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은,,,,,[2]
김형욱은 어떻게 실종되었는가?
김형욱은 1979년 10월 1일 에어 프랑스 편으로 미국에서 프랑스로 갔다. 그리고 곧바로 파리 시내에 있는 리츠 호텔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6일간 머물렀다. 리츠 호텔은 세계적인 부호나 유명 배우들이 이용하는 최고급 호텔이었다. 그런데 10월 7일 김형욱은 갑자기 프랑스에서는 이류 호텔인 웨스트엔드 호텔 405호로 짐을 옮겼다. 실종 당일 예약도 하지 않고 웨스트엔드 호텔로 옮긴 것이다. 웨스트엔드 호텔은 리츠 호텔과 비교하면 내부 시설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호 문제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곳이었다. 김형욱이 실종된 것은 바로 이날이었다. 방을 예약하고 나간 김형욱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당시 파리 경찰청의 수사 결과에서는 ‘김형욱은 호텔에서 나와 카지노인 르 그랑 세르클에 나타나서 저녁 7시까지 도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김형욱의 행적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파리 경찰청에서는 곧바로 수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당시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주섭일은 당시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파리 경찰청에 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카르타 콜미스에 형사부장이 본부장을 맡고 있엇는데, 요즘 말로 영양가 있는 뉴스가 없어요. 그냥 수사 중이라고만 했어요. 그리고 시체 발견 신고가 들어오면 동양인인지 아닌지, 그것이 김형욱 씨인지 아닌지, 그런 것들을 확인하는 중이라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파리에서 가장 번화한 샹젤리제 대로에 위치한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는 과거나 지금이나 아랍 제국의 왕자나 부호들이 와서 게임을 즐기는 안전한 곳이다. 결국 파리 경찰청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고 수사를 종결했다.
당시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박중길은 “웨스트엔드 호텔은 한국대사관에서, 서울서 오는 VIP가 못 되는 정도의 사람들을 투숙시키는 호텔이었습니다. 이류 정도 되는 호텔인데요. 거기에 김형욱 씨가 투숙했다는 것은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리츠 호텔에서는 사람을 납치하거나 할 수가 없거든요. 웨스트엔드 호텔 같은 경우에는 수위도 없는 데라서 사람들 데리고 나오고 하는 게 쉽습니다”라고 말했다.
웨스트엔드 호텔은 한국대사관이 주로 이용하던 곳이다. 이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의혹은 수사 과정에도 있었다. 파리 경찰청의 담당 형사는 한국인 기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현장에 있던 박중길은 “카르타라는 형사에게 김형욱 씨 사건을 아느냐고 물으니까, 접수를 받아서 자신이 담당하고 있대요. 그래서 자세히 물어보니까 ‘왜 나한테 와서 묻지요? 당신네 공관에 아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라고 하더군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에 사건 담당 형사를 취재한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주섭일은 “그 형사가 ‘파리는 지나가는 길목이었을 뿐이지 사실상 사건의 핵심 지역은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인 특파원들이 여러 가지로 김형욱 씨에 대해서는 더 잘 아는 거 아니냐?’ 이런 반문을 했었습니다.”
누가 김형욱을 살해했을까?
