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어째서 우리는 요모냥 요꼴인가
조선은 八道(팔도)로 나누어서 나라를 통치하였다. 어느날 이성계가 조선팔도의 인물평을 해보라고 명했다. 개국공신인 정도전이가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기도: 경중미인(鏡中美人) 거울에 비춰진 미인
평안도: 맹호출림(猛虎出林) 숲에서 나온 호랑이
황해도: 석전경우(石田耕牛) 거친 돌밭을 가는 황소
강원도: 암하노불(巖下老佛) 큰 바위 아래의 부처
충청도: 청풍명월(淸風明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전라도: 풍전세류(風前細柳) 바람결의 가는 버들가지
경상도: 태산준령(泰山峻嶺) 큰 산과 험한 고갯길
그러나 이성계의 출신지인 함경도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태조가 답답하여 무슨 말 이라도 좋으니 어서 말해보라고 재촉하였다.
그러자 정도전은 머뭇거리며, “함경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이옵니다."
그 뜻은 이러했다.
함경도: 이전투구(泥田鬪狗) 진흙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억척스럽고 사나웠다.
이 말을 들은 태조 이성계의 얼굴이 벌개졌다. 눈치 빠른 정도전이 이어 말하길, “그러하오나 함경도는 또한 석전경우(石田耕牛)올시다”하니, 그제서야 용안에 웃음이 가득해서 후한 상을 내렸다고. 강인한 함경도 사람의 성격을 비유한 말이다. -출처불명-
나는 북청에서 18살에 서울로 걸어온 아버지를 두고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럼 나도 함경도 사람이냐? 피로 볼 것 같으면 그렇다 하겠지만 미국식으로 따지면 서울사람이라고 말해야 하겠지. 내가 국민학교, 요새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어느날 나를 불러 앉히고 우리 본관인 청해 이씨의 족보를 펴놓고 내 조상의 내력을 설명해주셨다.
한국에 가장 많은 성씨가 金씨 아니면 李씨다. 그러나 갑오경장이 있기 전에는 성을 가진 사람이 전체에서 많이 봐주어서 3-40%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본관을 가진다는 것은 일종의 명문 자손임을 과시하였었다. 1894년에 풀려났던 머슴들이 주인의 성을 따랐고, 일제시대의 창씨개명을 거치면서 국민 모두가 자기들 멋대로의 성씨를 가지게 됐었다.
아무튼 나의 경우에는 여진사람이었던 둥두란이란 사람이 함경도 개마고원의 어느 산골에 사냥을 나왔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슴을 발견하고 막 짊어지려는 판에 어떤 청년이 나타나서 자기가 쏴서 잡은 것이니 그곳에 놔두라고 호령했다나?
한국에 가장 많은 성씨가 金씨 아니면 李씨다. 그러나 갑오경장이 있기 전에는 성을 가진 사람이 전체에서 많이 봐주어서 3-40%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본관을 가진다는 것은 일종의 명문 자손임을 과시하였었다. 1894년에 풀려났던 머슴들이 주인의 성을 따랐고, 일제시대의 창씨개명을 거치면서 국민 모두가 자기들 멋대로의 성씨를 가지게 됐었다.
아무튼 나의 경우에는 여진사람이었던 둥두란이란 사람이 함경도 개마고원의 어느 산골에 사냥을 나왔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슴을 발견하고 막 짊어지려는 판에 어떤 청년이 나타나서 자기가 쏴서 잡은 것이니 그곳에 그냥 놔두라고 호령했다나?
"이 친구 봐라. 네가 쐈는지는 모르나 발견한 사람은 나니 내꺼가 아니겠는가"라는 쪼의 시비가 붙었다. 설왕설래 하던 차에, 이성계가 하는 말이 이랬다. "너도 활깨나 쏘는 모양인데 우리 활로써 판가름을 하자"고. 둥두란도 활에 관한 한 자신이 있었던 바라 좋다구 말하고 그 제안에 응하기에 이르렀다.
"니넘은 아직 활을 쏘지 않았으니 니가 먼저 내게 화살을 날려봐라" 둥두란이 100보 밖으로 물러나서 이성계를 겨냥하고 시윗줄을 놔겠다. 이성계가 몸을 피하는듯 하더니 날아오는 화살을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둥두란이 그것을 보고 기가 꺽였겠는가? 천만에다. 이성계 차례가 돼서 정성껏 둥씨의 가슴을 향하여 살을 띄웠다. 둥이란 젊은이도 날아오는 그 살을 처서 땅에 떨구었다.
