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서러웠던 기억이 떠 올라서 몇자 끄적여봤습니다.
직장갑질 이 기사를 보니 이민 초기에 당했던 갑질이 떠 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도저히 이해 불가한 갑질!
아마도 많은 분들이 경험하지 않았을까,지금도 그리 달라지지 않은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85년도 1월에 시애틀 워싱톤으로 이민 첫발을 디뎠습니다.
당시에는 한인 이민이 그리 많지 않았고 당시만해도 미국에 이주한다고 하면 주변의
부러움을 사던 시절이었지만 , 청운의 푸른 꿈 그런것은 없었습니다.
친척들이 70년대 초에 이미 이민가서 살고 있었고 그들로부터 이민 생활의 고달픔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막연한 환상도 없었고 특별한 기대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이곳이라면 주변 시선 의식없이 막노동을 하고 살어도 손가락질 안받고 살어도
되겠다해서 좋았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일하게 된곳이 햄버거집의 주방 보조일이었고 점심 시간이면 그곳에서
제공하던 한국서는 구경도 못 해봤던 햄버거가 그렇게 맛이 있었고 지금도 즐겨 먹습니다.
당시에 그곳의 대부분 한인들은 소규모의 자영업에 종사했고 비행기 제작하는 보잉
회사의 청소일 정도의 일을하면서 삽니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주방보조 일, 그런데 그곳에서 일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쌓아 놓은 잡 신청서가 두꺼운 책 높이로 있었고 그 신청자들이
워싱턴 주립대학 학생들인 것을 알고는 상당히 놀랄만큼 일거리가 없었습니다.
머리털 나고서의 첫 직장 비록 주방 보조일이었지만 아주 열심히 일했습니다.
문제는 같이 이민온 형님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L,A에 가면 일이 많다고해서 형님 먼저 엘에이로, 교회 목사님 소개로 전기 공사 헬퍼로 취직돼서 3개월만에 합류하기 위해서
L,A로, 다닌던 곳에서 무척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
이제 일이 익숙해지려니 그만둔다고… 굉장히 미안했지만 , 어떻게 합니까.. 그후로 계속 이곳에서 벌써33년이라는 세월이흘렀습니다.
처음 구한 1베드룸의 허름한 APT에서 침대 살 돈도 아끼려 남이 버리고 간 옥상에서오랫동안 방치돼서 비에 젖은 침구류를 메니저에게 얻어서.. 그나마도 어머님과 여동생은 방에다 풀세트로 , 형과 나는 리빙룸에서 비에 젖어서 얼룩진 매트리스만 깔고…
처음 잡은 직장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 소개로 아주 작은 규모의 수족관이었고 그곳에서 한달간 일하는데 에너지가 넘쳐나던 나는 너무 일이 따분합니다.
어항닦고, 물갈아주고… 한달만에 대책도 없이 그만두고 다른 일 찾아서…형님 소개로전기공사 헬퍼로..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한 3개월 일하는데 차가 없었던 나를사장이 새벽 6시에 픽업해서 집에 돌아오면 빨라야 밤 10시, 아니면 12시 새벽한시
일당으로 40불을 받는데,다른 잡역부의 일당도 대동소이.. 다른 직종의 헬퍼들을 만납니다 . 페인트, 목수, 건축일 등등 그런데 그들은 오후 4시 정도면 마감하고 보통은 점심도 사장이 제공하는데 나는 항상 도시락 지참하고.. 저녁은 항시 일을 식당으로 잡고그곳에서 얻어 먹었습니다.
미국 생활은 잘 모르고 오버타임 그런것도 몰랐지만 너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죽기 살기로 일을 한덕에 사장으로부터 역대 최고의 헬퍼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전혀 위로가 안됩니다 , 4개월만에 역시 아무런 대책없이 사직.. 사장 왈 너는 절대로 여기서 배운 기술로 전기일 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오 마이SHIT!.
이런저런 막일 전전하다가 한국가서 결혼식…준비가 안돼서 미루자 했더니 똥차가 빠져야 2년차이 나는 여동생 쎄단이 나간다고 성화해서 허겁지겁 똥차 하나 치우고 돌아와서 일자리를 구하려니 정말로 눈물겹게 ,영어 못한다고 문전 박대만 받다가 창고일 노가도로 … 땡스 가드.
그곳에서 고맙기도하고 성격상 어영부영을 못합니다.