1981년 1월『르 몽드』에는 김형욱 실종 사건이 서울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계획된 제거 공작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마취된 김형욱은 대한항공의 화물칸에 실려 세관을 통과했으며, 청와대 지하실로 인도된 김형욱에게 박정희가 권총으로 두 발을 쏘았다는 것이다. 당시 기사의 근거에 대해서 르 몽드 편집국장 에르와 플라넬은 “기사를 작성했던 기자들은 거의 퇴직해서 어떻게 작성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당시 국제 면의 아시아 담당 기자가 망명자들과 접촉해 정보를 얻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한 당시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주섭일은 르 몽드가 어느 정도 이 문제를 확인하고 썼다는 생각에 앙드렝 퐁탱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해서 근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서 다뤘다는 식으로 답변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같은 내용의 기사는 일본 신문과 잡지에도 소개됐다. 일본 잡지『문예춘추』에는「오작교 작전, 김형욱은 박 대통령에게 사살되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의 내용은 르 몽드보다도 더 자세했다. 파리에 있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유포되어 있는 내용의 사본을 입수해서 기사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오작교 작전은 해외로 망명한 유력 인사들의 반국가적 활동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고, 김형욱은 KCIA의 아지트에서 마취되어 대한항공 화물 편으로 운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마구 소리를 지르는 김형욱을 1미터의 근거리에서 사살했다’는 내용이다. 날짜와 장소, 관련자 이름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취재 기자는 “최종적인 확인은 할 수 없지만 90퍼센트 이상 맞다는 확신이 없으면 기사를 쓸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기사를 썼던 기자는 끝내 그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한편 미국으로 망명한 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준모는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중앙정보부에서 김형욱 암살 팀에 있었던 한 사람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말했다. “이름은 밝힐 수 없습니다만 해병대 출신이었어요. 김대중 납치 사건 때에 상황장교도 지냈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사람이 암살조를 조직해서 훈련을 시켰던 훈련 대장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는 위에서 중지 명령이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웬일이냐고 물으니, 부장이 사진을 던져주면서 보라고 했대요. 보니까 김형욱이 꽁꽁 묶여 있는데 누가 이마에 권총을 대고 있고, 그 다음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진을 봤다 이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끝났어, 상황 끝! 비디오 한번 볼래?’ 하더래요. 그래서 비디오를 봤는데 김형욱이 묶인 채로 ‘야! 이 강아지야, 죽여라’ 하니까 김○○ 공군 대위가 부장을 향해 쏘고, 욱하고 쓰러지더랍니다. 틀림없냐고 하니까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만두고 나왔는데…’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은 방준모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또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1979년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송진섭은 10·26 궁정동 안가 총격 사건 직후 교도소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의전 과장이던 박선호를 만나 사건의 내막을 들었다고 한다. 바깥에서는 지금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돼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말들이 생기고 있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생긴 거내고 묻자 박선호 과장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중앙정보부 내에 과거 김대중 씨를 일본에서 납치해 왔던 바로 해외 특수 작전단에서 해치운 일”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방준모와 박선호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김형욱 실종 사건에 가담한 부서는 중앙정보부이며, 파리 가까운 곳에서 김형욱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박중길은 그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더 많을 겁니다. 그 몇 년 전에 만나보았는데 김형욱은 체구가 작아요. 조그만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잃었으면 저항할 능력도 없었을 겁니다.”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이 만난 한 일본인 기자도 김형욱이 해외에서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김형욱의 시체를 비행기 화물칸에 실어 한국으로 들여왔다는 것이다.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기자는 “살해된 곳은 제네바 근교이고, 자동차로 파리로 옮긴 후 특별기 편으로 서울로 옮겼다. 특별기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가 넘은 한밤중이었다고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 말을 누구한테 들었냐고 물으니 그 기자는 “그것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사건의 관련자다. 일단은 제네바에 묻었다고 들었다. 그 후 그곳에 방치하면 문제가 생기리라 예상해 차량으로 시체를 다시 파리로 옮기고 항공편 외교 화물로 가장했다. 그래야 세관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체만을 싣고 서울로 옮겼다고 들었다”고 했다. 또 그 관련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했다. 아직도 그러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일본인 기자는 자신의 취재 내용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한편 김형욱을 비행기 편으로 서울로 데려왔다는 주장은 오작교 작전 내용과 경향신문 대기자 문명자의 자서전에서도 보인다. 일본인 기자의 주장과 다른 점은 서울에 와서 살해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백악관 출입 기자인 문명자는 “그것은 차지철이 했다고 그럽디다. 박정희가 차지철한테 이야기해서 김형욱을 대령했습니다. 김형욱은 ‘살려주십시오’ 하고 살살 빌었다는 거예요. 아마도 그때 저 세상에 간 것 같아요”라고 증언했다.
여기서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은 과연 영하 50도가 넘는 비행기 화물칸에 사람을 싣고 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당시 대한항공 파리 지사에 근무했던 김도업의 증언으로 증명됐다. “가능합니다. 그 당시 대한항공의 경우 3분의 2는 여객 좌석을 놓고, 3분의 1은 화물칸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벨리의 짐칸에 들어가지 않고 여객의 화물칸에 실려 갔다면 공수가 가능했다고 봅니다.”
진실을 알고 있는 핵심 인물은 누구인가?
지금 김형욱 실종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당시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박중길은 김형욱이 죽기 며칠 전에 갔던 개선문 근처 카지노의 지배인에게 그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자 지배인이 화를 내면서 “당신네들이 뭘 알려고 하느냐? 우리는 미스터 김을 모른다. 미스터 김하고 같이 왔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혼자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웨스트엔드 호텔 주인도 그가 혼자 오지 않고 함께 온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중요한 진술이다.
