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편:Trump 뱃장의 이론적 배경은
35여년 前(전)쯤 되었을까? 뉴욕일대에 사는 우리 고교동창들끼리 모여서 골푸회동을 가졌었다. Up-State New York (뉴욕시티의 서북쪽으로 50 miles)에 낮으막한 산야를 끼고 골푸장이 많이 들어서서 손님을 부르고 있는 어느 곳에서 골푸를 끝내자, 우리 민아무개 동창이 일부러 내 차에 승차했었다. 다른 친구들의 좋은 차를 버려두고 구태어 내 디젤엔진 장착의 VW 'Rabbit'모델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다.
민동창이 내 차에 올라 타자 댓뜸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면서, 내가 왜 이민와서 이러고 있는가를 물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러저러한 회사들을 다니다가, 다 때려치우고 빈손으로 이곳에 와서 새 인생의 역경을 치루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자기도 그런 소문을 대강 들었었지만 그런 자세한 사연은 처음 듣는다면서, 매우 감명깊다는 인상을 내게 주었다. 내가 그때에 민동창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가 한국의 '에일맅트'로서 좋은 직장을 다녔지만, 결국은 이 사람들의 청지기였을 뿐이다. 소위 일류 재벌기업들은 자기들의 이해관계만 따졌지, 우리 같은 일꾼들의 장래는 전혀 구애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너도 지금 잘 나가지만 언젠가 하루 아침에 목아지가 날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항상 자기의 장래는 자기가 알아서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한다."
그후에 들으니 한화구릅의 미국책임자, 그리고 희랍의 현지은행장을 그만두고 '금호'라든가 하는 어느 재벌기업의 한 단자회자의 사장으로 취임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회사가 1997년 말에 일어난 IMF사태로 인하여 문을 닫고, 그 파산의 책임이 월급장이 민사장에게 있다고 해서 그 재벌의 어떤 총수란 자가 몰염치하게 등을 돌렸다. 이로 인한 회사부채와 형사 및 민사의 법적 책임으로 그가 오랜동안 법망에 시달려 왔었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민사장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IMF의 골빈 책임자들과 한국정부의 무능력"에, 그리고 한국기업인들의 비정한 착취와 건전한 인격의 결여에 기인했었다는 것"을 다시 상깋시키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지금의 미국경제의 파탄과 세계적 불황의 원인이 이들 IMF란 기관과 미국 재무성, 그리고 SEC (Security Exchange Commission) 관리들의 자유경제정책의 일방적 독선, 이를 등에 업은 큰손 환투기자들의 무자비한 이익추구, 그리고 국제금융기관 운영의 방임과 태만에 기인했었던 것이다.
1971년에 딸라貨의 金兌換(금태환)을 중단했다는 사건은 Bretten Woods에서 결성된 모든 것이 무의미해 졌다고 봐야한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돈으로 세계무역의 결제를 하겠다는 딸라의 가치가 공중에 떠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변동환율'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무도 딸라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최소한 金 1온스當 $35불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金의 換시세에 따라 대강 自國(자국)의 화페가치를 측정할 수가 있었고 각 교역국들이 '바구니' 즉 몇 나라의 환시세를 담은 basket에서 그 날의 환시장의 시세로 미래의 생산과 무역거래의 좌표를 삼았다는 이야기다.
이에 때를 맞추어 1973년에 최초의 '오일 쇽크' 혹은 '오일파동'으로,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려면 몇시간을 기다리는 장사진이 발생했다. 갑자기 올라버린 기름마저 동이 났었다. OPEC라는 석유생산국들의 독재횡포로 전세계가 곤혹을 치루면서 이들 産油國(산유국)들이 딸貨의 홍수를 맞이하자, 사치의 급한 불을 끄고도 넘쳐나는 돈을 어떻게 할줄 몰랐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서방세계의 가장 안전하다는 은행들에 저축하면서 원금을 유지하면서 利子마자 챙기자는 계산이 선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 은행사업은 별볼일이 없어서 똑똑한 사람들은 기피하던 직장이었다. 갑자기 'Petro 딸라'가 몰려들자, 기발한 사람들이 이 돈을 잘 운영하려고 달려들면서 국제금융의 신바람을 날리게 되었다.
