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어머니(母, Mother, Mom)또는 어머님, 어미, 엄마, 모친(母親)은 자손을 출산한 여성을 자식의 관점에서 부르는 호칭이지요. 만약 부모가 이혼하고 남성이 새 배우자를 맞아들인 경우에는 '의붓어머니', '새엄마', '새어머니', '계모'(繼母) 등으로 불리구요.
유독 한국사회에서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욕심없이 순수한 존재, 숭고하며, 가족과 가정을 위해 헌신적이며, 희생적이라는 신성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따라서 여성을 잠재적인 어머니로 보는 시각들도 존재하나 이는 만들어진 시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계모라는 호칭은 한국에서 '악독하고 나쁜 새어머니'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모든 어머니가 자식과 남편에게 헌신적인 것은 아니고, 계모가 악독한 것은 아니지요.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관점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지요.
'어머님'은 친어머니나 계모가 아닌 나이 많은 일반 기혼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요즘 마켓이나 백화점 같은 곳에 가면 점원들이 흔히 ‘어머니’라고 잘도 부르지요. 물론 사모님이라고 높여 부르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저 어머니라고 불러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친구의 어머니를 부를 때도 공손하고 친절하게 어머니라고 부르지요. 우리 노숙자들 제 동생과 저보고 ‘마마’라고 부릅니다. 엄마라는 말이겠지요.
근대 이후 한국에서는 어머니를 모성애를 가진 숭고하고 신성한 존재로 각인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어머니 역할과 모성애를 일방적으로 강요해왔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192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페미니스트이자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인 나혜석, 박인덕, 김일엽, 허정숙 등은 어머니가 숭고한 존재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였다지요. 나혜석, 김일엽 등은 한국사회가 여성에게 어머니이기를 강요한다고 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답니다.
어린이날과 어머니날, 그리고 스승의 날 그래서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5월입니다. 따스한 봄 날씨와 더불어 따뜻하고 훈훈한 가족 나들이가 격에 맞는 5월입니다.
고국을 떠나 먼 이국땅에 사는 우리들 1세는 부모님을 함께 모시고 오신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1세들이 고국땅에 어머님을 홀로 두고 혹은 고국땅에 묻고 오신 분들도 많으시리라 여겨집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왠지 모르게 그리움이 샘물처럼 솟아나고, 지나간 추억이 주마등처럼 줄줄이 생각납니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방울이 떨어집니다.
요즘 엄마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이들을 앞세워 자기들의 욕심이나 욕구를 채워보려는 이들이 많지요. 본인들이 해보지 못한 것을 자식들을 통해 이루어보려고 애를 쓰지요. 그러기에 자격이나 자질 같은 것은 무시한 채 무조건 피아노 학원이나 미술학원에는 다녀야 하고, 일류 대학에는 꼭 합격을 해야 하고, 자녀들의 재능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사’자가 붙은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그뿐이 아니라 결혼도 부모에 마음에 먼저 들어야 하고, 사랑과 관계없이 환경과 조건을 따지는 데 열을 내지요. 그리고 자녀들이 혹 부모의 뜻을 거역하게 되면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원망과 책망은 물론 물리적으로 나무라는 일도 비일비재하지요.
그러나 요즘 젊은 며느리들은 시부모님들을 ‘웬수’ 라고 부른다지요. 시부모님들은 그들을 상전처럼 모셔야 하구요. 손자 손녀들을 만나고 싶어도 약속을 하지 않으면 만날 수조차 없는 그런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모두 경험하셨을 겁니다.
그런가 하면 가족의 순서에도 저만치 멀리 있습니다. 아이가 첫 번째, 남편이 두 번째, 강아지가 3번째, 시부모쯤이야 등수 밖으로 밀려나가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요.
혹시 보모님들이 재력이라도 있다면 몰라도 재력도 없는 시부모님들이야 찬밥도 아까워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들은 잊혀질 수는 없지요. 그리고 너무도 아름답고 숭고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좋은 글 중에서 뽑았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은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란 어머니가 가슴 졸이며 병원에 달려갔지만, 불행히도 청년은 이미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 마디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철저하게 닫은 채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그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는 그 사실조차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쪽 눈 이식 수술을 마친 청년은 한동안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도 청년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애꾸눈으로 살아가느냐며 투정을 부렸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청년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계셨다지요.
