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1의 bibliatell슨상의 글을 논하다
다 좋은데, 몇가지가 눈에 거슬려서 보충이랄까 정정하는 토를 단다. 어디까지나 서로 보는 관점이 다른 차이에서 하는 말임을 참작해주기 바랍니다.
1. BC721년이 아니라 BC733년에 앗시리아의 '세마체리브'(Semacherib)왕에게 유태주민 20만이 포로로 끌려갔고, 그 공백에 인근의 타민족을 이주시켰다. 실상 그 지역은 모세의 12지파 중의 Dan, Ephraim 그리고 Benjamin지파들이 정착하면서 현지인들과 피를 섞었던 바, 새삼스레 유태인을 골라낸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짓거리였다. 물론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지만.
2.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 지역"이란 표현에서 "수도"란 말은 어불성설이고, 차라리 이스라엘 전역이라고 했어야 하고,
3. 되돌아온 일부가 제1차 구약, 즉 'E' version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여호와를 '엘로힘'(Elohim)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의 구약성서가 따로 존재해 있었다. 창세기 초장에 두번 반복해서 서술된 것으로 봐서 그렇다는 것이다.
4. 예수를 '그리스도'로 불리게 된지는 그가 죽은 후 AD90년 전후에서 헤레니즘의 문화권에서 사는 고향을 등진 유태계와 이방인들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유태인(정통)들이 아니란 말씀, 그리고 예수 본인도 살아 생전에 자신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공관복음 그 자체가 AD60에서 AD90년에 쓰여진 것이다. 물론 사도행전도 이에 준한다.
5."남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을 <변방에 위치한 지역으로 차별했으며> 그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로 천대했다."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
실상 '나사렡'는 '세포리스'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예수가 성장하던 때에 이곳은 로마사람이 살던 작은 도시에 해당한다. 갈릴리 일대는 기후가 좋아서 그 정복자들이 많이 정착했던 고로 결코 변방이라고 말 할 수 없다. 물론 정통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수 있다만...
예수는 자기 동네에서 멀지 않은 (6 kilometers north-northwest of Nazareth)에 위치한 Sepphoris를 왕래하며 목수일을 했다고 한다. 그가 당시의 최신문명에 접하면서 유태인들의 궁핍함과 정복자의 착취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고, 이로써 혁명가로 기존 세력에 도전할 수가 있었다.
6. 당시의 유태인들이 허기진 삶을 살았던 것은 사실이나, 한국민들이 민주국가 체제에서 유태인들의 지배자들에게서 처럼 착취당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7. "이스라엘과 한국이 좀 다른 것은 이스라엘은 식민지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이 있었고 한국은 이 상황에서 해방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예루살렘에서 쫒겨난 Diaspora가 있었던 AD70년에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를 수가 없었다.
그 이름은 이방인에서 조롱 쪼로 시작된 말이다. 이런 사건은 유대나 이스라엘 땅에서가 아니라 지중해 연안지역인 헤레니즘에 젖어있던 사도바울 교횟 사람들을 그리 불르기 시작했다. 막상 예루살렘에서 12사제의 잔당들은 사해근처로 도망친 후라서 착취고 뭐고가 있을 수 없었다.
8. 유태인은 실상 그를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제나 지금이나. 따라서 기독교신자들에게는 구세주가 될지 몰라도 한국이 국가를 되찾은 것과는 엄격히 다르다. 정신적인 지배자라 할까 하는 성격과 나라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정치적 면모를 어찌 함께 비유할 수가 있는가?
禪涅槃
1. BC721년이 아니라 BC733년에 앗시리아의 '세마체리브'(Semacherib)왕에게 유태주민 20만이 포로로 끌려갔고, 그 공백에 인근의 타민족을 이주시켰다. 실상 그 지역은 모세의 12지파 중의 Dan, Ephraim 그리고 Benjamin지파들이 정착하면서 현지인들과 피를 섞었던 바, 새삼스레 유태인을 골라낸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짓거리였다. 물론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지만.
2.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 지역"이란 표현에서 "수도"란 말은 어불성설이고, 차라리 이스라엘 전역이라고 했어야 하고,
3. 되돌아온 일부가 제1차 구약, 즉 'E' version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여호와를 '엘로힘'(Elohim)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의 구약성서가 따로 존재해 있었다. 창세기 초장에 두번 반복해서 서술된 것으로 봐서 그렇다는 것이다.
4. 예수를 '그리스도'로 불리게 된지는 그가 죽은 후 AD90년 전후에서 헤레니즘의 문화권에서 사는 고향을 등진 유태계와 이방인들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유태인(정통)들이 아니란 말씀, 그리고 예수 본인도 살아 생전에 자신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공관복음 그 자체가 AD60에서 AD90년에 쓰여진 것이다. 물론 사도행전도 이에 준한다.
5."남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을 <변방에 위치한 지역으로 차별했으며> 그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로 천대했다."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
실상 '나사렡'는 '세포리스'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예수가 성장하던 때에 이곳은 로마사람이 살던 작은 도시에 해당한다. 갈릴리 일대는 기후가 좋아서 그 정복자들이 많이 정착했던 고로 결코 변방이라고 말 할 수 없다. 물론 정통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수 있다만...
예수는 자기 동네에서 멀지 않은 (6 kilometers north-northwest of Nazareth)에 위치한 Sepphoris를 왕래하며 목수일을 했다고 한다. 그가 당시의 최신문명에 접하면서 유태인들의 궁핍함과 정복자의 착취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고, 이로써 혁명가로 기존 세력에 도전할 수가 있었다.
6. 당시의 유태인들이 허기진 삶을 살았던 것은 사실이나, 한국민들이 민주국가 체제에서 유태인들의 지배자들에게서 처럼 착취당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7. "이스라엘과 한국이 좀 다른 것은 이스라엘은 식민지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이 있었고 한국은 이 상황에서 해방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예루살렘에서 쫒겨난 Diaspora가 있었던 AD70년에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를 수가 없었다.
그 이름은 이방인에서 조롱 쪼로 시작된 말이다. 이런 사건은 유대나 이스라엘 땅에서가 아니라 지중해 연안지역인 헤레니즘에 젖어있던 사도바울 교횟 사람들을 그리 불르기 시작했다. 막상 예루살렘에서 12사제의 잔당들은 사해근처로 도망친 후라서 착취고 뭐고가 있을 수 없었다.
8. 유태인은 실상 그를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제나 지금이나. 따라서 기독교신자들에게는 구세주가 될지 몰라도 한국이 국가를 되찾은 것과는 엄격히 다르다. 정신적인 지배자라 할까 하는 성격과 나라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정치적 면모를 어찌 함께 비유할 수가 있는가?
禪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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