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꿈 같은 증인'
[기고]5·18의 '꿈 같은 증인' 김용장은 '미 육군 군사정보관'이 아니었다.
입력 : 2019.06.02 16:15 수정 : 2019.06.02 16:5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602161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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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당시 광주에 미 문화원 원장이 남아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난 3개월동안 그가 줄곧 해왔던 미 국무성 직원이 광주에 없었다는 주장을 해명없이 뒤집는 순간이었다. 문화원(USIS)이 국무성 소속이라는 것을 미 정보부대에서 일한 김씨가 모를 리 없다.
석달간 김씨의 거짓 주장과 거짓 신분이 한국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은 받아쓰기만 열중한 언론 때문이었다. 특히 지난 3월 김씨를 최초 인터뷰한 JTBC ‘스포트라이트’의 5월16일 방송분은 김씨에게 없는 알리바이라도 만들어 줄 듯한 기세였다.
5월16일자 방송이 인터뷰한 80년 당시 주한 미대사관 무관이자 DIA 요원인 제임스 영은 김씨의 주장을 줄곧 부정했다. 김씨 주장과 달리 영은 광주 공군기지에 4명이 아닌, 2명의 요원이 있었고, 501 정보단이 전국에 11개가 아닌 약간(several)의 필드오피스(field office)를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영은 또한 항쟁 기간동안 501 부대가 기지 내에 한정돼 있었고, 몇몇 짧은 상황보고(Spot Report)만 보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적당히 얼버무린 자막과 내레이션만 좇다 보면 이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영이 김씨를 만난 적도 알지도 못했다고 말한 것을 확인한 나조차도, 16일자 방송만 보자면 영이 김씨를 안다고 했는지 모른다고 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얼토당토 않은 번역과 분석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스포트라이트’는 80년 5월8일자 DIA 문건을 비추며, 머리 기른 특전부대가 학생시위 진압에 동원된 정황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문은 특전대가 한 대학 근처에 배치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살 명령부터 편의대까지 김씨의 위증은 ‘5·18은 전두환 집권을 위한 신군부의 완벽한 시나리오’라는 보안사 상사 허씨의 주장에 완전히 부합한다. 이 주장대로라면, 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불과 수백명의 전두환 편의대의 선동에 휘둘려 방송국을 불 지르고, 무기고를 습격하고, 편의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뒤쫓아 관공서나 점거한 한 무리의 몰지각한 군중에 불과했다. 이런 류의 주장은 지만원이 주장하는 북한군 침투설의 뒤틀린 거울상에 불과하다. 항쟁이 600명 북한 특수부대가 벌인 게릴라전에 ‘광주인’들이 부화뇌동한 사건이라는 왜곡이나, 5·18을 사전 시나리오라고 보는 시각 모두 80년 5월 닷새 동안 계엄군의 폭력과 싸우고, 또 다른 닷새 동안 평화로운 공동체를 일구며 버틴 광주시민의 자발성과 양립할 수 없다.
내년이면 광주 항쟁 40주년. 수많은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증인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증언과 증거들은 쇠락해 간다. 더 이상 검증 없는 주장과 거짓에 5·18 진상규명의 초점이 흐려져서는 안될 것이다.
입력 : 2019.06.02 16:15 수정 : 2019.06.02 16:5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602161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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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당시 광주에 미 문화원 원장이 남아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난 3개월동안 그가 줄곧 해왔던 미 국무성 직원이 광주에 없었다는 주장을 해명없이 뒤집는 순간이었다. 문화원(USIS)이 국무성 소속이라는 것을 미 정보부대에서 일한 김씨가 모를 리 없다.
석달간 김씨의 거짓 주장과 거짓 신분이 한국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은 받아쓰기만 열중한 언론 때문이었다. 특히 지난 3월 김씨를 최초 인터뷰한 JTBC ‘스포트라이트’의 5월16일 방송분은 김씨에게 없는 알리바이라도 만들어 줄 듯한 기세였다.
5월16일자 방송이 인터뷰한 80년 당시 주한 미대사관 무관이자 DIA 요원인 제임스 영은 김씨의 주장을 줄곧 부정했다. 김씨 주장과 달리 영은 광주 공군기지에 4명이 아닌, 2명의 요원이 있었고, 501 정보단이 전국에 11개가 아닌 약간(several)의 필드오피스(field office)를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영은 또한 항쟁 기간동안 501 부대가 기지 내에 한정돼 있었고, 몇몇 짧은 상황보고(Spot Report)만 보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적당히 얼버무린 자막과 내레이션만 좇다 보면 이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영이 김씨를 만난 적도 알지도 못했다고 말한 것을 확인한 나조차도, 16일자 방송만 보자면 영이 김씨를 안다고 했는지 모른다고 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얼토당토 않은 번역과 분석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스포트라이트’는 80년 5월8일자 DIA 문건을 비추며, 머리 기른 특전부대가 학생시위 진압에 동원된 정황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문은 특전대가 한 대학 근처에 배치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살 명령부터 편의대까지 김씨의 위증은 ‘5·18은 전두환 집권을 위한 신군부의 완벽한 시나리오’라는 보안사 상사 허씨의 주장에 완전히 부합한다. 이 주장대로라면, 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불과 수백명의 전두환 편의대의 선동에 휘둘려 방송국을 불 지르고, 무기고를 습격하고, 편의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뒤쫓아 관공서나 점거한 한 무리의 몰지각한 군중에 불과했다. 이런 류의 주장은 지만원이 주장하는 북한군 침투설의 뒤틀린 거울상에 불과하다. 항쟁이 600명 북한 특수부대가 벌인 게릴라전에 ‘광주인’들이 부화뇌동한 사건이라는 왜곡이나, 5·18을 사전 시나리오라고 보는 시각 모두 80년 5월 닷새 동안 계엄군의 폭력과 싸우고, 또 다른 닷새 동안 평화로운 공동체를 일구며 버틴 광주시민의 자발성과 양립할 수 없다.
내년이면 광주 항쟁 40주년. 수많은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증인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증언과 증거들은 쇠락해 간다. 더 이상 검증 없는 주장과 거짓에 5·18 진상규명의 초점이 흐려져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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