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서방의 횡설수설(책에서 풀내음)
-
책에서 풀내음을 느껴보셨나요?
90년대 초 이민생활 5~6년이 지나 생활이 조금 안정되자 두고 온 서울의 하늘이
마냥 눈에 어른거리기 시작하더니 무시로 흘러간 시간에 묻히던 때가 있었다.
.
그 때의 나의 일상이란, 해가 뜨면 직장으로 해가 지면 둥지 찾는 새들같이 집으로 달려와
아이들이 학교에는 잘 갔다 왔는지 보고 저녁 먹고 그리고 바로 집 사람 pick up 해 오는 게 주 된 일과였다.
.
그리곤 혼자서 다리 피고 쉬면서 당시는 한국 체널이 하나 뿐인 TV였지만
반갑게 서울 소식을 듣고 보다가는 잠자리에 들곤 하였었다.
.
어떤 땐 TV에 나오는 태극기를 보고
혼자서 눈시울을 찔끔 그리기도 하는 우스꽝스런 짓도 스스럼없이 하면서...
.
이런 늘 같은 하루하루가 거듭되자
서서히 가슴 한쪽이 빈 것 같더니 나중엔 정말 일상이 식상하기 시작하였다.
.
우매한 중생이란 걱정을 만들어 걱정을 한다고 하더니...
아무 걱정이 없으니 새 걱정꺼리를 만드는 걱정을 하고 있으니..
.
뭐야 이게, 이렇게 살려고 미국에 왔나?
이렇게 살다 점점 나이가 들면 나중엔 나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이렇게 살다 가야 한단 말인가? 밑도 끝도 없는 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었다.
.
그러다 하루는 일을 나가다가 우연히 L.A. Olympic과 Vermont 만나는 곳에
조그만 Mall 2층에 책대여 집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래 책이나 빌려다 보자하고는 시작한 게 약 2년여가 흘렀다.
.
그런데 어떤 땐 기분 좋게 책을 피고 몇 줄 읽다보면
이상하게 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글체나 문장이라
다음 날 책 집에 가서 대여 장부를 확인 해보면 몇 달 전에 본 것이었다.
.
이렇게 읽은 책들이 그 집 한 쪽 벽 서가에 꽃인 문학 분야의 책은
다 읽게 되었는데 여기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
일반적으로 한 번 읽은 책은 별로 다시 읽고 싶지 않은 법인데
어떤 책은 전혀 그런 걸 느끼지 못 했다.
그건 어떤 스님의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서 산사(山寺)의 풋풋한 풀내음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러다 이 스님 저 스님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석용산 스님의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지?”와 “댓 그늘 한 줌 묻혀가렴!”의 1,2부는
정말 나의 지나온 삶을 진지하게 반추케 하는 책이었다.
.
그런데 바로 이 책, “텅 빈 충만”이란 법정 스님의 글은 너무 좋아 몇 번을 빌려 읽다가
나중엔 아예 새 책 한 권을 사서 옆에 두고 마음이 울적하면 읽고 또 읽게 되었는데
종내는 이 책이 나의 삶이 흔들릴 때마다 잡아주는 인생 지침서가 되었다.
.
이 책의 표지엔 한 스님 (법정)이 텅 빈 방에 앉아 명상에 들어간 듯 하는 사진이 실려 있다.
그 방엔 스님이 깔고 앉은 방석 이왼 기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냥 빈방이었다.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이 세상(世)의 소리(音)를 눈(법안)으로 본다(觀)는데
나는 이 책에서 “풀내음”을 코로 맡을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 그렇게 느꼈었다.
.
이래서 난 이 책에서
“삿된 마음 줄이고 현실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최선을 다 하자!”는 귀한 가르침을 얻었다.
어찌하여 빈 방에서 명상을 하는데
“텅 빈 충만(充滿)” 이란 말이 나올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