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청년은 붕대를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붕대를 모두 풀고 앞을 본 순간 청년의 눈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앞에는 한쪽 눈만을 가진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네게 나의 장님 몸뚱이가 짐이 될 것 같아서...〃 어머니는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어머니는 오직 아들을 위해 무엇인들 아끼며, 무엇인들 주지 못할 것이 있겠는지요. 오직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이지요.
저 역시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이 시대를 앞서 가시던 우리 어머니가 말입니다. 졸업장이란 것은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없으셨지만 대학 출신 자녀들이 혀를 내둘러야만 했던 말솜씨와 지혜로운 생각들, 자녀들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어떠한 어려움도 해결하셨던 든든한 어머니셨습니다.
딸을 다섯이나 두셨던 우리 어머니, 딸들 모두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시며 김활란이나 임영신처럼 결혼하지 않고 멋지게 살라고 오히려 권유하셨던 우리 어머니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딸들이 교수도 되고, 목사도 되고, 목사 사모도 되고...
31살의 꽃다운 나이에 농사밖에는 모르셨던 아버지와 함께 4딸과 72세셨던 할머니를 모시고 이북에서 이남으로 그것도 걸어서 걸어서 피난을 오셨더랬지요. 아버지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머리에는 떡광주리를 이고 다니시거나 노점에서 장사를 하시면서도 딸들에게는 늘 세월이 바뀌고 있으니 여자라고 주눅들지 말라고 이르시던 우리 어머님이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어머니가 아주 그립습니다. 살아 계시다면 모시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보여드리며, 엄마처럼 살지 말고 멋지게 멋대로 살라하신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 당신의 딸들의 사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김활란처럼 임영신처럼 살지는 못해도, 지상천국이라고 하는 미국땅에서 헐벗은 이들을 돌보면서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잘한다고 하실까, 안스러워하실까...
아마도 우리 어머님은 ‘정말 잘하고 있구나!’ 칭찬을 해주실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머님은 익은 음식 남겨두는 것이 아니시라며 온 동네 나누어 주시는 것이 취미셨거든요. 때론 별거 아닌 음식을 나누어 주시느라 발이 부르트신 것을 본 적도 있답니다.
오늘도 우리 어머니처럼 부지런하고, 꾸준하고, 거짓없이, 열심히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말조심해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말은 꼭 해야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고,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 있고, 하나마나 한 말이 있으니 잘 가려서 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어머님의 은혜를 불러봅니다.
어머니(母, Mother, Mom)또는 어머님, 어미, 엄마, 모친(母親)은 자손을 출산한 여성을 자식의 관점에서 부르는 호칭이지요. 만약 부모가 이혼하고 남성이 새 배우자를 맞아들인 경우에는 '의붓어머니', '새엄마', '새어머니', '계모'(繼母) 등으로 불리구요.
유독 한국사회에서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욕심없이 순수한 존재, 숭고하며, 가족과 가정을 위해 헌신적이며, 희생적이라는 신성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따라서 여성을 잠재적인 어머니로 보는 시각들도 존재하나 이는 만들어진 시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계모라는 호칭은 한국에서 '악독하고 나쁜 새어머니'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모든 어머니가 자식과 남편에게 헌신적인 것은 아니고, 계모가 악독한 것은 아니지요.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관점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지요.
'어머님'은 친어머니나 계모가 아닌 나이 많은 일반 기혼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요즘 마켓이나 백화점 같은 곳에 가면 점원들이 흔히 ‘어머니’라고 잘도 부르지요. 물론 사모님이라고 높여 부르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저 어머니라고 불러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친구의 어머니를 부를 때도 공손하고 친절하게 어머니라고 부르지요. 우리 노숙자들 제 동생과 저보고 ‘마마’라고 부릅니다. 엄마라는 말이겠지요.
근대 이후 한국에서는 어머니를 모성애를 가진 숭고하고 신성한 존재로 각인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어머니 역할과 모성애를 일방적으로 강요해왔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192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페미니스트이자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인 나혜석, 박인덕, 김일엽, 허정숙 등은 어머니가 숭고한 존재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였다지요. 나혜석, 김일엽 등은 한국사회가 여성에게 어머니이기를 강요한다고 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답니다.
어린이날과 어머니날, 그리고 스승의 날 그래서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5월입니다. 따스한 봄 날씨와 더불어 따뜻하고 훈훈한 가족 나들이가 격에 맞는 5월입니다.
고국을 떠나 먼 이국땅에 사는 우리들 1세는 부모님을 함께 모시고 오신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1세들이 고국땅에 어머님을 홀로 두고 혹은 고국땅에 묻고 오신 분들도 많으시리라 여겨집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왠지 모르게 그리움이 샘물처럼 솟아나고, 지나간 추억이 주마등처럼 줄줄이 생각납니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방울이 떨어집니다.