취재 결과, 사건의 핵심에 있는 한 사람으로 김형욱과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중앙정보부 파리 책임자인 이상렬 공사를 주목할 수 있다. 박중길 역시 사건 진실의 중앙에 그가 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당시 파리 대사관에 근무했는데,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이던 시절에 그의 부하였어요. 파리에서 김형욱을 안내하고, 카지노에 가거나 술 마시러 갈 때 같이 가고, 또 돈도 빌려주었죠. 그 사람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았더니 이미 파리를 떠나고 없었어요.”
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던 방준모는 프랑스 주재 한국 공사 이상렬에게 이제 진실을 밝히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 사람에게 그러지 말고 어디다가 파묻었는지 아는 대로만 얘기해다오.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썼어요. 그때가 이란에 있을 땐가 그래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적 없다, 방 선배 미쳤소? 왜 생사람 잡으려고 그러오? 나 같으면 동료 입장에서 그렇게 얘기할 거예요.”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은 당시의 프랑스 주재 공사였던 이상렬과 3개월 간 접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일까? 2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종 이후 김형욱은 박정희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처벌하기 위해 급조한 반국가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공작이 자행되던 시대, 어쩌면 김형욱의 실종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지 모른다.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는 길
최근 김형욱 실종 사건에 관한 기사가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파리 외곽 양계장에서 살해되었다는 보도와 함께, 김형욱을 직접 살해했다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한편에서는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사실이 아니라는 반박 보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정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그동안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프로그램에서 밝혀진 사실과 유사한 내용의 사건 전말을 발표했다. 결국 우리는 김형욱 실종 사건이 당시 박정희 정권의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사건은 부패한 권력이 어떻게 권력을 유지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정권들이 사건의 실체를 속속들이 밝히지 않는 이유는, 비슷한 방식이 계속 활용됐고 당사자들이 계속 권력의 일부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40여년 동안 김형욱 실종 사건은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 이후 계속되는 군부 세력이 결코 공작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진실을 밝혀내 더 이상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이다.
김형욱은 1979년 10월 1일 에어 프랑스 편으로 미국에서 프랑스로 갔다. 그리고 곧바로 파리 시내에 있는 리츠 호텔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6일간 머물렀다. 리츠 호텔은 세계적인 부호나 유명 배우들이 이용하는 최고급 호텔이었다. 그런데 10월 7일 김형욱은 갑자기 프랑스에서는 이류 호텔인 웨스트엔드 호텔 405호로 짐을 옮겼다. 실종 당일 예약도 하지 않고 웨스트엔드 호텔로 옮긴 것이다. 웨스트엔드 호텔은 리츠 호텔과 비교하면 내부 시설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호 문제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곳이었다. 김형욱이 실종된 것은 바로 이날이었다. 방을 예약하고 나간 김형욱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당시 파리 경찰청의 수사 결과에서는 ‘김형욱은 호텔에서 나와 카지노인 르 그랑 세르클에 나타나서 저녁 7시까지 도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김형욱의 행적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파리 경찰청에서는 곧바로 수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당시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주섭일은 당시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파리 경찰청에 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카르타 콜미스에 형사부장이 본부장을 맡고 있엇는데, 요즘 말로 영양가 있는 뉴스가 없어요. 그냥 수사 중이라고만 했어요. 그리고 시체 발견 신고가 들어오면 동양인인지 아닌지, 그것이 김형욱 씨인지 아닌지, 그런 것들을 확인하는 중이라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파리에서 가장 번화한 샹젤리제 대로에 위치한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는 과거나 지금이나 아랍 제국의 왕자나 부호들이 와서 게임을 즐기는 안전한 곳이다. 결국 파리 경찰청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고 수사를 종결했다.
당시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박중길은 “웨스트엔드 호텔은 한국대사관에서, 서울서 오는 VIP가 못 되는 정도의 사람들을 투숙시키는 호텔이었습니다. 이류 정도 되는 호텔인데요. 거기에 김형욱 씨가 투숙했다는 것은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리츠 호텔에서는 사람을 납치하거나 할 수가 없거든요. 웨스트엔드 호텔 같은 경우에는 수위도 없는 데라서 사람들 데리고 나오고 하는 게 쉽습니다”라고 말했다.
