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 IMF사태로 정체를 탈피하라
우리는 감정에 치우치는 사물 관찰과 이에 대응하는 행동을 하며 산다.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 자유경제의 구조에서 지표로 사용하는 주식 시장과 현물거래의 가격 변동이 이같은 감정의 변화를 잘 들어내 주고 있다.
옛날에 우리의 조상들이 삼일이니 나흘이니 하는 장터에서 물물교환 하던 시절에는 소 한마리를 돼지 몇 마리의 값으로 환산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 같이 전 세계가 경제 움직임을 대표하는 주식시세와 생산 활동의 가치가 시시각각 변한다.
경제활동의 영역도 한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서 국제 간에 교역이 이루어 지고 있고, 이 거래의 결산을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어떤 매개체를 서로 주고 받고 해서 결제한다. 미국의 딸라가 주종을 이루었고, 최근에 와서는 유로 딸라가 행세를 하며 나섰다. 일본화니, '마르크'화니, '스위스 프랑'이니 하는 것이 이런 결제수단의 대표적이다. 그 이유는 그 나라의 경제력을 믿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해당 나라의 경제력을 어떻게 믿어 주는가? 여기에서 金이란 희소가치를 화폐의 기준으로 삼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희귀성 때문에 물량적으로 성장하더라도 통화의 숫자가 따라 주지 않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막았다. 1944년에 설정된 IMF기금으로 金1온스/$35딸라로 정했던 것이 미국경제의 하락으로 1971년에 '닉슨' 대통령이 金을 딸라로 바꿔주는 태환을 중지하면서 국제거래의 기준에 혼란이 왔다.
한국을 포함하여 국제무역을 하는 어느 나라나 의 경우는 저개발국의 화폐가치를 보장받기 위한 조처로 IMF본부에 금덩어리를 저당잡혀서 자국의 화폐가치를 딸라와의 교환으로 보장받았던 거다.
그럼 누가 화폐가치를 결정해 주겠는가? 현물거래의 가치가 화폐로 결정된다. 한 나라가 장사를 잘 해서 남의 나라 돈을 긁어 뫃았다 하자. 예를 들어 한국이 수출을 장려한 결과로 많은 딸라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무역활동에 참가한 수출기업과 그 부대 산업에 종사한 기업인과 노동자가 그 댓가로 이런 외화를 벌어들였던 것이다.
이 돈을 중앙은행에 맡기고 한화로써 각 기업인이 잉여자본을 축적했고, 노동자는 임금을 받아 쓰고 또 저축했다. 어찌 수출 뿐이었던가? 월남전에서의 병사들의 핏값과 독일의 광부와 간호원의 땀은 마르크화로 둔갑되어 부모들에게 송금 되었다. 미국 이민자들의 돈이나 중동의 기술공들의 땀절은 딸라가 고국으로 날아왔다. 이러한 국외에서의 한국민들의 정성이 한화로 환원되면서 가라오깨 빠나 남대문 시장의 노점상들의 잔돈 푼이 넘쳐나게 되었다. 갑자기 돈은 많고 못가져 본 물건들은 귀해졌으니 생필물의 가격이 올르지 않겠는가? 이것을 '인풀레'라 한다.
우선 자기 집부터 마련해야 했다. 셋방살이를 면하기 위하여 별의별 저축 통장을 들고 은행을 들락거려서 강남 어디에 아파트를 입찰하면 돌아앉아서 다시 팔면 쏠쏠한 재미가 네꼴 내꼴 했겠지. 이것을 땅투기라고 한다. 너도 나도 땅사재기가 시작됐고, 아파트 값이 하늘로 치솟으며, 남편은 순덕이 여편네를 밖으로 내몰았다.
한국이 딸라를 고정환률로 묶어 놓고 한화를 저평가한 수출은 미국은 미찌고 한국은 재미보는 그런 수출에 모두들 열을 올렸다. 미쪄도 딸라만 많이 확보하면, 원자재를 일본에서 들여다가 국내시장에 빼돌려 외제에 정신이 나간 국민들에게서 고가로 팔아서 수지채산을 맞추었다. 상대적으로 싼 외국의 자본을 높은 이자를 주면서 공장을 짖고 기계시설을 하고 남는 외화로 외국의 사치품을 수입하였다.