이를 보자 이성계가 감탄하면서 "자네는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냐? 우리 통성명이나 하고 지내자" 그래서 이름을 주고 받고 하다가 "이럴게 아니라, 우리 아주 형제의 의를 맺는게 어떠냐"고 이성계가 제안했단다. 둥씨가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서 나이를 따져보니 자기보다 두살이 많은 20세인지라 그 자리에 엎드려 형님으로 모시길 맹세한다는 기록이 있더군.
그리고 형님의 성인 李씨로 바꾸고 자신을 李之蘭 (이지란)으로 위키백과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이지란(李之蘭, 1331년 ~ 1402년)은, 여진족 출신이며 고려 말 조선(朝鮮) 초의 무관이다. 여진족 이름은 퉁두란(佟豆蘭)으로서, 성씨(姓氏)는 퉁(佟, 동)이고, 이름은 두란(쿠란투란티무르, 古倫豆蘭帖木兒, 고륜두란첩목아)이다. 자는 식형(式馨)이고 불교 법명도 식형(式馨)이다.[2] 아울러 그는 청해 이씨의 시조이다.
조선 왕조의 개창자인 이성계(李成桂)와는 의형제를 맺었으며, 그 인연으로 후에 이(李)씨 성을 사성받아 개명했다 한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고려의 무장으로써 활약할 때부터 그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가했으며, 조선 개국에 동참해 개국공신 1등이 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여진 출신으로 원(元), 몽고제국의 금패천호인 아라부카(阿羅不花)[3]의 아들로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千戶)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아라부카가 일찍이 서쪽을 정벌할 때 큰 별이 우물 지붕 위에 드리웠는데, 천기를 관장하는 자가 이를 보고 "이는 계명성(샛별)이라 그 아래에서 반드시 위인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고, 이후 이지란이 태어났다고 한다(《이지란신도비》).
공민왕(恭愍王) 20년(1371년)에 휘하의 백호(百戶) 부카(甫介)를 보내 1백 호를 거느리고 고려 조정에 내투하였고[4] 청해(靑海, 지금의 북청)에 있다가 이성계(李成桂)의 휘하로 들어갔다.
우왕(禑王) 6년(1380년)에 의형 이성계를 따라 왜구(倭寇) 토벌에 종군해, 지리산 근교 운봉(雲峯)에서 적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왜구를 대패시키는 공을 세웠다(황산대첩). 동왕 9년(1383년) 7월에 요심(遼瀋)의 초적 40여 기가 단주(端州)로 쳐들어왔는데, 이두란은 북청의 천호로써 단주상만호(端州上萬戶) 육려(陸麗),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등과 함께 이들을 쫓아 서주위(西州衛), 해양(海陽) 등의 곳에 이르러 우두머리 6인을 베었다. 8월에는 호바투(胡拔都)가 단주로 쳐들어왔는데, 부만호(副萬戶) 김토부카(金同不花)가 내응하는 바람에 고려군이 패하였다. 당시 이두란은 어머니가 사망하여 이두란은 고향 북청에서 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성계의 부름으로 상복을 벗고 종군하였다고 한다(《고려사》). 그러나 길주(吉州) 벌판에서 선봉으로 나섰다가 호바투에게 패하였다.
우왕 11년(1385년)에는 함흥(咸興) 토아동(兎兒洞)에 쳐들어온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나아가 격퇴하였다. 이 공으로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의 칭호를 받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상의동지밀직사사(商議同知密直司事) 회의도감사(會議都監事)가 되었고, 창왕(昌王) 때에는 지밀직사사를 맡았다.
공양왕(恭讓王) 4년(1392년) 지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가 되었고 이어 명(明)으로부터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가 그 해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자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으며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使)가 되었다. 이듬해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가 되어 왜구를 막는 데 힘썼으며, 태조 8년(1398년)에는 명의 건주위 정벌에 공을 세워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제수되었고 이어 판형조사 의흥삼군부사 중군절제사에 보직 변경 임명되었다.
태조가 물러난 후에도 정종(定宗) 원년(1399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보임되었으며, 태종(太宗)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과거 군관 시절에 여러 전쟁터에서 많은 인명을 죽인 것을 속죄하기 위해 불문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태종 2년(1402년) 4월 9일에 죽었으며, 시호(諡號)를 양렬(襄烈)이라 하였다. 향년 72세.
족보의 얘기를 그저 설화로만 여겨왔었으나 위의 서술을 오늘에 처음 대하게 되면서 새로운 감명이 서려온다. 오래 전에 "왕의 눈물"이란 영화에서도 그가 활동한 내용이 잠간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의 23대 후손이 된다.