웨스트엔드 호텔은 한국대사관이 주로 이용하던 곳이다. 이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의혹은 수사 과정에도 있었다. 파리 경찰청의 담당 형사는 한국인 기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현장에 있던 박중길은 “카르타라는 형사에게 김형욱 씨 사건을 아느냐고 물으니까, 접수를 받아서 자신이 담당하고 있대요. 그래서 자세히 물어보니까 ‘왜 나한테 와서 묻지요? 당신네 공관에 아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라고 하더군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에 사건 담당 형사를 취재한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주섭일은 “그 형사가 ‘파리는 지나가는 길목이었을 뿐이지 사실상 사건의 핵심 지역은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인 특파원들이 여러 가지로 김형욱 씨에 대해서는 더 잘 아는 거 아니냐?’ 이런 반문을 했었습니다.”
누가 김형욱을 살해했을까?
1981년 1월『르 몽드』에는 김형욱 실종 사건이 서울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계획된 제거 공작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마취된 김형욱은 대한항공의 화물칸에 실려 세관을 통과했으며, 청와대 지하실로 인도된 김형욱에게 박정희가 권총으로 두 발을 쏘았다는 것이다. 당시 기사의 근거에 대해서 르 몽드 편집국장 에르와 플라넬은 “기사를 작성했던 기자들은 거의 퇴직해서 어떻게 작성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당시 국제 면의 아시아 담당 기자가 망명자들과 접촉해 정보를 얻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한 당시 중앙일보 파리 특파원 주섭일은 르 몽드가 어느 정도 이 문제를 확인하고 썼다는 생각에 앙드렝 퐁탱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해서 근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서 다뤘다는 식으로 답변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같은 내용의 기사는 일본 신문과 잡지에도 소개됐다. 일본 잡지『문예춘추』에는「오작교 작전, 김형욱은 박 대통령에게 사살되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의 내용은 르 몽드보다도 더 자세했다. 파리에 있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유포되어 있는 내용의 사본을 입수해서 기사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오작교 작전은 해외로 망명한 유력 인사들의 반국가적 활동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고, 김형욱은 KCIA의 아지트에서 마취되어 대한항공 화물 편으로 운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마구 소리를 지르는 김형욱을 1미터의 근거리에서 사살했다’는 내용이다. 날짜와 장소, 관련자 이름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취재 기자는 “최종적인 확인은 할 수 없지만 90퍼센트 이상 맞다는 확신이 없으면 기사를 쓸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기사를 썼던 기자는 끝내 그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한편 미국으로 망명한 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준모는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중앙정보부에서 김형욱 암살 팀에 있었던 한 사람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말했다. “이름은 밝힐 수 없습니다만 해병대 출신이었어요. 김대중 납치 사건 때에 상황장교도 지냈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사람이 암살조를 조직해서 훈련을 시켰던 훈련 대장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는 위에서 중지 명령이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웬일이냐고 물으니, 부장이 사진을 던져주면서 보라고 했대요. 보니까 김형욱이 꽁꽁 묶여 있는데 누가 이마에 권총을 대고 있고, 그 다음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진을 봤다 이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끝났어, 상황 끝! 비디오 한번 볼래?’ 하더래요. 그래서 비디오를 봤는데 김형욱이 묶인 채로 ‘야! 이 강아지야, 죽여라’ 하니까 김○○ 공군 대위가 부장을 향해 쏘고, 욱하고 쓰러지더랍니다. 틀림없냐고 하니까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만두고 나왔는데…’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은 방준모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또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1979년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송진섭은 10·26 궁정동 안가 총격 사건 직후 교도소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의전 과장이던 박선호를 만나 사건의 내막을 들었다고 한다. 바깥에서는 지금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돼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말들이 생기고 있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생긴 거내고 묻자 박선호 과장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중앙정보부 내에 과거 김대중 씨를 일본에서 납치해 왔던 바로 해외 특수 작전단에서 해치운 일”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방준모와 박선호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김형욱 실종 사건에 가담한 부서는 중앙정보부이며, 파리 가까운 곳에서 김형욱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박중길은 그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더 많을 겁니다. 그 몇 년 전에 만나보았는데 김형욱은 체구가 작아요. 조그만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잃었으면 저항할 능력도 없었을 겁니다.”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이 만난 한 일본인 기자도 김형욱이 해외에서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김형욱의 시체를 비행기 화물칸에 실어 한국으로 들여왔다는 것이다.