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역사 인식, 상당히 잘못돼 있다
박근혜 역사 인식, 상당히 잘못돼 있다"
프레시안 : 경제 발전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할도 논란거리였다.
서중석 : 한국 현대사의 역동성, 국내외적인 환경 등을 제외하고 경제 발전 문제를 설명할 수는 없다. 박정희는 굉장한 행운아라고 본다. 현대사의 중추를 차지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18년을 지배하지 않았나. 4월혁명으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가 새롭게 도약하는 국내적 조건이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자본주의가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를 맞이한 때 아닌가. 한일회담에서 얻은 성과와 월남 파병으로 얻은 대가 등을 경제에 투입할 수 있었던 건, 그때 누가 대통령을 했더라도 그 시기에 했을 것이라고 본다. 한일회담 타결과 월남 파병은 한국이 분단 체제로 있던 속에서 하게끔 돼 있었다.
프레시안 : 대선이 코앞이다. (경선) 후보들의 역사 인식, 어떻게 보나.
서중석 : 문재인, 김두관 (경선) 후보의 역사 인식은 대체로 무난한 것 같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의 역사 인식과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선 5.16을 '구국의 결단',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는 건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다. 아버지한테 너무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5.16정권이 선전한 것 중 가장 큰 게 '장면 정권은 혼란에 빠졌고, 그런 혼란과 좌경화의 위험 속에서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4월혁명 후 그렇게 많은 데모와 진상 규명 요구가 있었던 것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승만 정권 때 보도연맹 사건 등 규모가 큰 집단 학살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경찰 등의 억압적 조치 때문에 민(民)들이 아주 고통스럽게 살았다. 한마디로 억눌리고 왜곡된 것들의 진상이 규명돼야 할 부분들이 많았고, 자기 권리를 주장해야 할 부분도 많이 있었다. 4월혁명 이후 이런 것들이 터진 건 자연스러운 일로 봐야 한다. 혼란이라고 이야기할 게 아니다. 우리 역사가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것을 거치면서 성숙해진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그 고통을 감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혼란 문제만 해도, 장면 정권이 들어선 1960년 8월 23일 이후 점점 약화된다. 데모도 많이 줄어든다. 통계로도 나타난다. 1961년에 와서는 '어째서인지 데모가 안 보인다'는 기사가 신문에 날 정도였다. 5.16쿠데타 세력은 4.19 (1주년) 때 데모로 사회가 혼란해지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그래서 부추기기까지 했는데, 그런 데모가 안 일어났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내부를 정리해가고 혼란도 약화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장면 정권 출범 때부터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해방이라고도 볼 수 있다. 폭넓게 자유를 획득했고, 통일운동과 노동운동도 활발했다. 법치주의가 자리 잡으려 한 게 장면 정권 때다. 이승만 정권 때는 무법과 탈법의 시대였다. 또한 장면 정권은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했다. 경제 건설은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모토였다. 이렇게 한국 사회가 크게 변모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5.16쿠데타 후 박정희 정권은 경제 제일주의를 승계했지만, 다른 부문에서는 4월혁명 정신에 역행하고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바를 가로막았다. 그런 의미에서도 '5.16=구국의 결단'으로 보는 건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프레시안 :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딸에게 과도하게 묻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서중석 : '박근혜에게 유신 체제 책임을 묻는 건 연좌제 아니냐'고 보는 이도 있는데, 그건 참 잘못된 인식이다. 박근혜는 유신 체제에서 1974년 8.15 (육영수 피격 사망)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유신 체제를 이끌어가는 데 큰 기둥 역할을 한 것이다. 퍼스트레이디는 허깨비가 아니다. 박근혜의 행동과 발언은 유신 후기에 무게 있게 영향을 줬다.
그리고 정수장학회만 하더라도, 5.16세력이 김지태에게 어떻게 했는지 등을 국가기관에서 명백하게 밝혔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지지와 박근혜에 대한 지지가 많이 겹친다. 박정희의 정치가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선거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 '불통'이라고 하는데, 그건 유신 때 박정희와 아주 비슷한 모습이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유신 체제 평가는 후세에 맡기면 된다고도 하는데, 그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저들이 유신 쿠데타를 통해 헌법을 유린하고 인권을 억누르고 긴급조치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건 삼척동자도 판단할 수 있는 사안 아닌가. 무엇 때문에 그 평가를 후세의 역사가에게 맡긴다는 건가.
▲ "'잡범'이라고 불리던 일반 죄수들이 장준하 선생에게 그렇게 박수를 보내더라." ⓒ프레시안(최형락)
"박근혜 자신을 위해서도 장준하 의문사 진상 규명에 협조해야"
프레시안 : 장준하 의문사 의혹이 다시 부각됐다.
서중석 : 특검제 비슷하게 새 위원회를 만들어 사인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장준하가 서거할 때는 굉장히 험악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진상 규명이 불가능했다. 2000년대 들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비로소 거론했지만, 그때도 시신을 재검사해 핵심을 파헤치기가 어려웠다. 사건 당시 권력 핵심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조사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이장하면서 시신을 처음으로 발굴한 것 아닌가. 객관적으로 재조사하는 게 좋다.