한편, 1970년 전후의 한국의 경제발전은 난항을 거듭했었다. 내가 한 재벌기업의 첫 해외지점을 차리고 호주의 '시드니'에 도착했을 때의 박정희 대통령의 구호는 "100억불 수출"이었고, 일본이 36년 간에 착취해간 댓가로 얼마만큼의 보상금과 차관을 외교정상화'란 명목으로 받아내어 신흥기업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시절에 내 다니던 회사, 지금은 SK Group이라고 국제기업의 이름을 달았지만 (실은 그게 아니지만), 일본의 Teijin (帝人:제인)이란 '합성섬유생산회사'의 기술과 공장을 이런 연고로 해서 한국에 설치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을 호주시장에 판다는 명목으로 나를 가족없이 혼자 보내서 생활비조차 제대로 보내주지 않은 박정희 대통의 무역정책에 떠밀림을 받았다. 시작이 반이라던가?
내가 행정考試(고시)를 딱 한번 친 경험이 있었는데, 그때 나온 시험문제가 바로 "외자도입과 경제발전을 논하라"는 제목이었다. 낙방했지만, 그때 합격한 '심대평'이란 대학친구는 두번 시도해서 그때 합격했었고, 후에 들으니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 정계에서 힘을 주고 다니더라. 나는 그런 시험문제가 나올 것을 예상했었다. 독서실 사람들에게 경제학의 이런 예상논제를 말해주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나는 합격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考試(고시)에 경험이 없었던 나는 답안을 미리 작성해서 암기하는 것을 몰랐었다. 재정학에서도 같은 예측의 맞춤과 그 준비 부족으로 결국 나도 대통령 근처에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이처럼 1970년 당시에는 한국이 살길을 타개하기 위하여 외국자본을 도입하는 일이 급선무였었다. 요즘 얘기하듯이 박대통령이 독일에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독일의 차관을 얻어왔어야 했다. (미국은 군사 쿠테타를 밉게 봐서 도와주지 않았었다.) 월남전이 한창이었고 또 오일값이 국제시장에서 딸라로 결제되었기 때문에 딸라貨의 高平價(고평가)정책을 고집하면서 싼 오일의 수입과 월남戰의 비용을 절감하려고 미국은 애썼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는 '인플레'가 지속되었다. 이에 反(반)하여 일본이나 독일, 심지어 한국은 상대적으로 低平價(저평가)환률정책을 쓰면서 미제의 輸入(수입)을 저지하고 미국으로 輸出(수출)을 강화했었다. <싼 자국화페로 딸라화의 상품을 수입하려면 더 많은 自國(자국)의 돈이 든다는 말임. 즉 더 비싸진다>
딸라 벌어들이기에 전력을 다하던 당시에는 특권층이 아니고는 딸라를 들고 해외에 나다닐 수가 없었다. 내가 지사장이란 공무를 띄우고 나가는데, 김포공항에서 딸라를 숨겨가지고 나간다면서 깝대기를 벗기려고 달려들었었다.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접시를 닦으며 공부해야 했던 것도, 한국에서 부모가 잘 살아도 딸라를 송금하기가 힘들었고 나 역시 가족은 커녕 나혼자 외국엘 나가야 했었었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상상이나 할 것인가?