자...아파트 값은 매일 천정 부지로 뛰지, 외제라면 뭐든지 잘 팔리지, 딸라만 쥐면 뭐든지 않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단자 회사들이 우후 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뭐 귀찮게 수출하고 수입하고 하는 귀찮은 짓거리를 하는가? 아예 딸라를 들여다가 이렇게 딸라에 혹한 사람에게 빌려 주면 되지 않겠냐 하는 계산이 나왔다. "고생은 곰이 하고 돈은 떼놈이 번다"는 말이 있듯이 국내에 남아서 딸라 장사를 하는 사람과 시골의 논 마지기 땅을 가진 사람이 재미를 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야삭빠르게 이 부동산 붐에 빠질세라 전국민이 아파트 사재기에 달라 붙었다. 여기 까지가 욕심이 극에 달하는 Greed 편이다.
그러면 한국 사람만 욕심이 많았냐 물을 수 있다. 아시다시피, 태국이나 '인도네시아'도 그랬고 필립핀, 홍콩, 싱가폴 등등 동남 아시아 전역의 사람들이 같은 장난(?)에 몰두했었다. 제2차 대전 이후에 세계의 모든 금덩이 (78%)를 모아들였던 미국이 세계경제에서 40%의 생산능력을 좌지 우지했었다. 금덩이가 독일과 일본으로 야금야금 넘어간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금빼돌리기가 가속화됐다.
그 이유는 딸라의 가치가 약정한 金 32온스의 가치가 1달라가 아니라 수백딸라로 둔갑해 버렸던 것이다. 딸라만 생기면 태환으로 금덩이를 찾아갔다.엎친데 덥친 격으로 미국의 산업시설은 일본이나 독일에 비해서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장에 재투자할 능력도 이유도 사라졌다. 이로써 '스태그 훌레이숀'이란 것이 계속되었다.
급기야 금으로 보장하겠다는 "브렡톤 욷두(Bretton Woods:1944년에 딸라를 국제 결제 통화로 정하고 International Monetary System이 결성됨)"협정을 파기하는 수치를 당했고, 창궐하는 인플레를 어찌 막아야 할지 막연한 상태로 치달았다. 내가 1977년에 집을 샀을 적에 모게지 이자가 8.75%였다. 그런데 건너집은 5% 미만이었다. 여러번의 경제파동이 있었다. 미국의 이자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단자 회사로 몰리던 딸라가 미국으로 이동하면서 동남 아시아에서 딸라가 딸리기 시작했다. 수출을 더해서 딸라를 더 벌어들이면 되지 않겠나 했는데, 한국의 수출회사들은 더 많은 한화를 지불해야 원자재를 수입할 수 밖에 없었음으로 이미 손해 보는 장사가 더 미찌는 지경으로 갔다. 아파트 붐과 공장건설에 이미 계약해논 원자재 값이 오르자 아줌마들이 몇개씩 청약해 놓은 것을 별의별 이유를 대고 해약하려고 달려들었고, 건설회사는 청부업자들과 공사중지로 시비가 벌어졌다.
한국중앙은행은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자 한국의 이자율을 높여서 '헛머니'의 딸라화의 유출을 막으려 했다. 은행 돈으로 땅을 사놓은 건설회사와 땅투기자들은 땅집고 헤엄치던 아파트 경기를 높은 이자를 내면서 까지 지탱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단자회사들은 상대적으로 싼 단기 이자를 들여다가 이런 곳에 빌려주며 차액에 침을 흘렸었는데, 모두들 원금은 물론 이자분 까지 지불할 수 없다고 나가 자빠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모두들 아파트 계약을 파기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건설회사는 주택건설을 중단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했고 원자재 수입상들은 선물매매로 사놓은 외국 자재값을 지불할 수 없게 되었다. 온 나라가 불경기의 노래를 부르며 한국경제가 파탄이 났다고 매스콤에서 떠들자 순진한 애국자들은 금팔지와 백일돌 금수저를 희사하는 공포로 치달았다. 그 와중에서 기업인들이 자살하고 유수의 은행들이 미국인에게 똥값에 팔려나갔다.