禪涅槃
경기도: 경중미인(鏡中美人) 거울에 비춰진 미인
평안도: 맹호출림(猛虎出林) 숲에서 나온 호랑이
황해도: 석전경우(石田耕牛) 거친 돌밭을 가는 황소
강원도: 암하노불(巖下老佛) 큰 바위 아래의 부처
충청도: 청풍명월(淸風明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전라도: 풍전세류(風前細柳) 바람결의 가는 버들가지
경상도: 태산준령(泰山峻嶺) 큰 산과 험한 고갯길
그러나 이성계의 출신지인 함경도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태조가 답답하여 무슨 말 이라도 좋으니 어서 말해보라고 재촉하였다.
그러자 정도전은 머뭇거리며, “함경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이옵니다."
그 뜻은 이러했다.
함경도: 이전투구(泥田鬪狗) 진흙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억척스럽고 사나웠다.
이 말을 들은 태조 이성계의 얼굴이 벌개졌다. 눈치 빠른 정도전이 이어 말하길, “그러하오나 함경도는 또한 석전경우(石田耕牛)올시다”하니, 그제서야 용안에 웃음이 가득해서 후한 상을 내렸다고. 강인한 함경도 사람의 성격을 비유한 말이다. -출처불명-
나는 북청에서 18살에 서울로 걸어온 아버지를 두고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럼 나도 함경도 사람이냐? 피로 볼 것 같으면 그렇다 하겠지만 미국식으로 따지면 서울사람이라고 말해야 하겠지. 내가 국민학교, 요새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어느날 나를 불러 앉히고 우리 본관인 청해 이씨의 족보를 펴놓고 내 조상의 내력을 설명해주셨다.
한국에 가장 많은 성씨가 金씨 아니면 李씨다. 그러나 갑오경장이 있기 전에는 성을 가진 사람이 전체에서 많이 봐주어서 3-40%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본관을 가진다는 것은 일종의 명문 자손임을 과시하였었다. 1894년에 풀려났던 머슴들이 주인의 성을 따랐고, 일제시대의 창씨개명을 거치면서 국민 모두가 자기들 멋대로의 성씨를 가지게 됐었다.
아무튼 나의 경우에는 여진사람이었던 둥두란이란 사람이 함경도 개마고원의 어느 산골에 사냥을 나왔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슴을 발견하고 막 짊어지려는 판에 어떤 청년이 나타나서 자기가 쏴서 잡은 것이니 그곳에 놔두라고 호령했다나?
한국에 가장 많은 성씨가 金씨 아니면 李씨다. 그러나 갑오경장이 있기 전에는 성을 가진 사람이 전체에서 많이 봐주어서 3-40%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본관을 가진다는 것은 일종의 명문 자손임을 과시하였었다. 1894년에 풀려났던 머슴들이 주인의 성을 따랐고, 일제시대의 창씨개명을 거치면서 국민 모두가 자기들 멋대로의 성씨를 가지게 됐었다.
아무튼 나의 경우에는 여진사람이었던 둥두란이란 사람이 함경도 개마고원의 어느 산골에 사냥을 나왔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슴을 발견하고 막 짊어지려는 판에 어떤 청년이 나타나서 자기가 쏴서 잡은 것이니 그곳에 그냥 놔두라고 호령했다나?
"이 친구 봐라. 네가 쐈는지는 모르나 발견한 사람은 나니 내꺼가 아니겠는가"라는 쪼의 시비가 붙었다. 설왕설래 하던 차에, 이성계가 하는 말이 이랬다. "너도 활깨나 쏘는 모양인데 우리 활로써 판가름을 하자"고. 둥두란도 활에 관한 한 자신이 있었던 바라 좋다구 말하고 그 제안에 응하기에 이르렀다.
"니넘은 아직 활을 쏘지 않았으니 니가 먼저 내게 화살을 날려봐라" 둥두란이 100보 밖으로 물러나서 이성계를 겨냥하고 시윗줄을 놔겠다. 이성계가 몸을 피하는듯 하더니 날아오는 화살을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둥두란이 그것을 보고 기가 꺽였겠는가? 천만에다. 이성계 차례가 돼서 정성껏 둥씨의 가슴을 향하여 살을 띄웠다. 둥이란 젊은이도 날아오는 그 살을 처서 땅에 떨구었다.
이를 보자 이성계가 감탄하면서 "자네는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냐? 우리 통성명이나 하고 지내자" 그래서 이름을 주고 받고 하다가 "이럴게 아니라, 우리 아주 형제의 의를 맺는게 어떠냐"고 이성계가 제안했단다. 둥씨가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서 나이를 따져보니 자기보다 두살이 많은 20세인지라 그 자리에 엎드려 형님으로 모시길 맹세한다는 기록이 있더군.