아무튼 이렇게 온 국민이 외화보유고를 높이는데 총력을 기우렸고, 또 Petro Dollar로 인하여 한국의 많은 산업들도 수출을 목표로 신기술과 공장을 건설하고 싼 노동력을 동원하면서 경제가 갑자기 성장하게 되었다. IMF나 IBRD가 국제자유무역의 활성화와 국제결제수단(딸라를 외환보유고로 확보하는 수단)을 견지하는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제은행들이 후진국들에게 눈을 돌렸다. 이들 선진국들이 petro dollar의 자본투자(Capital Investment: 공장,기계 및 대지확보)를 멕시코로 부터 브라질, 알젠티나 그리고 칠레에 경쟁적으로 장기금융을 하다가 이들 나라들의 권력부패와 불필요한 산업시설로 인하여 利子(이자)는 문론이요 元金(원금)까지 날려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동남아 IMF사태 이전에...
1980년대 초에 멕시코로 시작하여 南美(남미)의 여러나라들이 "남미IMF사태"라 할까, 이런 곤혹을 당하면서 미국 재무성과 IMF 관리들이 골치를 앓아야 했었다. 당시만 해도 세계금융시장의 중심은 런던에 있었다. 이 사람들이 '사우디'가 맡겨논 '유로딸라'를 경쟁적으로 南美나 동남아시아의 여러나라들에게 자본이동을 시작했었고, 뒤이어 미국의 유수은행들이 가담했다가 이처럼 돈을 물리게 되자 영국사람들이 IMF에 손을 내밀어 돈을 꾸어달라고 했다.
"IMF를 창설한 목적이 무어냐? 바로 이런 목적으로 Bretton Woods에 서명했으니 지금 IMF가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 이거였다. 결국 미국 재무성과 IMF관리들이 나서서 일부를 남미의 몇 부채자들을 탕감해주고 남어지는 장기상환으로 낙착지었지만, 그 때에 당했던 경험으로 딸라화 가치의 유지가 얼마나 국제금융에 위기를 가져오며 동시에 미국경제에 영향을 주는 가를 절실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진행되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컴퓨타'의 급작스런 발전으로 세계금융의 일대변혁을 가져왔었다. 이전에는 국제통상결제나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이동은 꽤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컴퓨타 프로그램의 능력이 점차로 가속화하면서, 국제간의 환률이 하룻밤 사이에 상호조정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국제간의 자금이동이 단추 한번에 해결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원래 Bretton Woods를 체결할 당시에는 민간인들의 상업용 'Capital investment'란 상상을 하지 못했었으나, 이처럼 Hot Money가 환률의 차이를 바라고 거액의 외국자본이 한 나라에 몰렸다가 그 나라 경제상태에 따라 갑자기 투자한 돈을 전부 빼어나가는 일들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국제결제를 위하여 딸라貨을 보장했던 金에 의한 固定換率(고정환률)의 시대가 갔고, "변동환률"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각 나라들은 자국에게 유리한 환률을 설정했었고, 미국이 高利子(고이자)정책을 유지해서 '인풀레'를 바로 잡고자 앙까님을 쓰면서도 남들과 같이 딸라환률을 저평가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신용도가 가장 높은 미국으로는 고이자를 유지하면서 해외의 자본을 끌어들이면서 미국의 고질적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서 오는 딸라화 하락을 막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틈을 이용하여 한국은 신나게 미국에 수출했고 이에 말맞추어 포항제철, 반도체산업, 자동차, 선박건조, 및 항만 도로건설등의 경제간접산업에 열을 올렸었다. 그리고 경제가 부흥하는 길에 들어섰던 바이다.
