 증명된다"는 式(식)의 말을 남겼다. 사회에서 칭송받는 사람들 중에 엉뚱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목사나 장로, 高僧(고승)이란 분들, 사회 저명인사들, 훌륭한 남편 또는 아내, 등등이 우리를 놀래게 한다.
어떤 사람은 아예 "나는 내 생겨먹은 대로 산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자랑하고 있다. 자기는 僞善(위선)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自然人(자연인)이란 말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의 공동체에는 그 사회가 인정하는 어떤 도덕과 윤리가 있다. 이를 무시하고 無意識(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마음대로 살았다가는 그 사회에서 문제아로 전락함을 면치 못하게 되겠다. 따라서 "생겨먹은 대로"에는 최소한도 必要條件(필요조건)을 만족시키는 범위안에서의 호탈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말은 자기의 잠재의식대로 함부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그 사람도 意識的(의식적)인 자기 통제를 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Sigmund Freud(1856-1939)의 학설이 시들해지던 20세기 초에, 물리학에서는 기존의 학설이었던 Newton의 논리적 사고에 도전하는 새 물리이론이 등장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을 Quantum Theory (양자이론)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에서 "모든 사물, 특히 빛과 熱(열)의 原子(원자)운동에서는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 다르게 관찰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미 定說(정설)로 받아지고 있으며, 이로써 인류 과학에 많은 분야에서 진실로 증명되고 있다.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의 세계에서 역시 이 '콴탐'이론에 입각하여, 정신세계를 새로이 분석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현대의학 분야에서도 이런 각도에서 기존 서양의술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함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 이유는 현대의학이 설명할 수 없는 정신활동에 따라 암이나 기타 질병이 完治(완치)되거나, 또 再發(재발)하는 기적적 현상들이 자주 일어남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患者(환자)의 自覺(자각)에 따라 병이 낫고 또 질병에 걸린다. 물리적 논리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또한 현대 의학의 최첨단인 약물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인류의 반이 사망하고 있다. 병 그 자체로가 아니다. 그 약품이란 것은 Newton의 논리적 화학반응에 따라 계산된 과학적 産物(산물)이다.
舊約의 출애급기에 이런 이야기가 쓰여있다. 모세가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요셉의 후손들을 이끌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의 불기둥으로 시나이 반도의 사막으로 이들 무리를 이끌기를 40 여년 만에 드디어 요단강 가에 까지 도착하였다. 그 중에 처음 따라 나섰던 제1세대가 에집트의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면서 금송아지의 우상이나 노예들이 아끼던 세상의 것들에 혹하다가 다들 사막에서 죽었다.
그 제2세대가 이제 막 '팔레스타인'의 약속된 땅을 건너다 보면서 진군할 것인가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모세가 12명의 용감한 젊은이를 골라서 이 외국인의 땅을 염탐시켰다. 얼마후에 그들이 젓과 꿀이 흐르는 그 곳 '가나안 땅'의 정세를 모세에게 보고 하였다. 10 명이 입을 모아서 말하기를 "그곳의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기세가 당당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는 메뚜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오."
이 말은 듣던 '갈렙'과 '여호수와'가 반대하며 말하기를 "저들을 우리가 쳐서 능히 이길 수가 있읍니다"고 말했다 한다. 모세가 이 두 사람의 정보를 옳게 여기고 '여리고'성을 오직 여호와를 외치는 함성과 7 번 성곽을 돌던 끝에 기습작전으로 이 성을 빼았았다는 얘기가 있다.
10 명은 자신의 눈을 믿지 않았고, 단지 두 사람만 확신을 가져서 결국 소기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 이래도 無意識의 세계를 우습게 볼 것인가? 자신의 潛在된 意識의 現住所가 어딘가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종교와 철학의 세계를 기웃거리게 된다.
기독교 新約聖書 중에 '히브리書가 있다. 그 11장에 유명한 믿음에 관한 글이 쓰여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This is what the ancients were commended for)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대단히 강조 하고 있다. 자기가 믿는 그대로 이루어 진다는 것을 성경의 舊-新약을 통털어 많은 곳에서 이런 진리를 말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무서운 얘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 도깨비, 호랑이, 늑대와 여우, 죽은 귀신, '핼로윈'마귀할멈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한동안 혼자서 변소를 다니기 꺼려했었다. 왜 그랬을까? 사리분별이 부족한 시절에는 남의 말을 믿게 된다. 이것은 비단 어린얘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른 들도 남의 말을 곶이 듣고 경거망동한다. 체면이란 것은 우리 사회에 무서운 병폐 중에 하나다. 누가 혹시 나를 낮추어 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유행에 매우 민감해서 되도록 잘 보이려는 무의식이 작용한다.