요즘 엄마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이들을 앞세워 자기들의 욕심이나 욕구를 채워보려는 이들이 많지요. 본인들이 해보지 못한 것을 자식들을 통해 이루어보려고 애를 쓰지요. 그러기에 자격이나 자질 같은 것은 무시한 채 무조건 피아노 학원이나 미술학원에는 다녀야 하고, 일류 대학에는 꼭 합격을 해야 하고, 자녀들의 재능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사’자가 붙은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그뿐이 아니라 결혼도 부모에 마음에 먼저 들어야 하고, 사랑과 관계없이 환경과 조건을 따지는 데 열을 내지요. 그리고 자녀들이 혹 부모의 뜻을 거역하게 되면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원망과 책망은 물론 물리적으로 나무라는 일도 비일비재하지요.
그러나 요즘 젊은 며느리들은 시부모님들을 ‘웬수’ 라고 부른다지요. 시부모님들은 그들을 상전처럼 모셔야 하구요. 손자 손녀들을 만나고 싶어도 약속을 하지 않으면 만날 수조차 없는 그런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모두 경험하셨을 겁니다.
그런가 하면 가족의 순서에도 저만치 멀리 있습니다. 아이가 첫 번째, 남편이 두 번째, 강아지가 3번째, 시부모쯤이야 등수 밖으로 밀려나가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요.
혹시 보모님들이 재력이라도 있다면 몰라도 재력도 없는 시부모님들이야 찬밥도 아까워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들은 잊혀질 수는 없지요. 그리고 너무도 아름답고 숭고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좋은 글 중에서 뽑았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은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란 어머니가 가슴 졸이며 병원에 달려갔지만, 불행히도 청년은 이미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 마디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철저하게 닫은 채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그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는 그 사실조차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쪽 눈 이식 수술을 마친 청년은 한동안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도 청년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애꾸눈으로 살아가느냐며 투정을 부렸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청년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계셨다지요.
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청년은 붕대를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붕대를 모두 풀고 앞을 본 순간 청년의 눈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앞에는 한쪽 눈만을 가진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네게 나의 장님 몸뚱이가 짐이 될 것 같아서...〃 어머니는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어머니는 오직 아들을 위해 무엇인들 아끼며, 무엇인들 주지 못할 것이 있겠는지요. 오직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이지요.
저 역시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이 시대를 앞서 가시던 우리 어머니가 말입니다. 졸업장이란 것은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없으셨지만 대학 출신 자녀들이 혀를 내둘러야만 했던 말솜씨와 지혜로운 생각들, 자녀들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어떠한 어려움도 해결하셨던 든든한 어머니셨습니다.
딸을 다섯이나 두셨던 우리 어머니, 딸들 모두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시며 김활란이나 임영신처럼 결혼하지 않고 멋지게 살라고 오히려 권유하셨던 우리 어머니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딸들이 교수도 되고, 목사도 되고, 목사 사모도 되고...
31살의 꽃다운 나이에 농사밖에는 모르셨던 아버지와 함께 4딸과 72세셨던 할머니를 모시고 이북에서 이남으로 그것도 걸어서 걸어서 피난을 오셨더랬지요. 아버지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머리에는 떡광주리를 이고 다니시거나 노점에서 장사를 하시면서도 딸들에게는 늘 세월이 바뀌고 있으니 여자라고 주눅들지 말라고 이르시던 우리 어머님이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어머니가 아주 그립습니다. 살아 계시다면 모시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보여드리며, 엄마처럼 살지 말고 멋지게 멋대로 살라하신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 당신의 딸들의 사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김활란처럼 임영신처럼 살지는 못해도, 지상천국이라고 하는 미국땅에서 헐벗은 이들을 돌보면서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잘한다고 하실까, 안스러워하실까...
아마도 우리 어머님은 ‘정말 잘하고 있구나!’ 칭찬을 해주실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머님은 익은 음식 남겨두는 것이 아니시라며 온 동네 나누어 주시는 것이 취미셨거든요. 때론 별거 아닌 음식을 나누어 주시느라 발이 부르트신 것을 본 적도 있답니다.
오늘도 우리 어머니처럼 부지런하고, 꾸준하고, 거짓없이, 열심히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말조심해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말은 꼭 해야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고,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 있고, 하나마나 한 말이 있으니 잘 가려서 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어머님의 은혜를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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