그래서 또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일했습니다,주로 쇳덩어리 종유를 다루던 곳이라 일 욕심이 많다보니 아무리 무거워도 혼자서 들었다 내렸다 , 그러다가 하루는 허리가 시큰하더니 움직이지를 못하겠습니다.
간신히 집에와서 동네 병원에.. 엑스레이 한번 찍어볼 생각도 못하고 그저 허리에 두르는 압박 붕대 처방 받으려니 의사가 내돈 낼 필요없다, 직장에서 치료해주게 되있으니걱정말고 제대로 치료받으라고 하는데 못들은척 하고 다음날 출근했는데 서있기도 힘들만큼 벌벌 떨립니다. 사장은 당분간 힘든 일 하지말고 살살하라 하는데 병원가서 제대로치료 받으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나도 이상하게 생각 안했고 짤리지만 않으면 하는 바램이었습니다.
영어도 못하고 특별한 기술도 없었던 본인으로서는 다쳐서 일 그만 나와라 하면..
온통 그 걱정 뿐이었으니 벌벌 떨리는 몸으로 악으로, 깡으로 버텨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버텨냈는지, 입사 첫날부터 컨테이너에 박혀서 로딩,언로딩
빈공간 하나없이 손으로 안은 어둡고 덥고 먼지 구덩이 아침부터 시작해서 해질녁까지..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니 연탄밭에서 구르다가 온 사람모양 시커먼 구정물이..
내일은 가서 그만둔다고 해야겠다, 다른것은 몰라도 체력 하나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 했었는데 도저히 못 버틸것 같다,다음날 아침에 생각을 다잡습니다, 어떻게 구한 직장인데 한달만 버티고 그만두자
그렇게 지나다보니 한달이 훌쩍 흘렀고 적응도 됩니다.
그렇게 3년을 그곳에서.. 동안에 숫한 멕시컨 동료들이 왔다가는 한달을 못버텨 낼정도로 일이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일이 손바닥 안에 들어오고 직원들도 늘어나고 회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비례해서 내 일감은 늘어갔지만 봉급은 제자리걸음 남들 다 퇴근하고
나는 밤 9시 10시까지 남아서 정리하고 사장과 같이 퇴근하는 그런 생활들…
물론 오버타임 페이 없었고 오히려 잡일 하는 아줌마들이 꽤 있었는데 그 아줌마들의
봉급보다 적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 사이에 창고 일을 총괄하게 되었고 사장도 주임이라는 직위를 하사?하지만 봉급은 전체 직원중에서 제일 조금 받았습니다.
불평 불만없이 묵묵히 일을 하니 시쳇말로 호구! 잡혔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다닐 직장이 있고 그 돈으로 어머님도 모시고 당시 학생이었던 여동생과 마누라 이렇게 4식구가 먹고 사니 그저 감사했습니다.
그러다가 규모가 더욱 더 커지고 한국에서 무슨 공장장인가 했던 친구가 스카웃돼서
왔는데 이친구 눈에는 내가 눈에 가시로 보였나봅니다.
창고안에 일은 내 손바닥안에 있고 일하는 사람들이 내말을 잘 따라주니 고까웠던
모양입니다.
그때까지 단 한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갑질!을 해대는데 정말 견디기가 힘듭니다.
내게 무언가 지시를 하면 엉뚱하고 황당한 지시..
이거 이렇게 일 처리하면 안되는데요? 시꺼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
역시 문제가 생기면 사장으로부터의 불똥은 내게로.. 아니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면
어떻게 합니까?
옆에서 쳐다보고 있으면서 그저 바라만보고 덤탱이는 나만쓰고… 성격상 고자질 안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출근했더니 내 책상만 완전 뚝 떨어진 구석으로..
이유가 뭡니까?
왜 내 책상이 저곳으로 갔습니까 ? 일의 효율성을 위해서라는
어처구니 없는 답변,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즉시로 사장에게 달려가서 사직하겠다 하니 이유를 묻습니다.
아, 페인트 일을 하면 돈을 더 벌것 같습니다,그러지말고 사실대로 말하라 무엇이 문제이냐 내가 다 해결 해주고 , 봉급도 파격적으로 인상해 주겠다고 제안해 왔지만?
내가 사장의 입장이라면 과연 누구를 택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두번 생각할 필요도 없고 사내가 그만두는 마당에 구질구질하게 누구때문에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이 달라집니까?