참고: <高(고)이자정책은 市中(시장)의 화페유통을 약화시킨다. 이로써 화폐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얻는다. 마찬가지로 국제시장에서도 高이자는 해외에 나도는 투기의 딸라가 미국으로 역류하여 높은 이자소득을 노리게 한다. 주로 30년 짜리 Bond 즉 미국채권을 사게한다. 미국에 저축함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2016년 현재 사우디가 가장 많이 소장한 국가고 중국이 두번째로 꼽힌다. 물론 일본과 독일도 그 축에 끼지만>
수출하여 벌어들인 딸라가 한국은행에 쌓이면서 대신 韓貨(한화)를 방출하다가 보니까 남대문 및동대문 시장에서 돈이 흔하게 돌게 되었다. 그동안 셋방살이하던 사람들이 집을 장만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건설회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서 아파트를 지어대기 시작했다. 이 때를 놓칠세라 동네 아줌마들이 치마바람을 날리면서 남편들의 보잘것 없는 회사월급에 코웃음치게 되었고, 변두리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이 벼락부자가 되었다. 이렇게 돈 많이 번 사람들이 한국산 제품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랄푸 로렌'이나 '칼빈 클라인', 무슨 향수, 무슨 크림, 죠지워커등에 달려들어서 자기네 잘사는 것을 과시해야 했었다. 요즘은 BMW나 Mercedes Benz가 아니면 운전을 못한다며?
박대통령 당시에 굶주렸던 外製(외제)가 이렇게 해서 힘들여 수출한 돈이 낭비되었다. 정부도 너무 많은 외화가 국내에서 韓貨(한화)로 시중에 풀리면서 한화가치가 땅에 떨어지며 인플레 현상을 초래하는 것을 外製輸入(외제수입)으로 막으려고 은근히 권장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바다. 오히려 조장함으로 해서 외환과다로 인한 물가상승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공장도 들어설 만큼 됐고, 국내의 허영이 강세로 나가자 서방의 은행들이 Petro Dollar를 빌려주면서 큰 이익을 챙기려고 설칠때,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이들의 돈을 얻어다가 이런 사치품을 수입해서 시중에 푼다든지, 고리대금업이나 건축붐에 맞추어 이태리의 가구나 일본의 장식품등, 별의별 과시효과를 위하여 수입품을 사들이면 재벌들이 "상당한 재미를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IMF관리들은 금융시장을 자유화해야 한다는 압력을 환률조정이 있을때 마다 입방아를 찧어대고 있던 차라, 그 돈이 Hot Money로 하루가 멀다하고 한국으로 들락거리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短資會社(단자회사)들의 창궐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 민사장이 세계금융시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禪涅槃
2017년 1월 26일 손봄
민동창이 내 차에 올라 타자 댓뜸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면서, 내가 왜 이민와서 이러고 있는가를 물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러저러한 회사들을 다니다가, 다 때려치우고 빈손으로 이곳에 와서 새 인생의 역경을 치루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자기도 그런 소문을 대강 들었었지만 그런 자세한 사연은 처음 듣는다면서, 매우 감명깊다는 인상을 내게 주었다. 내가 그때에 민동창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가 한국의 '에일맅트'로서 좋은 직장을 다녔지만, 결국은 이 사람들의 청지기였을 뿐이다. 소위 일류 재벌기업들은 자기들의 이해관계만 따졌지, 우리 같은 일꾼들의 장래는 전혀 구애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너도 지금 잘 나가지만 언젠가 하루 아침에 목아지가 날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항상 자기의 장래는 자기가 알아서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한다."
그후에 들으니 한화구릅의 미국책임자, 그리고 희랍의 현지은행장을 그만두고 '금호'라든가 하는 어느 재벌기업의 한 단자회자의 사장으로 취임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회사가 1997년 말에 일어난 IMF사태로 인하여 문을 닫고, 그 파산의 책임이 월급장이 민사장에게 있다고 해서 그 재벌의 어떤 총수란 자가 몰염치하게 등을 돌렸다. 이로 인한 회사부채와 형사 및 민사의 법적 책임으로 그가 오랜동안 법망에 시달려 왔었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민사장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IMF의 골빈 책임자들과 한국정부의 무능력"에, 그리고 한국기업인들의 비정한 착취와 건전한 인격의 결여에 기인했었다는 것"을 다시 상깋시키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지금의 미국경제의 파탄과 세계적 불황의 원인이 이들 IMF란 기관과 미국 재무성, 그리고 SEC (Security Exchange Commission) 관리들의 자유경제정책의 일방적 독선, 이를 등에 업은 큰손 환투기자들의 무자비한 이익추구, 그리고 국제금융기관 운영의 방임과 태만에 기인했었던 것이다.