선진국이나 한국에 물건을 판 외국인들이 너도나도 물건 값을 지불하라고 아우성 치며 달려들었으나 한국은 국제 결제수단인 딸라가 이미 바닦이 난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이 지금 들고 있는 것은 짓다가 만 아파트와 이태리대리석과 일본제 문고리 장식과 불란서 욕조와 '랄푸 로렌'의 옷가지 몇벌과 향수와 화장품들...그리고 '죠니 워커' 몇병.....한국 사람들만 이랬는가? 천만에! 태국의 저환율 방뚝이 견디다 못해 터지면서 동남 아시아 전역에 고여 있던 저환률 고수출의 썩은 물이 동남아 여러 나라로 쏠려나갔다. 그 사람들도 욕심에는 한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를 IMF 사태라고 부른다.
결국 IMF가 40 Billion의 딸라를 풀어서 동남아 여러 나라에 빌려 주면서 빚 청산을 하게 하고 경기를 회복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중에 가장 그 혜텍을 많이 받은 나라가 한국이다. 이 경기폭락은 1997년 7월 경에 터지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는 홍콩이 100년 만에 영국으로 부터 뺏겼던 땅을 되찾는 싯점과 때를 같이 한다. 중국이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 한지도 여러해가 되면서 이미 동남아 여러 개발국에서 중국으로 싼 임금을 따라 미국의 수입업자들이 생산지를 바꾸어 왔던 판인데, 이 홍콩 반환에 즈음한 몇해 동안에 불안한 동남아 화폐에서 딸라로 전환하고 있었고 또 미국의 이자율의 상승이 맞아 떨어지면서 이러한 파국적 경제 곤욕을 맛보게 한것이다.
일본이 6.25 한국동란에서 재미를 보다가 발견한 진리는, 미국의 냉전의 방위 우산 아래 남아서 그들의 비유를 맞추면서 미국의 신발명만 들여다가 복제하면 경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지혜를 터득했었다. 기글 쓰고 뭐든지 만들어 내서는 미국으로 수출했다. 아무리 돈을 벌어 들여도 환율을 높히지 않고 계속 일본화를 상대적으로 싸게 설정하며 미국의 금덩어리를 가져왔다. 나아가서 미국의 유명한 부동산을 사들였다. 그러면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라며 일본의 여러 제국주의 시대의 은행들의 자본력을 들먹거렸다. 경제신문과 잡지에서 일본국의 위대함을 떠들었다. 미국을 일방적 수출로 끝내 주었다.
그러나 어찌 됐는가? 이 IMF여파가 있기 10 여년 전에 일본은 이미 코가 납작해 지는 챙피를 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었다. 과열한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폭락을 당하게 되었고, 40여년 동안 모아놓은 국부가 하루 아침에 반으로 전락했다. 그동안 미국은 일본에게 말하기를 수출로써 미국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누누히 역설해 왔었다. 미국은 자국의 화폐로 세계무역의 결제수단으로 쓰게 함으로써, 무진장으로 원하는 대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다. 이를 Seigniorage라 한다. 일본이 반 세기에 걸처 노력한 국부가 미국의 이자율의 급격한 상승의 하나로 반값으로 떨어졌고, 그날 이후의 20여년 동안 일본의 국가경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켜서 다시 성장하는 국가로 가야할 처지에 놓였다.
한 나라의 경제를 수출에만 의존하여 타국의 돈가치에 매달림으로 해서 오는 경제의 불안정 내지 파멸의 가능성을 이 IMF사건을 통하여 동남아의 여러 나라가 뼈저리는 느꼈다. 결국 국가경제의 중용이란 무었인가? 한국도 경제적 욕심과 공포를 사전에 방지하는 정책을 쓰려고 애쓴다고 믿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의 경제계 두뇌들 어느 누구도 이와같은 위험한 국면이 도래할 수 있다고 본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내 동창이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를 하고 장기은행의 경제분석가로 일했다. 내가 몇년에 걸처서 그와 경제문제를 토론했었으나 한국경제통의 견해는 IMF사태를 예견하는 말을 그의 입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 또한 그랬고. 지나간 다음에 말하기는 쉽다.