갑질에 관한 기사를 보니 그때의 서러웠던 기억이 떠 올라서 몇자 끄적여봤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도저히 이해 불가한 갑질!
아마도 많은 분들이 경험하지 않았을까,지금도 그리 달라지지 않은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85년도 1월에 시애틀 워싱톤으로 이민 첫발을 디뎠습니다.
당시에는 한인 이민이 그리 많지 않았고 당시만해도 미국에 이주한다고 하면 주변의
부러움을 사던 시절이었지만 , 청운의 푸른 꿈 그런것은 없었습니다.
친척들이 70년대 초에 이미 이민가서 살고 있었고 그들로부터 이민 생활의 고달픔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막연한 환상도 없었고 특별한 기대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이곳이라면 주변 시선 의식없이 막노동을 하고 살어도 손가락질 안받고 살어도
되겠다해서 좋았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일하게 된곳이 햄버거집의 주방 보조일이었고 점심 시간이면 그곳에서
제공하던 한국서는 구경도 못 해봤던 햄버거가 그렇게 맛이 있었고 지금도 즐겨 먹습니다.
당시에 그곳의 대부분 한인들은 소규모의 자영업에 종사했고 비행기 제작하는 보잉
회사의 청소일 정도의 일을하면서 삽니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주방보조 일, 그런데 그곳에서 일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쌓아 놓은 잡 신청서가 두꺼운 책 높이로 있었고 그 신청자들이
워싱턴 주립대학 학생들인 것을 알고는 상당히 놀랄만큼 일거리가 없었습니다.
머리털 나고서의 첫 직장 비록 주방 보조일이었지만 아주 열심히 일했습니다.
문제는 같이 이민온 형님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L,A에 가면 일이 많다고해서 형님 먼저 엘에이로, 교회 목사님 소개로 전기 공사 헬퍼로 취직돼서 3개월만에 합류하기 위해서
L,A로, 다닌던 곳에서 무척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
이제 일이 익숙해지려니 그만둔다고… 굉장히 미안했지만 , 어떻게 합니까.. 그후로 계속 이곳에서 벌써33년이라는 세월이흘렀습니다.
처음 구한 1베드룸의 허름한 APT에서 침대 살 돈도 아끼려 남이 버리고 간 옥상에서오랫동안 방치돼서 비에 젖은 침구류를 메니저에게 얻어서.. 그나마도 어머님과 여동생은 방에다 풀세트로 , 형과 나는 리빙룸에서 비에 젖어서 얼룩진 매트리스만 깔고…
처음 잡은 직장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 소개로 아주 작은 규모의 수족관이었고 그곳에서 한달간 일하는데 에너지가 넘쳐나던 나는 너무 일이 따분합니다.
어항닦고, 물갈아주고… 한달만에 대책도 없이 그만두고 다른 일 찾아서…형님 소개로전기공사 헬퍼로..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한 3개월 일하는데 차가 없었던 나를사장이 새벽 6시에 픽업해서 집에 돌아오면 빨라야 밤 10시, 아니면 12시 새벽한시
일당으로 40불을 받는데,다른 잡역부의 일당도 대동소이.. 다른 직종의 헬퍼들을 만납니다 . 페인트, 목수, 건축일 등등 그런데 그들은 오후 4시 정도면 마감하고 보통은 점심도 사장이 제공하는데 나는 항상 도시락 지참하고.. 저녁은 항시 일을 식당으로 잡고그곳에서 얻어 먹었습니다.
미국 생활은 잘 모르고 오버타임 그런것도 몰랐지만 너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죽기 살기로 일을 한덕에 사장으로부터 역대 최고의 헬퍼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전혀 위로가 안됩니다 , 4개월만에 역시 아무런 대책없이 사직.. 사장 왈 너는 절대로 여기서 배운 기술로 전기일 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오 마이SHIT!.
이런저런 막일 전전하다가 한국가서 결혼식…준비가 안돼서 미루자 했더니 똥차가 빠져야 2년차이 나는 여동생 쎄단이 나간다고 성화해서 허겁지겁 똥차 하나 치우고 돌아와서 일자리를 구하려니 정말로 눈물겹게 ,영어 못한다고 문전 박대만 받다가 창고일 노가도로 … 땡스 가드.
그곳에서 고맙기도하고 성격상 어영부영을 못합니다.