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기자는 “살해된 곳은 제네바 근교이고, 자동차로 파리로 옮긴 후 특별기 편으로 서울로 옮겼다. 특별기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가 넘은 한밤중이었다고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 말을 누구한테 들었냐고 물으니 그 기자는 “그것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사건의 관련자다. 일단은 제네바에 묻었다고 들었다. 그 후 그곳에 방치하면 문제가 생기리라 예상해 차량으로 시체를 다시 파리로 옮기고 항공편 외교 화물로 가장했다. 그래야 세관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체만을 싣고 서울로 옮겼다고 들었다”고 했다. 또 그 관련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했다. 아직도 그러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일본인 기자는 자신의 취재 내용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한편 김형욱을 비행기 편으로 서울로 데려왔다는 주장은 오작교 작전 내용과 경향신문 대기자 문명자의 자서전에서도 보인다. 일본인 기자의 주장과 다른 점은 서울에 와서 살해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백악관 출입 기자인 문명자는 “그것은 차지철이 했다고 그럽디다. 박정희가 차지철한테 이야기해서 김형욱을 대령했습니다. 김형욱은 ‘살려주십시오’ 하고 살살 빌었다는 거예요. 아마도 그때 저 세상에 간 것 같아요”라고 증언했다.
여기서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은 과연 영하 50도가 넘는 비행기 화물칸에 사람을 싣고 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당시 대한항공 파리 지사에 근무했던 김도업의 증언으로 증명됐다. “가능합니다. 그 당시 대한항공의 경우 3분의 2는 여객 좌석을 놓고, 3분의 1은 화물칸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벨리의 짐칸에 들어가지 않고 여객의 화물칸에 실려 갔다면 공수가 가능했다고 봅니다.”
진실을 알고 있는 핵심 인물은 누구인가?
지금 김형욱 실종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당시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박중길은 김형욱이 죽기 며칠 전에 갔던 개선문 근처 카지노의 지배인에게 그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자 지배인이 화를 내면서 “당신네들이 뭘 알려고 하느냐? 우리는 미스터 김을 모른다. 미스터 김하고 같이 왔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혼자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웨스트엔드 호텔 주인도 그가 혼자 오지 않고 함께 온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중요한 진술이다.
취재 결과, 사건의 핵심에 있는 한 사람으로 김형욱과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중앙정보부 파리 책임자인 이상렬 공사를 주목할 수 있다. 박중길 역시 사건 진실의 중앙에 그가 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당시 파리 대사관에 근무했는데,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이던 시절에 그의 부하였어요. 파리에서 김형욱을 안내하고, 카지노에 가거나 술 마시러 갈 때 같이 가고, 또 돈도 빌려주었죠. 그 사람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았더니 이미 파리를 떠나고 없었어요.”
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던 방준모는 프랑스 주재 한국 공사 이상렬에게 이제 진실을 밝히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 사람에게 그러지 말고 어디다가 파묻었는지 아는 대로만 얘기해다오.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썼어요. 그때가 이란에 있을 땐가 그래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적 없다, 방 선배 미쳤소? 왜 생사람 잡으려고 그러오? 나 같으면 동료 입장에서 그렇게 얘기할 거예요.”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제작·취재진은 당시의 프랑스 주재 공사였던 이상렬과 3개월 간 접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일까? 2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종 이후 김형욱은 박정희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처벌하기 위해 급조한 반국가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공작이 자행되던 시대, 어쩌면 김형욱의 실종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지 모른다.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는 길
최근 김형욱 실종 사건에 관한 기사가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파리 외곽 양계장에서 살해되었다는 보도와 함께, 김형욱을 직접 살해했다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한편에서는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사실이 아니라는 반박 보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정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그동안 MBC-TV『이제는 말할 수 있다』프로그램에서 밝혀진 사실과 유사한 내용의 사건 전말을 발표했다. 결국 우리는 김형욱 실종 사건이 당시 박정희 정권의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사건은 부패한 권력이 어떻게 권력을 유지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정권들이 사건의 실체를 속속들이 밝히지 않는 이유는, 비슷한 방식이 계속 활용됐고 당사자들이 계속 권력의 일부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40여년 동안 김형욱 실종 사건은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 이후 계속되는 군부 세력이 결코 공작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진실을 밝혀내 더 이상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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