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투사가 이해하기 어려워 해서
아래의 글로 대체합니다. 선생이 알아먹을 얘긴지 한번 읽어봐주시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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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드니에 온지 두어 달 되던 어느날 "이또쯔” 중역 한사람과 그의 실무자 "사또” 라는 사람들이 내가 혼자 주말을 외롭게 보내는 사정을 동정했는지 골푸를 치러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사또”의 차를 얻어타고 그들이 잘 가는 어느 골푸장으로 갔었다.
골푸라는 운동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그 날에 나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클럽 하우수에서 반 세트를 빌렸다. "드라이버”, 4 번 욷드, 웯지, 9 번, 5 번 그리고 "퍼터” 의 여섯 개의 채를 들고 따라 나섰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드라이버”를 잡고 하라는 대로 힘껏 공을 때리려 휘둘렀다. 그런데 날아가야 할 공은 그대로 거기 올려져 있는데, 내가 공중으로 붕떴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렇게 나는 골푸를 시작했다. 그후 45년 동안 골푸를 쳐왔는데, 그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후유증으로 "보기 푸레이어”에 그치고 있다. Hale-in-one은 두번이나 했지만서도...
당시에 시드니에 나같이 공적 임무를 띄고 몇년간 체류하던 분들은 무역진흥공사의 조상현 선배만 빼고는 모두들 45세를 넘어서는 분들이었다. 시드니 주제 한국 총영사였던 신두병씨, 홍정표 KOTRA 공관장, 대우 지점장인 조기성씨, 연수차 체류중이었던 경제기획원의 엄 국장, 또 '한' 뭐라는 조그마한 무역 회사 지사장, 이런 분들을 손꼽아 볼 수 있었다.
하늘로 나르면서 시작한 골푸지만, 조상현 선배의 웨곤형 VW 차에 끼어타고 나는 당당히 이 분들과 골푸장을 찾아다녔다. 신 영사나 엄 국장은 80대를 치는 분들이었고, 조기성씨나 홍관장 그리고 조상현씨는 100대 안팍을 치고 있었다. 나는 문론 "스코아”를 세기는 커녕 공찾기에 골몰하였다. 이들 선배들은 골푸를 가르쳐 준다면서 잔소리를 끝없이 해댓는데, 진땀을 흘릴 정도였으나 그래도 나는 좋아서 쫒아 다녔다.
어느날 3 홀 짜리에서 4번 "욷드" 로 한번 갈겼는데, 뭐가 잘못 됐는지 제대로 날아가서 그린에 올라 앉았다. 나는 너무나 감격했었기 때문에 그 때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되게 좋아하며 신나서 떠들었더니, 골푸 선배들이 야단을 쳐왔다. 골푸는 신사들의 게임인데 잘 됐다고 너무 떠들어서도 않되고, 않된다고 투덜대도 않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잔소리를 해댔다. 그런 덕택에 "골푸 매너"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잘 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어디 연습장에 간 적도 없었고, 개인지도를 받을 수도 없었다. 내 얘기는 "골푸 매너", 즉 예의나 골푸의 규칙을 철저하게 배우게 됐다는 얘기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뉴저지의 Public Course 에서 쳤지만, 그곳 골푸인들은 예의라든가 지켜야 할 규정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않쓴다. 내가 그 때 배웠던 신사적인 "매너”로 골푸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불만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다만 누구에게나 공개된 미국의 공설 골푸장은 그런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고 있더군. 워낙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라 할까, 아니면 그런 이유로 특별이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인지...
한번은 민충식 대사가 우리를 Sydney Royal Golf Course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가 한국의 대사였음으로 해서 특수층의 개인클럽(private Course)의 멤바가 될 수 있었다. 우리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한 군데에 모여 서서 우리 말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어떤 호주의 노인 한 분이 우리들에게 다가 오더니 점잖게 우리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든 것도 아니었고, 또 그 곳은 "코스의 근처 풀밭”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는데도, 일부러 찾아와서 주의를 주는 정도였다.