1971년에 딸라貨의 金兌換(금태환)을 중단했다는 사건은 Bretten Woods에서 결성된 모든 것이 무의미해 졌다고 봐야한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돈으로 세계무역의 결제를 하겠다는 딸라의 가치가 공중에 떠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변동환율'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무도 딸라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최소한 金 1온스當 $35불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金의 換시세에 따라 대강 自國(자국)의 화페가치를 측정할 수가 있었고 각 교역국들이 '바구니' 즉 몇 나라의 환시세를 담은 basket에서 그 날의 환시장의 시세로 미래의 생산과 무역거래의 좌표를 삼았다는 이야기다.
이에 때를 맞추어 1973년에 최초의 '오일 쇽크' 혹은 '오일파동'으로,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려면 몇시간을 기다리는 장사진이 발생했다. 갑자기 올라버린 기름마저 동이 났었다. OPEC라는 석유생산국들의 독재횡포로 전세계가 곤혹을 치루면서 이들 産油國(산유국)들이 딸貨의 홍수를 맞이하자, 사치의 급한 불을 끄고도 넘쳐나는 돈을 어떻게 할줄 몰랐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서방세계의 가장 안전하다는 은행들에 저축하면서 원금을 유지하면서 利子마자 챙기자는 계산이 선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 은행사업은 별볼일이 없어서 똑똑한 사람들은 기피하던 직장이었다. 갑자기 'Petro 딸라'가 몰려들자, 기발한 사람들이 이 돈을 잘 운영하려고 달려들면서 국제금융의 신바람을 날리게 되었다.
한편, 1970년 전후의 한국의 경제발전은 난항을 거듭했었다. 내가 한 재벌기업의 첫 해외지점을 차리고 호주의 '시드니'에 도착했을 때의 박정희 대통령의 구호는 "100억불 수출"이었고, 일본이 36년 간에 착취해간 댓가로 얼마만큼의 보상금과 차관을 외교정상화'란 명목으로 받아내어 신흥기업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시절에 내 다니던 회사, 지금은 SK Group이라고 국제기업의 이름을 달았지만 (실은 그게 아니지만), 일본의 Teijin (帝人:제인)이란 '합성섬유생산회사'의 기술과 공장을 이런 연고로 해서 한국에 설치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을 호주시장에 판다는 명목으로 나를 가족없이 혼자 보내서 생활비조차 제대로 보내주지 않은 박정희 대통의 무역정책에 떠밀림을 받았다. 시작이 반이라던가?
내가 행정考試(고시)를 딱 한번 친 경험이 있었는데, 그때 나온 시험문제가 바로 "외자도입과 경제발전을 논하라"는 제목이었다. 낙방했지만, 그때 합격한 '심대평'이란 대학친구는 두번 시도해서 그때 합격했었고, 후에 들으니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 정계에서 힘을 주고 다니더라. 나는 그런 시험문제가 나올 것을 예상했었다. 독서실 사람들에게 경제학의 이런 예상논제를 말해주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나는 합격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考試(고시)에 경험이 없었던 나는 답안을 미리 작성해서 암기하는 것을 몰랐었다. 재정학에서도 같은 예측의 맞춤과 그 준비 부족으로 결국 나도 대통령 근처에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이처럼 1970년 당시에는 한국이 살길을 타개하기 위하여 외국자본을 도입하는 일이 급선무였었다. 요즘 얘기하듯이 박대통령이 독일에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독일의 차관을 얻어왔어야 했다. (미국은 군사 쿠테타를 밉게 봐서 도와주지 않았었다.) 월남전이 한창이었고 또 오일값이 국제시장에서 딸라로 결제되었기 때문에 딸라貨의 高平價(고평가)정책을 고집하면서 싼 오일의 수입과 월남戰의 비용을 절감하려고 미국은 애썼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는 '인플레'가 지속되었다. 이에 反(반)하여 일본이나 독일, 심지어 한국은 상대적으로 低平價(저평가)환률정책을 쓰면서 미제의 輸入(수입)을 저지하고 미국으로 輸出(수출)을 강화했었다. <싼 자국화페로 딸라화의 상품을 수입하려면 더 많은 自國(자국)의 돈이 든다는 말임. 즉 더 비싸진다>
딸라 벌어들이기에 전력을 다하던 당시에는 특권층이 아니고는 딸라를 들고 해외에 나다닐 수가 없었다. 내가 지사장이란 공무를 띄우고 나가는데, 김포공항에서 딸라를 숨겨가지고 나간다면서 깝대기를 벗기려고 달려들었었다.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접시를 닦으며 공부해야 했던 것도, 한국에서 부모가 잘 살아도 딸라를 송금하기가 힘들었고 나 역시 가족은 커녕 나혼자 외국엘 나가야 했었었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상상이나 할 것인가?