그리고 형님의 성인 李씨로 바꾸고 자신을 李之蘭 (이지란)으로 위키백과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이지란(李之蘭, 1331년 ~ 1402년)은, 여진족 출신이며 고려 말 조선(朝鮮) 초의 무관이다. 여진족 이름은 퉁두란(佟豆蘭)으로서, 성씨(姓氏)는 퉁(佟, 동)이고, 이름은 두란(쿠란투란티무르, 古倫豆蘭帖木兒, 고륜두란첩목아)이다. 자는 식형(式馨)이고 불교 법명도 식형(式馨)이다.[2] 아울러 그는 청해 이씨의 시조이다.
조선 왕조의 개창자인 이성계(李成桂)와는 의형제를 맺었으며, 그 인연으로 후에 이(李)씨 성을 사성받아 개명했다 한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고려의 무장으로써 활약할 때부터 그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가했으며, 조선 개국에 동참해 개국공신 1등이 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여진 출신으로 원(元), 몽고제국의 금패천호인 아라부카(阿羅不花)[3]의 아들로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千戶)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아라부카가 일찍이 서쪽을 정벌할 때 큰 별이 우물 지붕 위에 드리웠는데, 천기를 관장하는 자가 이를 보고 "이는 계명성(샛별)이라 그 아래에서 반드시 위인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고, 이후 이지란이 태어났다고 한다(《이지란신도비》).
공민왕(恭愍王) 20년(1371년)에 휘하의 백호(百戶) 부카(甫介)를 보내 1백 호를 거느리고 고려 조정에 내투하였고[4] 청해(靑海, 지금의 북청)에 있다가 이성계(李成桂)의 휘하로 들어갔다.
우왕(禑王) 6년(1380년)에 의형 이성계를 따라 왜구(倭寇) 토벌에 종군해, 지리산 근교 운봉(雲峯)에서 적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왜구를 대패시키는 공을 세웠다(황산대첩). 동왕 9년(1383년) 7월에 요심(遼瀋)의 초적 40여 기가 단주(端州)로 쳐들어왔는데, 이두란은 북청의 천호로써 단주상만호(端州上萬戶) 육려(陸麗),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黃希碩) 등과 함께 이들을 쫓아 서주위(西州衛), 해양(海陽) 등의 곳에 이르러 우두머리 6인을 베었다. 8월에는 호바투(胡拔都)가 단주로 쳐들어왔는데, 부만호(副萬戶) 김토부카(金同不花)가 내응하는 바람에 고려군이 패하였다. 당시 이두란은 어머니가 사망하여 이두란은 고향 북청에서 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성계의 부름으로 상복을 벗고 종군하였다고 한다(《고려사》). 그러나 길주(吉州) 벌판에서 선봉으로 나섰다가 호바투에게 패하였다.
우왕 11년(1385년)에는 함흥(咸興) 토아동(兎兒洞)에 쳐들어온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나아가 격퇴하였다. 이 공으로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의 칭호를 받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상의동지밀직사사(商議同知密直司事) 회의도감사(會議都監事)가 되었고, 창왕(昌王) 때에는 지밀직사사를 맡았다.
공양왕(恭讓王) 4년(1392년) 지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가 되었고 이어 명(明)으로부터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가 그 해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자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으며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使)가 되었다. 이듬해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가 되어 왜구를 막는 데 힘썼으며, 태조 8년(1398년)에는 명의 건주위 정벌에 공을 세워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제수되었고 이어 판형조사 의흥삼군부사 중군절제사에 보직 변경 임명되었다.
태조가 물러난 후에도 정종(定宗) 원년(1399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보임되었으며, 태종(太宗)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과거 군관 시절에 여러 전쟁터에서 많은 인명을 죽인 것을 속죄하기 위해 불문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태종 2년(1402년) 4월 9일에 죽었으며, 시호(諡號)를 양렬(襄烈)이라 하였다. 향년 72세.
족보의 얘기를 그저 설화로만 여겨왔었으나 위의 서술을 오늘에 처음 대하게 되면서 새로운 감명이 서려온다. 오래 전에 "왕의 눈물"이란 영화에서도 그가 활동한 내용이 잠간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의 23대 후손이 된다.
禪涅槃

좋아요 0
태그
DISCLAIMER
이곳에 게시된 글들은 에이전트 혹은 사용자가 자유롭게 올린 게시물입니다. 커뮤니티 내용을 확인하고 참여에 따른 법적, 경제적, 기타 문제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케이타운 1번가는 해당 컨텐츠에 대해 어떠한 의견이나 대표성을 가지지 않으며, 커뮤니티 서비스에 게재된 정보에 의해 입은 손해나 피해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