소위 텃세를 하고자 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 늙은이는 "백호주의”의 눈으로 우리를 봤던 모양이었다. Private Course 마다 자기네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동양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드물었었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호주사람보다는 아시아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 분명하고, 이들 아니고는 코스의 운영이 아마도 매우 힘들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골푸 후에는 어느 집으로 몰려가서는 포커 판을 벌리기가 일수인데, 내가 빠질소냐. 문제는 포카를 처음 시작했다는 데에 있었다. 돈을 잃어가며 배워가는데, 내가 즐기려던 예상과는 엄청 비싼 게임이었다. 책방으로 쫒아가서 포카 책을 사서 읽었지만 이론과 실제는 사뭇 달랐다.
이 세상에서 경험과 눈치가 판을 치는 것을 터득할 동안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도 별 수가 없을 수 밖에. 어떤 때 너무 많이 잃었다고 징징대면, 그래서는 않된다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었다. 어쩌다 따게 되면 너무 좋아해서도 않됐다. 다시 말해서 "포카 훼이스”를 유지하라는 주문이었다. 40대 중반의 성인들 속에 갓 30이 끼어들어 같이 놀려다 보니, 이처럼 께임이 않되었던 것이다.
민대사를 모시고 저녁을 먹는 어느 자리에서 내가 무슨 호기심이 있는 질문을 던지면 그 자리에서 주의를 또 다시 받아야 했다. 그런 언급은 민대사의 지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민대사의 부인이 끼고 있는 반지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궁금했었다. 그녀가 꽤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싸가지가 없는 질문이었는데 그 당시의 나의 관심은 이런 "에치켙”를 훨신 넘어서는 어린이의 호기심의 발로라고 해야 할지...
자기네들은 이미 세상 물정이 뻔할 만큼 쓰고 단 맛을 보며 살았겠지만, 나는 직책에 걸맞는 예의를 배울 기회도 없었고, 또 그러한 품위를 위하여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공식 석상에서의 지점장이란 한 회사를 대표하는 감투다,.. 쉽게 말해서. 그 자격을 값지게 하는 응분의 "에티켙트”는 사전에 미리 교육을 받았어야 했다고, 나는 지금 생각한다. 나 같은 별볼일 없는 서민출신으로는 분에 넘치는 자리에 벼락으로 앉게 됐으니 챙피를 감내하여야 하지 않겠오이까?
"푸로토콜"(protocol)이라 하던가?... 한국의 중고등 교육과정에서 영. 수. 국. 필수과목 이상의 예의범절을 가르쳐서 세상에 내보내야 한다고 나는 뒤늦게 생각해 본다. 마찬가지로 검정 역사교과서의 대부분이 북조선의 위대하신 영도자를 찬양하고, 북조선이 한반도의 적법한 정치체제이며, 자유대한 남한의 이승만과 박정희는 개발싸개로 처리되는 한국의 근대사 역시 젊은이들에게 바르게 가르쳐야 할 사안에 해당된다. 이들이 한반도의 훗날을 이끌어가는 역군이거늘, 시대적 내지 국제적 안목을 잘못 알고 세계적 조류에 나섰다가는 주위의 강대국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또 다시 잡혀먹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오늘날의 중국의 지도자들과 일본의 막강한 두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잘 관찰해보시기 바란다. 그들은 범아시아공영권의 헤게머니를 잡고자 지금 열심히 뛰고 있다. 물론 경제력에 의한... 그런데 남한에서는 제 나라의 역사교과서 조차 바로 쓰지 못했으며, 그것을 뒤늦게 바로 잡고자 해도 협박과 공갈의 난리를 치고 있다. 집안 싸움에 골몰하는 그 졸부들의 비죤... 한국경제는 나날이 답보상태에 머물러 허덕이고 있다. 이것이 3년도 채 되지 않은 박근혜 정권의 잘못이라네... 경제는 대형유조선과 같다. 방향을 돌리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김-노-이들 대통령들이 '나누어 먹기' 또는 '몽땅 내어 주기'를 하다가 경제를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들이란 사실을 아시는가?