아무튼 이렇게 온 국민이 외화보유고를 높이는데 총력을 기우렸고, 또 Petro Dollar로 인하여 한국의 많은 산업들도 수출을 목표로 신기술과 공장을 건설하고 싼 노동력을 동원하면서 경제가 갑자기 성장하게 되었다. IMF나 IBRD가 국제자유무역의 활성화와 국제결제수단(딸라를 외환보유고로 확보하는 수단)을 견지하는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제은행들이 후진국들에게 눈을 돌렸다. 이들 선진국들이 petro dollar의 자본투자(Capital Investment: 공장,기계 및 대지확보)를 멕시코로 부터 브라질, 알젠티나 그리고 칠레에 경쟁적으로 장기금융을 하다가 이들 나라들의 권력부패와 불필요한 산업시설로 인하여 利子(이자)는 문론이요 元金(원금)까지 날려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동남아 IMF사태 이전에...
1980년대 초에 멕시코로 시작하여 南美(남미)의 여러나라들이 "남미IMF사태"라 할까, 이런 곤혹을 당하면서 미국 재무성과 IMF 관리들이 골치를 앓아야 했었다. 당시만 해도 세계금융시장의 중심은 런던에 있었다. 이 사람들이 '사우디'가 맡겨논 '유로딸라'를 경쟁적으로 南美나 동남아시아의 여러나라들에게 자본이동을 시작했었고, 뒤이어 미국의 유수은행들이 가담했다가 이처럼 돈을 물리게 되자 영국사람들이 IMF에 손을 내밀어 돈을 꾸어달라고 했다.
"IMF를 창설한 목적이 무어냐? 바로 이런 목적으로 Bretton Woods에 서명했으니 지금 IMF가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 이거였다. 결국 미국 재무성과 IMF관리들이 나서서 일부를 남미의 몇 부채자들을 탕감해주고 남어지는 장기상환으로 낙착지었지만, 그 때에 당했던 경험으로 딸라화 가치의 유지가 얼마나 국제금융에 위기를 가져오며 동시에 미국경제에 영향을 주는 가를 절실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진행되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컴퓨타'의 급작스런 발전으로 세계금융의 일대변혁을 가져왔었다. 이전에는 국제통상결제나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이동은 꽤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컴퓨타 프로그램의 능력이 점차로 가속화하면서, 국제간의 환률이 하룻밤 사이에 상호조정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국제간의 자금이동이 단추 한번에 해결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원래 Bretton Woods를 체결할 당시에는 민간인들의 상업용 'Capital investment'란 상상을 하지 못했었으나, 이처럼 Hot Money가 환률의 차이를 바라고 거액의 외국자본이 한 나라에 몰렸다가 그 나라 경제상태에 따라 갑자기 투자한 돈을 전부 빼어나가는 일들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국제결제를 위하여 딸라貨을 보장했던 金에 의한 固定換率(고정환률)의 시대가 갔고, "변동환률"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각 나라들은 자국에게 유리한 환률을 설정했었고, 미국이 高利子(고이자)정책을 유지해서 '인풀레'를 바로 잡고자 앙까님을 쓰면서도 남들과 같이 딸라환률을 저평가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신용도가 가장 높은 미국으로는 고이자를 유지하면서 해외의 자본을 끌어들이면서 미국의 고질적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서 오는 딸라화 하락을 막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틈을 이용하여 한국은 신나게 미국에 수출했고 이에 말맞추어 포항제철, 반도체산업, 자동차, 선박건조, 및 항만 도로건설등의 경제간접산업에 열을 올렸었다. 그리고 경제가 부흥하는 길에 들어섰던 바이다.