禪涅槃
옛날에 우리의 조상들이 삼일이니 나흘이니 하는 장터에서 물물교환 하던 시절에는 소 한마리를 돼지 몇 마리의 값으로 환산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 같이 전 세계가 경제 움직임을 대표하는 주식시세와 생산 활동의 가치가 시시각각 변한다.
경제활동의 영역도 한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서 국제 간에 교역이 이루어 지고 있고, 이 거래의 결산을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어떤 매개체를 서로 주고 받고 해서 결제한다. 미국의 딸라가 주종을 이루었고, 최근에 와서는 유로 딸라가 행세를 하며 나섰다. 일본화니, '마르크'화니, '스위스 프랑'이니 하는 것이 이런 결제수단의 대표적이다. 그 이유는 그 나라의 경제력을 믿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해당 나라의 경제력을 어떻게 믿어 주는가? 여기에서 金이란 희소가치를 화폐의 기준으로 삼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희귀성 때문에 물량적으로 성장하더라도 통화의 숫자가 따라 주지 않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막았다. 1944년에 설정된 IMF기금으로 金1온스/$35딸라로 정했던 것이 미국경제의 하락으로 1971년에 '닉슨' 대통령이 金을 딸라로 바꿔주는 태환을 중지하면서 국제거래의 기준에 혼란이 왔다.
한국을 포함하여 국제무역을 하는 어느 나라나 의 경우는 저개발국의 화폐가치를 보장받기 위한 조처로 IMF본부에 금덩어리를 저당잡혀서 자국의 화폐가치를 딸라와의 교환으로 보장받았던 거다.
그럼 누가 화폐가치를 결정해 주겠는가? 현물거래의 가치가 화폐로 결정된다. 한 나라가 장사를 잘 해서 남의 나라 돈을 긁어 뫃았다 하자. 예를 들어 한국이 수출을 장려한 결과로 많은 딸라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무역활동에 참가한 수출기업과 그 부대 산업에 종사한 기업인과 노동자가 그 댓가로 이런 외화를 벌어들였던 것이다.
이 돈을 중앙은행에 맡기고 한화로써 각 기업인이 잉여자본을 축적했고, 노동자는 임금을 받아 쓰고 또 저축했다. 어찌 수출 뿐이었던가? 월남전에서의 병사들의 핏값과 독일의 광부와 간호원의 땀은 마르크화로 둔갑되어 부모들에게 송금 되었다. 미국 이민자들의 돈이나 중동의 기술공들의 땀절은 딸라가 고국으로 날아왔다. 이러한 국외에서의 한국민들의 정성이 한화로 환원되면서 가라오깨 빠나 남대문 시장의 노점상들의 잔돈 푼이 넘쳐나게 되었다. 갑자기 돈은 많고 못가져 본 물건들은 귀해졌으니 생필물의 가격이 올르지 않겠는가? 이것을 '인풀레'라 한다.
우선 자기 집부터 마련해야 했다. 셋방살이를 면하기 위하여 별의별 저축 통장을 들고 은행을 들락거려서 강남 어디에 아파트를 입찰하면 돌아앉아서 다시 팔면 쏠쏠한 재미가 네꼴 내꼴 했겠지. 이것을 땅투기라고 한다. 너도 나도 땅사재기가 시작됐고, 아파트 값이 하늘로 치솟으며, 남편은 순덕이 여편네를 밖으로 내몰았다.
한국이 딸라를 고정환률로 묶어 놓고 한화를 저평가한 수출은 미국은 미찌고 한국은 재미보는 그런 수출에 모두들 열을 올렸다. 미쪄도 딸라만 많이 확보하면, 원자재를 일본에서 들여다가 국내시장에 빼돌려 외제에 정신이 나간 국민들에게서 고가로 팔아서 수지채산을 맞추었다. 상대적으로 싼 외국의 자본을 높은 이자를 주면서 공장을 짖고 기계시설을 하고 남는 외화로 외국의 사치품을 수입하였다.