세상의 어떤 것도 과학적, 논리적인 합당성에서 증명되지 않은 진리는 그 가치가 없다. 역사학이란 학문도 과학적인 진리 탐구의 한 영역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한다. 자유의 해방에서 억압으로의 통일을 우리가 해야 하는가?. 공산주의란 양대가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김씨독재 왕국에 남한의 자유국민을 종부기들이 쇠뇌하고, 교육시켜서는 않된다.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禪涅槃 (선열반)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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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드니에 온지 두어 달 되던 어느날 "이또쯔” 중역 한사람과 그의 실무자 "사또” 라는 사람들이 내가 혼자 주말을 외롭게 보내는 사정을 동정했는지 골푸를 치러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사또”의 차를 얻어타고 그들이 잘 가는 어느 골푸장으로 갔었다.
골푸라는 운동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그 날에 나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클럽 하우수에서 반 세트를 빌렸다. "드라이버”, 4 번 욷드, 웯지, 9 번, 5 번 그리고 "퍼터” 의 여섯 개의 채를 들고 따라 나섰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드라이버”를 잡고 하라는 대로 힘껏 공을 때리려 휘둘렀다. 그런데 날아가야 할 공은 그대로 거기 올려져 있는데, 내가 공중으로 붕떴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렇게 나는 골푸를 시작했다. 그후 45년 동안 골푸를 쳐왔는데, 그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후유증으로 "보기 푸레이어”에 그치고 있다. Hale-in-one은 두번이나 했지만서도...
당시에 시드니에 나같이 공적 임무를 띄고 몇년간 체류하던 분들은 무역진흥공사의 조상현 선배만 빼고는 모두들 45세를 넘어서는 분들이었다. 시드니 주제 한국 총영사였던 신두병씨, 홍정표 KOTRA 공관장, 대우 지점장인 조기성씨, 연수차 체류중이었던 경제기획원의 엄 국장, 또 '한' 뭐라는 조그마한 무역 회사 지사장, 이런 분들을 손꼽아 볼 수 있었다.
하늘로 나르면서 시작한 골푸지만, 조상현 선배의 웨곤형 VW 차에 끼어타고 나는 당당히 이 분들과 골푸장을 찾아다녔다. 신 영사나 엄 국장은 80대를 치는 분들이었고, 조기성씨나 홍관장 그리고 조상현씨는 100대 안팍을 치고 있었다. 나는 문론 "스코아”를 세기는 커녕 공찾기에 골몰하였다. 이들 선배들은 골푸를 가르쳐 준다면서 잔소리를 끝없이 해댓는데, 진땀을 흘릴 정도였으나 그래도 나는 좋아서 쫒아 다녔다.
어느날 3 홀 짜리에서 4번 "욷드" 로 한번 갈겼는데, 뭐가 잘못 됐는지 제대로 날아가서 그린에 올라 앉았다. 나는 너무나 감격했었기 때문에 그 때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되게 좋아하며 신나서 떠들었더니, 골푸 선배들이 야단을 쳐왔다. 골푸는 신사들의 게임인데 잘 됐다고 너무 떠들어서도 않되고, 않된다고 투덜대도 않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잔소리를 해댔다. 그런 덕택에 "골푸 매너"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잘 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어디 연습장에 간 적도 없었고, 개인지도를 받을 수도 없었다. 내 얘기는 "골푸 매너", 즉 예의나 골푸의 규칙을 철저하게 배우게 됐다는 얘기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뉴저지의 Public Course 에서 쳤지만, 그곳 골푸인들은 예의라든가 지켜야 할 규정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않쓴다. 내가 그 때 배웠던 신사적인 "매너”로 골푸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불만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다만 누구에게나 공개된 미국의 공설 골푸장은 그런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고 있더군. 워낙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라 할까, 아니면 그런 이유로 특별이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인지...
한번은 민충식 대사가 우리를 Sydney Royal Golf Course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가 한국의 대사였음으로 해서 특수층의 개인클럽(private Course)의 멤바가 될 수 있었다. 우리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한 군데에 모여 서서 우리 말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어떤 호주의 노인 한 분이 우리들에게 다가 오더니 점잖게 우리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든 것도 아니었고, 또 그 곳은 "코스의 근처 풀밭”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는데도, 일부러 찾아와서 주의를 주는 정도였다.