참고: <高(고)이자정책은 市中(시장)의 화페유통을 약화시킨다. 이로써 화폐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얻는다. 마찬가지로 국제시장에서도 高이자는 해외에 나도는 투기의 딸라가 미국으로 역류하여 높은 이자소득을 노리게 한다. 주로 30년 짜리 Bond 즉 미국채권을 사게한다. 미국에 저축함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2016년 현재 사우디가 가장 많이 소장한 국가고 중국이 두번째로 꼽힌다. 물론 일본과 독일도 그 축에 끼지만>
수출하여 벌어들인 딸라가 한국은행에 쌓이면서 대신 韓貨(한화)를 방출하다가 보니까 남대문 및동대문 시장에서 돈이 흔하게 돌게 되었다. 그동안 셋방살이하던 사람들이 집을 장만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건설회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서 아파트를 지어대기 시작했다. 이 때를 놓칠세라 동네 아줌마들이 치마바람을 날리면서 남편들의 보잘것 없는 회사월급에 코웃음치게 되었고, 변두리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이 벼락부자가 되었다. 이렇게 돈 많이 번 사람들이 한국산 제품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랄푸 로렌'이나 '칼빈 클라인', 무슨 향수, 무슨 크림, 죠지워커등에 달려들어서 자기네 잘사는 것을 과시해야 했었다. 요즘은 BMW나 Mercedes Benz가 아니면 운전을 못한다며?
박대통령 당시에 굶주렸던 外製(외제)가 이렇게 해서 힘들여 수출한 돈이 낭비되었다. 정부도 너무 많은 외화가 국내에서 韓貨(한화)로 시중에 풀리면서 한화가치가 땅에 떨어지며 인플레 현상을 초래하는 것을 外製輸入(외제수입)으로 막으려고 은근히 권장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바다. 오히려 조장함으로 해서 외환과다로 인한 물가상승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공장도 들어설 만큼 됐고, 국내의 허영이 강세로 나가자 서방의 은행들이 Petro Dollar를 빌려주면서 큰 이익을 챙기려고 설칠때,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이들의 돈을 얻어다가 이런 사치품을 수입해서 시중에 푼다든지, 고리대금업이나 건축붐에 맞추어 이태리의 가구나 일본의 장식품등, 별의별 과시효과를 위하여 수입품을 사들이면 재벌들이 "상당한 재미를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IMF관리들은 금융시장을 자유화해야 한다는 압력을 환률조정이 있을때 마다 입방아를 찧어대고 있던 차라, 그 돈이 Hot Money로 하루가 멀다하고 한국으로 들락거리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短資會社(단자회사)들의 창궐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 민사장이 세계금융시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禪涅槃
2017년 1월 26일 손봄

좋아요 0
태그
DISCLAIMER
이곳에 게시된 글들은 에이전트 혹은 사용자가 자유롭게 올린 게시물입니다. 커뮤니티 내용을 확인하고 참여에 따른 법적, 경제적, 기타 문제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케이타운 1번가는 해당 컨텐츠에 대해 어떠한 의견이나 대표성을 가지지 않으며, 커뮤니티 서비스에 게재된 정보에 의해 입은 손해나 피해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