자...아파트 값은 매일 천정 부지로 뛰지, 외제라면 뭐든지 잘 팔리지, 딸라만 쥐면 뭐든지 않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단자 회사들이 우후 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뭐 귀찮게 수출하고 수입하고 하는 귀찮은 짓거리를 하는가? 아예 딸라를 들여다가 이렇게 딸라에 혹한 사람에게 빌려 주면 되지 않겠냐 하는 계산이 나왔다. "고생은 곰이 하고 돈은 떼놈이 번다"는 말이 있듯이 국내에 남아서 딸라 장사를 하는 사람과 시골의 논 마지기 땅을 가진 사람이 재미를 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야삭빠르게 이 부동산 붐에 빠질세라 전국민이 아파트 사재기에 달라 붙었다. 여기 까지가 욕심이 극에 달하는 Greed 편이다.
그러면 한국 사람만 욕심이 많았냐 물을 수 있다. 아시다시피, 태국이나 '인도네시아'도 그랬고 필립핀, 홍콩, 싱가폴 등등 동남 아시아 전역의 사람들이 같은 장난(?)에 몰두했었다. 제2차 대전 이후에 세계의 모든 금덩이 (78%)를 모아들였던 미국이 세계경제에서 40%의 생산능력을 좌지 우지했었다. 금덩이가 독일과 일본으로 야금야금 넘어간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금빼돌리기가 가속화됐다.
그 이유는 딸라의 가치가 약정한 金 32온스의 가치가 1달라가 아니라 수백딸라로 둔갑해 버렸던 것이다. 딸라만 생기면 태환으로 금덩이를 찾아갔다.엎친데 덥친 격으로 미국의 산업시설은 일본이나 독일에 비해서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장에 재투자할 능력도 이유도 사라졌다. 이로써 '스태그 훌레이숀'이란 것이 계속되었다.
급기야 금으로 보장하겠다는 "브렡톤 욷두(Bretton Woods:1944년에 딸라를 국제 결제 통화로 정하고 International Monetary System이 결성됨)"협정을 파기하는 수치를 당했고, 창궐하는 인플레를 어찌 막아야 할지 막연한 상태로 치달았다. 내가 1977년에 집을 샀을 적에 모게지 이자가 8.75%였다. 그런데 건너집은 5% 미만이었다. 여러번의 경제파동이 있었다. 미국의 이자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단자 회사로 몰리던 딸라가 미국으로 이동하면서 동남 아시아에서 딸라가 딸리기 시작했다. 수출을 더해서 딸라를 더 벌어들이면 되지 않겠나 했는데, 한국의 수출회사들은 더 많은 한화를 지불해야 원자재를 수입할 수 밖에 없었음으로 이미 손해 보는 장사가 더 미찌는 지경으로 갔다. 아파트 붐과 공장건설에 이미 계약해논 원자재 값이 오르자 아줌마들이 몇개씩 청약해 놓은 것을 별의별 이유를 대고 해약하려고 달려들었고, 건설회사는 청부업자들과 공사중지로 시비가 벌어졌다.
한국중앙은행은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자 한국의 이자율을 높여서 '헛머니'의 딸라화의 유출을 막으려 했다. 은행 돈으로 땅을 사놓은 건설회사와 땅투기자들은 땅집고 헤엄치던 아파트 경기를 높은 이자를 내면서 까지 지탱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단자회사들은 상대적으로 싼 단기 이자를 들여다가 이런 곳에 빌려주며 차액에 침을 흘렸었는데, 모두들 원금은 물론 이자분 까지 지불할 수 없다고 나가 자빠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모두들 아파트 계약을 파기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건설회사는 주택건설을 중단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했고 원자재 수입상들은 선물매매로 사놓은 외국 자재값을 지불할 수 없게 되었다. 온 나라가 불경기의 노래를 부르며 한국경제가 파탄이 났다고 매스콤에서 떠들자 순진한 애국자들은 금팔지와 백일돌 금수저를 희사하는 공포로 치달았다. 그 와중에서 기업인들이 자살하고 유수의 은행들이 미국인에게 똥값에 팔려나갔다.