또 한가지는 한국인은 6-25사변이란 민족의 상잔이 있었다. 수백만의 북한주민이 짧은 기간에 휴전선 이남으로, 38선 이남에 살던 사람들이 경상도로 피난갔었다. 4년간의 밀고 밀린 전쟁 통에 지금의 휴전상태로 중단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살생이 북조선의 도발로 아직도 점철되고 있다. 천안함, KAL, 아웅산폭파, 연평도포격, 청와대 습격 등등을 위시해서 핵폭탄과 유도탄의 공포 속에서 남한 주민들은 떨다 못해서 이제는 아주 체념 내지 망각에 빠져있다.
Freud는 어디까지나 인간 일개인의 심리상태를 설명했다만, Carl Jung이란 정신분석학자는 사회 전체에 풍미하는 어떤 잠재적 요소를 collective unconsciousness(집단적 잠재의식)이라고 보았으면, 이를 archetypes라 하였다. 이로써 생활공동체 속에 깔려있는 무의식적 요소가 그 구성원의 정신상태를 좌지우지 한다는 거다. 어린이에게 귀신이 무서웠다면, 지금까지는 공산당 또는 빨갱이을 무서워한다.
한국의 위정자들, 특히 박정희정권은 국가발전을 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워서 오늘날의 번영을 가져왔으나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 중병을 앓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었인가? 민족분단에서 발생한 공산 내지 주체사상이란 "집단적 잠재의식"이 우리들의 뇌리에 밖혀서 우리들 모두를 전전긍긍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권시대에는 통혁당간첩사건, 인혁당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그 후에는 김대중 5-18사건, 김영삼 시절의 고영복고정간첩 사건, 전두환의 수많은 억울한 간첩사건... 이 사건들의 저변의 깔린 의도가 바로 공산당이란 편리한 "집단적 무의식"의 공포를 정치권력 유지에 최대한 그리고 적절히 사용하였다. 단 한가지 예외는 金鐘泰(김종태)의 통혁당 사건이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PLXr&articleno=6505&categoryId=6®dt=20110328152527
한가지 분명히 할 것은 인혁당에 연류됐던 김중태(金重泰) 현역 국회의원과 혼동해서는 않된다. 種(씨 종)이고 重(무거울 중)의 차이가 있다. http://youtu.be/jQT-iKhQlX0
金鐘泰(김종태는 '김대중선생의 큰 형님이 된다'는 사람으로 통혁당의 주동인물이었다가 박통시절에 사형되었다. 그 즉시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으로 부터 영웅으로 추대받았다니 진짜 간첩이었던 모양이다. 이 사람의 활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한 혐의로 15년 내지 20년의 옥고를 치루는 허망함을 본다. 칼 맑스의 자본론을 읽었다는 그 하나만으로 이 같은 간첩의 혐의를 썼던 심리적 압박에 우리가 살았었다.
그 중의 한사람이 박성준이다. 혐의자들의 상당수가 후에 무죄로 판결이 났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박통의 후계자였던 전두환이가 사건조작의 숫자에서 우등생의 상장을 받았다는 점이다. 자기는 떨고물을 챙기려 했으니 어딘가 캥기는 데가 있어서 사람을 옭아넣는 그런 혁혁한 공적을 남겼던가?
현재 한국에서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하자, 그냥 검정교과서를 유지하자는 싸움이 한창 진행 중에 있다. 어째서 이것이 그렇게도 문제되는가? 청소년이 배우는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과거를 보는 시각을 제대로 보도록 해야 그들의 집단적 잠재의식을 바로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김일성 왕국을 찬양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고착되어서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실상 이미 흔들렸지만서리...
禪涅槃
이러한 이론에 수긍이 가는 많은 사례를 古書(고서)나 주위에서 보게된다. 공자는 말하기를 "혼자 있을때 어떻게 처신하는 가로써 君子(군자)임이 증명된다"는 式(식)의 말을 남겼다. 사회에서 칭송받는 사람들 중에 엉뚱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목사나 장로, 高僧(고승)이란 분들, 사회 저명인사들, 훌륭한 남편 또는 아내, 등등이 우리를 놀래게 한다.