소위 텃세를 하고자 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 늙은이는 "백호주의”의 눈으로 우리를 봤던 모양이었다. Private Course 마다 자기네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동양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드물었었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호주사람보다는 아시아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 분명하고, 이들 아니고는 코스의 운영이 아마도 매우 힘들게 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골푸 후에는 어느 집으로 몰려가서는 포커 판을 벌리기가 일수인데, 내가 빠질소냐. 문제는 포카를 처음 시작했다는 데에 있었다. 돈을 잃어가며 배워가는데, 내가 즐기려던 예상과는 엄청 비싼 게임이었다. 책방으로 쫒아가서 포카 책을 사서 읽었지만 이론과 실제는 사뭇 달랐다.
이 세상에서 경험과 눈치가 판을 치는 것을 터득할 동안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도 별 수가 없을 수 밖에. 어떤 때 너무 많이 잃었다고 징징대면, 그래서는 않된다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었다. 어쩌다 따게 되면 너무 좋아해서도 않됐다. 다시 말해서 "포카 훼이스”를 유지하라는 주문이었다. 40대 중반의 성인들 속에 갓 30이 끼어들어 같이 놀려다 보니, 이처럼 께임이 않되었던 것이다.
민대사를 모시고 저녁을 먹는 어느 자리에서 내가 무슨 호기심이 있는 질문을 던지면 그 자리에서 주의를 또 다시 받아야 했다. 그런 언급은 민대사의 지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민대사의 부인이 끼고 있는 반지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궁금했었다. 그녀가 꽤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싸가지가 없는 질문이었는데 그 당시의 나의 관심은 이런 "에치켙”를 훨신 넘어서는 어린이의 호기심의 발로라고 해야 할지...
자기네들은 이미 세상 물정이 뻔할 만큼 쓰고 단 맛을 보며 살았겠지만, 나는 직책에 걸맞는 예의를 배울 기회도 없었고, 또 그러한 품위를 위하여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공식 석상에서의 지점장이란 한 회사를 대표하는 감투다,.. 쉽게 말해서. 그 자격을 값지게 하는 응분의 "에티켙트”는 사전에 미리 교육을 받았어야 했다고, 나는 지금 생각한다. 나 같은 별볼일 없는 서민출신으로는 분에 넘치는 자리에 벼락으로 앉게 됐으니 챙피를 감내하여야 하지 않겠오이까?
"푸로토콜"(protocol)이라 하던가?... 한국의 중고등 교육과정에서 영. 수. 국. 필수과목 이상의 예의범절을 가르쳐서 세상에 내보내야 한다고 나는 뒤늦게 생각해 본다. 마찬가지로 검정 역사교과서의 대부분이 북조선의 위대하신 영도자를 찬양하고, 북조선이 한반도의 적법한 정치체제이며, 자유대한 남한의 이승만과 박정희는 개발싸개로 처리되는 한국의 근대사 역시 젊은이들에게 바르게 가르쳐야 할 사안에 해당된다. 이들이 한반도의 훗날을 이끌어가는 역군이거늘, 시대적 내지 국제적 안목을 잘못 알고 세계적 조류에 나섰다가는 주위의 강대국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또 다시 잡혀먹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오늘날의 중국의 지도자들과 일본의 막강한 두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잘 관찰해보시기 바란다. 그들은 범아시아공영권의 헤게머니를 잡고자 지금 열심히 뛰고 있다. 물론 경제력에 의한... 그런데 남한에서는 제 나라의 역사교과서 조차 바로 쓰지 못했으며, 그것을 뒤늦게 바로 잡고자 해도 협박과 공갈의 난리를 치고 있다. 집안 싸움에 골몰하는 그 졸부들의 비죤... 한국경제는 나날이 답보상태에 머물러 허덕이고 있다. 이것이 3년도 채 되지 않은 박근혜 정권의 잘못이라네... 경제는 대형유조선과 같다. 방향을 돌리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김-노-이들 대통령들이 '나누어 먹기' 또는 '몽땅 내어 주기'를 하다가 경제를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들이란 사실을 아시는가?
세상의 어떤 것도 과학적, 논리적인 합당성에서 증명되지 않은 진리는 그 가치가 없다. 역사학이란 학문도 과학적인 진리 탐구의 한 영역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한다. 자유의 해방에서 억압으로의 통일을 우리가 해야 하는가?. 공산주의란 양대가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김씨독재 왕국에 남한의 자유국민을 종부기들이 쇠뇌하고, 교육시켜서는 않된다.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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