선진국이나 한국에 물건을 판 외국인들이 너도나도 물건 값을 지불하라고 아우성 치며 달려들었으나 한국은 국제 결제수단인 딸라가 이미 바닦이 난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이 지금 들고 있는 것은 짓다가 만 아파트와 이태리대리석과 일본제 문고리 장식과 불란서 욕조와 '랄푸 로렌'의 옷가지 몇벌과 향수와 화장품들...그리고 '죠니 워커' 몇병.....한국 사람들만 이랬는가? 천만에! 태국의 저환율 방뚝이 견디다 못해 터지면서 동남 아시아 전역에 고여 있던 저환률 고수출의 썩은 물이 동남아 여러 나라로 쏠려나갔다. 그 사람들도 욕심에는 한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를 IMF 사태라고 부른다.
결국 IMF가 40 Billion의 딸라를 풀어서 동남아 여러 나라에 빌려 주면서 빚 청산을 하게 하고 경기를 회복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중에 가장 그 혜텍을 많이 받은 나라가 한국이다. 이 경기폭락은 1997년 7월 경에 터지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는 홍콩이 100년 만에 영국으로 부터 뺏겼던 땅을 되찾는 싯점과 때를 같이 한다. 중국이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 한지도 여러해가 되면서 이미 동남아 여러 개발국에서 중국으로 싼 임금을 따라 미국의 수입업자들이 생산지를 바꾸어 왔던 판인데, 이 홍콩 반환에 즈음한 몇해 동안에 불안한 동남아 화폐에서 딸라로 전환하고 있었고 또 미국의 이자율의 상승이 맞아 떨어지면서 이러한 파국적 경제 곤욕을 맛보게 한것이다.
일본이 6.25 한국동란에서 재미를 보다가 발견한 진리는, 미국의 냉전의 방위 우산 아래 남아서 그들의 비유를 맞추면서 미국의 신발명만 들여다가 복제하면 경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지혜를 터득했었다. 기글 쓰고 뭐든지 만들어 내서는 미국으로 수출했다. 아무리 돈을 벌어 들여도 환율을 높히지 않고 계속 일본화를 상대적으로 싸게 설정하며 미국의 금덩어리를 가져왔다. 나아가서 미국의 유명한 부동산을 사들였다. 그러면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라며 일본의 여러 제국주의 시대의 은행들의 자본력을 들먹거렸다. 경제신문과 잡지에서 일본국의 위대함을 떠들었다. 미국을 일방적 수출로 끝내 주었다.
그러나 어찌 됐는가? 이 IMF여파가 있기 10 여년 전에 일본은 이미 코가 납작해 지는 챙피를 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었다. 과열한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폭락을 당하게 되었고, 40여년 동안 모아놓은 국부가 하루 아침에 반으로 전락했다. 그동안 미국은 일본에게 말하기를 수출로써 미국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누누히 역설해 왔었다. 미국은 자국의 화폐로 세계무역의 결제수단으로 쓰게 함으로써, 무진장으로 원하는 대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다. 이를 Seigniorage라 한다. 일본이 반 세기에 걸처 노력한 국부가 미국의 이자율의 급격한 상승의 하나로 반값으로 떨어졌고, 그날 이후의 20여년 동안 일본의 국가경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켜서 다시 성장하는 국가로 가야할 처지에 놓였다.
한 나라의 경제를 수출에만 의존하여 타국의 돈가치에 매달림으로 해서 오는 경제의 불안정 내지 파멸의 가능성을 이 IMF사건을 통하여 동남아의 여러 나라가 뼈저리는 느꼈다. 결국 국가경제의 중용이란 무었인가? 한국도 경제적 욕심과 공포를 사전에 방지하는 정책을 쓰려고 애쓴다고 믿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의 경제계 두뇌들 어느 누구도 이와같은 위험한 국면이 도래할 수 있다고 본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내 동창이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를 하고 장기은행의 경제분석가로 일했다. 내가 몇년에 걸처서 그와 경제문제를 토론했었으나 한국경제통의 견해는 IMF사태를 예견하는 말을 그의 입에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 또한 그랬고. 지나간 다음에 말하기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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