어떤 사람은 아예 "나는 내 생겨먹은 대로 산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자랑하고 있다. 자기는 僞善(위선)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自然人(자연인)이란 말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의 공동체에는 그 사회가 인정하는 어떤 도덕과 윤리가 있다. 이를 무시하고 無意識(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마음대로 살았다가는 그 사회에서 문제아로 전락함을 면치 못하게 되겠다. 따라서 "생겨먹은 대로"에는 최소한도 必要條件(필요조건)을 만족시키는 범위안에서의 호탈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말은 자기의 잠재의식대로 함부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그 사람도 意識的(의식적)인 자기 통제를 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Sigmund Freud(1856-1939)의 학설이 시들해지던 20세기 초에, 물리학에서는 기존의 학설이었던 Newton의 논리적 사고에 도전하는 새 물리이론이 등장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을 Quantum Theory (양자이론)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에서 "모든 사물, 특히 빛과 熱(열)의 原子(원자)운동에서는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 다르게 관찰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미 定說(정설)로 받아지고 있으며, 이로써 인류 과학에 많은 분야에서 진실로 증명되고 있다.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의 세계에서 역시 이 '콴탐'이론에 입각하여, 정신세계를 새로이 분석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현대의학 분야에서도 이런 각도에서 기존 서양의술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함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 이유는 현대의학이 설명할 수 없는 정신활동에 따라 암이나 기타 질병이 完治(완치)되거나, 또 再發(재발)하는 기적적 현상들이 자주 일어남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患者(환자)의 自覺(자각)에 따라 병이 낫고 또 질병에 걸린다. 물리적 논리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또한 현대 의학의 최첨단인 약물이 그 중독으로 인하여 인류의 반이 사망하고 있다. 병 그 자체로가 아니다. 그 약품이란 것은 Newton의 논리적 화학반응에 따라 계산된 과학적 産物(산물)이다.
舊約의 출애급기에 이런 이야기가 쓰여있다. 모세가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요셉의 후손들을 이끌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의 불기둥으로 시나이 반도의 사막으로 이들 무리를 이끌기를 40 여년 만에 드디어 요단강 가에 까지 도착하였다. 그 중에 처음 따라 나섰던 제1세대가 에집트의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면서 금송아지의 우상이나 노예들이 아끼던 세상의 것들에 혹하다가 다들 사막에서 죽었다.
그 제2세대가 이제 막 '팔레스타인'의 약속된 땅을 건너다 보면서 진군할 것인가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모세가 12명의 용감한 젊은이를 골라서 이 외국인의 땅을 염탐시켰다. 얼마후에 그들이 젓과 꿀이 흐르는 그 곳 '가나안 땅'의 정세를 모세에게 보고 하였다. 10 명이 입을 모아서 말하기를 "그곳의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기세가 당당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는 메뚜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오."
이 말은 듣던 '갈렙'과 '여호수와'가 반대하며 말하기를 "저들을 우리가 쳐서 능히 이길 수가 있읍니다"고 말했다 한다. 모세가 이 두 사람의 정보를 옳게 여기고 '여리고'성을 오직 여호와를 외치는 함성과 7 번 성곽을 돌던 끝에 기습작전으로 이 성을 빼았았다는 얘기가 있다.
10 명은 자신의 눈을 믿지 않았고, 단지 두 사람만 확신을 가져서 결국 소기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 이래도 無意識의 세계를 우습게 볼 것인가? 자신의 潛在된 意識의 現住所가 어딘가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종교와 철학의 세계를 기웃거리게 된다.
기독교 新約聖書 중에 '히브리書가 있다. 그 11장에 유명한 믿음에 관한 글이 쓰여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This is what the ancients were commended for)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대단히 강조 하고 있다. 자기가 믿는 그대로 이루어 진다는 것을 성경의 舊-新약을 통털어 많은 곳에서 이런 진리를 말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무서운 얘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 도깨비, 호랑이, 늑대와 여우, 죽은 귀신, '핼로윈'마귀할멈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한동안 혼자서 변소를 다니기 꺼려했었다. 왜 그랬을까? 사리분별이 부족한 시절에는 남의 말을 믿게 된다. 이것은 비단 어린얘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른 들도 남의 말을 곶이 듣고 경거망동한다. 체면이란 것은 우리 사회에 무서운 병폐 중에 하나다. 누가 혹시 나를 낮추어 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유행에 매우 민감해서 되도록 잘 보이려는 무의식이 작용한다.