그래서 또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일했습니다,주로 쇳덩어리 종유를 다루던 곳이라 일 욕심이 많다보니 아무리 무거워도 혼자서 들었다 내렸다 , 그러다가 하루는 허리가 시큰하더니 움직이지를 못하겠습니다.
간신히 집에와서 동네 병원에.. 엑스레이 한번 찍어볼 생각도 못하고 그저 허리에 두르는 압박 붕대 처방 받으려니 의사가 내돈 낼 필요없다, 직장에서 치료해주게 되있으니걱정말고 제대로 치료받으라고 하는데 못들은척 하고 다음날 출근했는데 서있기도 힘들만큼 벌벌 떨립니다. 사장은 당분간 힘든 일 하지말고 살살하라 하는데 병원가서 제대로치료 받으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나도 이상하게 생각 안했고 짤리지만 않으면 하는 바램이었습니다.
영어도 못하고 특별한 기술도 없었던 본인으로서는 다쳐서 일 그만 나와라 하면..
온통 그 걱정 뿐이었으니 벌벌 떨리는 몸으로 악으로, 깡으로 버텨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버텨냈는지, 입사 첫날부터 컨테이너에 박혀서 로딩,언로딩
빈공간 하나없이 손으로 안은 어둡고 덥고 먼지 구덩이 아침부터 시작해서 해질녁까지..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니 연탄밭에서 구르다가 온 사람모양 시커먼 구정물이..
내일은 가서 그만둔다고 해야겠다, 다른것은 몰라도 체력 하나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 했었는데 도저히 못 버틸것 같다,다음날 아침에 생각을 다잡습니다, 어떻게 구한 직장인데 한달만 버티고 그만두자
그렇게 지나다보니 한달이 훌쩍 흘렀고 적응도 됩니다.
그렇게 3년을 그곳에서.. 동안에 숫한 멕시컨 동료들이 왔다가는 한달을 못버텨 낼정도로 일이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일이 손바닥 안에 들어오고 직원들도 늘어나고 회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비례해서 내 일감은 늘어갔지만 봉급은 제자리걸음 남들 다 퇴근하고
나는 밤 9시 10시까지 남아서 정리하고 사장과 같이 퇴근하는 그런 생활들…
물론 오버타임 페이 없었고 오히려 잡일 하는 아줌마들이 꽤 있었는데 그 아줌마들의
봉급보다 적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 사이에 창고 일을 총괄하게 되었고 사장도 주임이라는 직위를 하사?하지만 봉급은 전체 직원중에서 제일 조금 받았습니다.
불평 불만없이 묵묵히 일을 하니 시쳇말로 호구! 잡혔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다닐 직장이 있고 그 돈으로 어머님도 모시고 당시 학생이었던 여동생과 마누라 이렇게 4식구가 먹고 사니 그저 감사했습니다.
그러다가 규모가 더욱 더 커지고 한국에서 무슨 공장장인가 했던 친구가 스카웃돼서
왔는데 이친구 눈에는 내가 눈에 가시로 보였나봅니다.
창고안에 일은 내 손바닥안에 있고 일하는 사람들이 내말을 잘 따라주니 고까웠던
모양입니다.
그때까지 단 한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갑질!을 해대는데 정말 견디기가 힘듭니다.
내게 무언가 지시를 하면 엉뚱하고 황당한 지시..
이거 이렇게 일 처리하면 안되는데요? 시꺼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
역시 문제가 생기면 사장으로부터의 불똥은 내게로.. 아니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면
어떻게 합니까?
옆에서 쳐다보고 있으면서 그저 바라만보고 덤탱이는 나만쓰고… 성격상 고자질 안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출근했더니 내 책상만 완전 뚝 떨어진 구석으로..
이유가 뭡니까?
왜 내 책상이 저곳으로 갔습니까 ? 일의 효율성을 위해서라는
어처구니 없는 답변,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즉시로 사장에게 달려가서 사직하겠다 하니 이유를 묻습니다.
아, 페인트 일을 하면 돈을 더 벌것 같습니다,그러지말고 사실대로 말하라 무엇이 문제이냐 내가 다 해결 해주고 , 봉급도 파격적으로 인상해 주겠다고 제안해 왔지만?
내가 사장의 입장이라면 과연 누구를 택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두번 생각할 필요도 없고 사내가 그만두는 마당에 구질구질하게 누구때문에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이 달라집니까?
갑질에 관한 기사를 보니 그때의 서러웠던 기억이 떠 올라서 몇자 끄적여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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