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회] 야만적인 살인행위 ‘사법암흑의 날’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만들고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1인 전제의 강압통치를 하는 동안 가장 큰 걸림돌은 학생들이었다. 한일 굴욕회담을 강행하면서 학생들의 시위로 위기국면에 빠지기도 했던 박정희는 정권안보를 위해서는 야당이나 재야, 종교세력도 걸림돌이기는 했지만 학생들처럼 ‘두려운’ 존재는 없었다. 


그래서 긴급조치 4호를 통해 반체제적인 학생들과 이들의 배후라고 판단한 교수, 종교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것이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조작이었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라는 공안사건을 통해 학생들에게 겁을 주고, 학생시위가 북한측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국민에게 선전하여 이를 탄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인혁당 연루자들은 수사기관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사실은 긴급조치의 언론통제로 국내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못했다. 다만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 같은 외국 종교인들이 외신이나 기도회 같은 곳에서 폭로했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은 강제 추방당했다.


1975년 4월 8일 오전 대법정에서 개정된 민청학련 인혁당 관련사건 피고들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공판. ⓒ연합뉴스


사건의 조작설과 연루자들에 대한 고문사실이 알려지면서 내외의 거센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박정권은 아랑곳없이 고등군재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연루 피고인 36명에 대해 원심대로의 형을 선고했는데, 도예종ㆍ서도원ㆍ하재완ㆍ이수병ㆍ김용원ㆍ우홍선ㆍ송상진ㆍ여정남 등 8명에게는 사형이 확정되었다. 1975년 4월 8일의 일이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날 이들 8명에 대한 전격적으로 사형집행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재심이나 탄원을 시도해 볼 여유도 없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의는 인혁당 사건의 최종판결이 난 4월 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으며,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에서는 야만적인 살인행위라고 박정희 정부의 처사를 비난했다.


인혁당 연루자들은 심한 고문으로 죽은 후에도 시신이 온전하게 가족에게 인수되지 못했다. 당국이 고문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워 유족의 동의 없이 화장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사건의 진실에 자신이 없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1975년 4월 8일 새벽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사법살인' 당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하재완(무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송상진(양봉업), 우홍선(무직), 여정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서대문형수모 사형장. ⓒ권우성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현실 고발’ 이란 성명 중 시체와 관련되는 내용이다.


4월 9일과 10일, 서대문구치소 앞의 정경은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우홍선씨의 시체와 이수병씨의 시체는 가족들이 정식으로 인수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집이 서울이 아니라 바로 인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사제들은 생각 끝에 시체를 성모병원에 옮기려 했으나 시체실이 만원이라 다시 함세웅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는 응암동 성당에 안치시키려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들 시체들은 집이 있는 지역의 시립병원으로 보내기로 했다 했습니다. 가족들은 서울에 있고 그나마 미사라도 드리고 장례를 치르고 싶은 가족들의 소원, 우리들의 인도적 책임, 이런 모든 것들을 감안하여 가족과 사제단이 함께 응암동 성당으로 옮기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시체들은 다 뺏겨버리고, 놓쳐버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송상진씨의 시체를 응암동 성당으로 인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녹번동 3거리에서 3~4백 명의 경찰의 저지를 받았습니다. 그때 우리 쪽은 20~30명의 가족, 여인네들과 몇 명 신부들이 있었고 몇 명의 목사가 있었습니다. 시체를 태운 차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우리들 신부들은 차바퀴 속으로 들어가 차가 움직이는 것을 방해했지만 끝내 크레인까지 동원, 벽제에 있는 화장터로 그 시체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가족들조차 화장되는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보지도 못했습니다. 가족 등 아무도 확인하지 못한 시체가 바로 송상진씨의 시체입니다. 아무튼 이 실랑이 통에 김택암 신부는 다시 허리를 다쳤고, 미사까지 드리지 못하게 하는 당국의 천인무도한 만행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통곡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례식 방해죄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이렇게 법을 어기면서 폭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9시 김택암 신부는 괴한들에 의해 연행, 중앙정보부에 밤샘 조사를 받았고, 우홍선씨의 집에 가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응암동 성당에 돌아왔던 함세웅 신부는 11시경 또 연행되어갔습니다. 왜 장례식마저 못 치르게 합니까? 왜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가족들과 피고인들의 하소연은 아랑곳 않고, 또 재심을 청구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습니까. 그렇게 죽이는 데 성급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가족들의 비통함에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으며, 넋이 나간 표정에 눈문이 저절로 쏟아집니다. 정말 인간이 하는 일에 인간다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이들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이 2007년 1월 23일 오전 무죄를 선고하자 유가족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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