또 한가지는 한국인은 6-25사변이란 민족의 상잔이 있었다. 수백만의 북한주민이 짧은 기간에 휴전선 이남으로, 38선 이남에 살던 사람들이 경상도로 피난갔었다. 4년간의 밀고 밀린 전쟁 통에 지금의 휴전상태로 중단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살생이 북조선의 도발로 아직도 점철되고 있다. 천안함, KAL, 아웅산폭파, 연평도포격, 청와대 습격 등등을 위시해서 핵폭탄과 유도탄의 공포 속에서 남한 주민들은 떨다 못해서 이제는 아주 체념 내지 망각에 빠져있다.
Freud는 어디까지나 인간 일개인의 심리상태를 설명했다만, Carl Jung이란 정신분석학자는 사회 전체에 풍미하는 어떤 잠재적 요소를 collective unconsciousness(집단적 잠재의식)이라고 보았으면, 이를 archetypes라 하였다. 이로써 생활공동체 속에 깔려있는 무의식적 요소가 그 구성원의 정신상태를 좌지우지 한다는 거다. 어린이에게 귀신이 무서웠다면, 지금까지는 공산당 또는 빨갱이을 무서워한다.
한국의 위정자들, 특히 박정희정권은 국가발전을 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워서 오늘날의 번영을 가져왔으나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 중병을 앓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었인가? 민족분단에서 발생한 공산 내지 주체사상이란 "집단적 잠재의식"이 우리들의 뇌리에 밖혀서 우리들 모두를 전전긍긍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권시대에는 통혁당간첩사건, 인혁당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그 후에는 김대중 5-18사건, 김영삼 시절의 고영복고정간첩 사건, 전두환의 수많은 억울한 간첩사건... 이 사건들의 저변의 깔린 의도가 바로 공산당이란 편리한 "집단적 무의식"의 공포를 정치권력 유지에 최대한 그리고 적절히 사용하였다. 단 한가지 예외는 金鐘泰(김종태)의 통혁당 사건이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PLXr&articleno=6505&categoryId=6®dt=20110328152527
한가지 분명히 할 것은 인혁당에 연류됐던 김중태(金重泰) 현역 국회의원과 혼동해서는 않된다. 種(씨 종)이고 重(무거울 중)의 차이가 있다. http://youtu.be/jQT-iKhQlX0
金鐘泰(김종태는 '김대중선생의 큰 형님이 된다'는 사람으로 통혁당의 주동인물이었다가 박통시절에 사형되었다. 그 즉시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으로 부터 영웅으로 추대받았다니 진짜 간첩이었던 모양이다. 이 사람의 활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한 혐의로 15년 내지 20년의 옥고를 치루는 허망함을 본다. 칼 맑스의 자본론을 읽었다는 그 하나만으로 이 같은 간첩의 혐의를 썼던 심리적 압박에 우리가 살았었다.
그 중의 한사람이 박성준이다. 혐의자들의 상당수가 후에 무죄로 판결이 났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박통의 후계자였던 전두환이가 사건조작의 숫자에서 우등생의 상장을 받았다는 점이다. 자기는 떨고물을 챙기려 했으니 어딘가 캥기는 데가 있어서 사람을 옭아넣는 그런 혁혁한 공적을 남겼던가?
현재 한국에서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하자, 그냥 검정교과서를 유지하자는 싸움이 한창 진행 중에 있다. 어째서 이것이 그렇게도 문제되는가? 청소년이 배우는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과거를 보는 시각을 제대로 보도록 해야 그들의 집단적 잠재의식을 바로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김일성 왕국을 찬양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고착되어서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실상 이미 흔들렸지만서리...
禪涅槃

좋아요 0
태그
DISCLAIMER
이곳에 게시된 글들은 에이전트 혹은 사용자가 자유롭게 올린 게시물입니다. 커뮤니티 내용을 확인하고 참여에 따른 법적, 경제적, 기타 문제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케이타운 1번가는 해당 컨텐츠에 대해 어떠한 의견이나 대표성을 가지지 않으며, 커뮤니티 서비스에 게재된 정보에 의해 입은 손해나 피해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