독립군 출신 장준하는 친일 황국 군인이던 박정희의 숙명적인 라이벌이었다(관련 기사 : 박근혜 '아킬레스건', 장준하는 누구?). 특히 장준하의 반유신 활동은 다른 어떤 사람하고도 차이가 났다. 1974년 12월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했는데, 분위기가 대단했다. 바로 김종필 총리가 서명 운동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고, 얼마 후 박정희까지 나섰다. 그리고 곧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한다. 그게 다 장준하의 반유신 운동 후 일어났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소에 있을 때 놀란 적이 있다. 한쪽에서 막 박수가 일어나더라. 저게 뭔가 싶어 가봤다. '잡범'이라고 불리던 일반 죄수들이 잠깐 운동 시간에 바깥에 나간 장 선생에게 그렇게 박수를 보내더라. '이래서 박정희 정권이 장 선생을 두려워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 : 서 교수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0개월여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 시기에 장준하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프레시안 :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는 "타살이라고 결론 내려진다 해도 박근혜 후보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박 후보가 나라를 운영하는 입장이 된다면 그 당시와 연결해 분명히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서중석 : (박근혜 후보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뭐가 있겠나. 그렇지만 반유신 운동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의 의문사이기 때문에 이 (진상 규명) 문제에 박근혜 후보가 협조하는 건 꼭 필요하다. 응당 해야 한다. (박근혜가 장준하의) 죽음과는 관계가 없지만, 유신 체제와는 관계가 깊기 때문에 그렇다. 박근혜 후보 자신을 위해서도, (장준하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할) 위원회를 만드는 데 협조해야 한다.
프레시안 : 최근 한일 관계가 냉각됐다.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이명박 정부의 대일본정책은 엉망진창이다. 정권 초기에는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식의 발언들을 했다. '저래서 되는가, 따질 건 따져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가 나왔다. 한일 간의 군사 협력 문제는 매우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사안인데,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 균형 잡힌 외교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한쪽으로 치우친 외교를 했다.
독도 방문 후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이 일왕 사죄 발언이다. 일본인에게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걸 넘어서, 독도 방문과 논리적으로 연관이 안 되는 발언이었다. 꼭 제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제기해야 하는데, 이 시점에 그걸 제기해 일본의 우경화에 힘을 실어준 측면이 있다. 물론 일본 잘못도 크지만, 이명박 정권이 외교 문제를 참 어렵게 만들어놓았다. '위안부' 문제에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 내 진보 세력의 입지도 팍 줄여놓았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경제 발전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할도 논란거리였다.
서중석 : 한국 현대사의 역동성, 국내외적인 환경 등을 제외하고 경제 발전 문제를 설명할 수는 없다. 박정희는 굉장한 행운아라고 본다. 현대사의 중추를 차지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18년을 지배하지 않았나. 4월혁명으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가 새롭게 도약하는 국내적 조건이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자본주의가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를 맞이한 때 아닌가. 한일회담에서 얻은 성과와 월남 파병으로 얻은 대가 등을 경제에 투입할 수 있었던 건, 그때 누가 대통령을 했더라도 그 시기에 했을 것이라고 본다. 한일회담 타결과 월남 파병은 한국이 분단 체제로 있던 속에서 하게끔 돼 있었다.
프레시안 : 대선이 코앞이다. (경선) 후보들의 역사 인식, 어떻게 보나.
서중석 : 문재인, 김두관 (경선) 후보의 역사 인식은 대체로 무난한 것 같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의 역사 인식과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선 5.16을 '구국의 결단',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는 건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다. 아버지한테 너무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5.16정권이 선전한 것 중 가장 큰 게 '장면 정권은 혼란에 빠졌고, 그런 혼란과 좌경화의 위험 속에서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4월혁명 후 그렇게 많은 데모와 진상 규명 요구가 있었던 것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승만 정권 때 보도연맹 사건 등 규모가 큰 집단 학살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경찰 등의 억압적 조치 때문에 민(民)들이 아주 고통스럽게 살았다. 한마디로 억눌리고 왜곡된 것들의 진상이 규명돼야 할 부분들이 많았고, 자기 권리를 주장해야 할 부분도 많이 있었다. 4월혁명 이후 이런 것들이 터진 건 자연스러운 일로 봐야 한다. 혼란이라고 이야기할 게 아니다. 우리 역사가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것을 거치면서 성숙해진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그 고통을 감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혼란 문제만 해도, 장면 정권이 들어선 1960년 8월 23일 이후 점점 약화된다. 데모도 많이 줄어든다. 통계로도 나타난다. 1961년에 와서는 '어째서인지 데모가 안 보인다'는 기사가 신문에 날 정도였다. 5.16쿠데타 세력은 4.19 (1주년) 때 데모로 사회가 혼란해지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그래서 부추기기까지 했는데, 그런 데모가 안 일어났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내부를 정리해가고 혼란도 약화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장면 정권 출범 때부터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해방이라고도 볼 수 있다. 폭넓게 자유를 획득했고, 통일운동과 노동운동도 활발했다. 법치주의가 자리 잡으려 한 게 장면 정권 때다. 이승만 정권 때는 무법과 탈법의 시대였다. 또한 장면 정권은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했다. 경제 건설은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모토였다. 이렇게 한국 사회가 크게 변모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5.16쿠데타 후 박정희 정권은 경제 제일주의를 승계했지만, 다른 부문에서는 4월혁명 정신에 역행하고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바를 가로막았다. 그런 의미에서도 '5.16=구국의 결단'으로 보는 건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프레시안 :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딸에게 과도하게 묻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서중석 : '박근혜에게 유신 체제 책임을 묻는 건 연좌제 아니냐'고 보는 이도 있는데, 그건 참 잘못된 인식이다. 박근혜는 유신 체제에서 1974년 8.15 (육영수 피격 사망)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유신 체제를 이끌어가는 데 큰 기둥 역할을 한 것이다. 퍼스트레이디는 허깨비가 아니다. 박근혜의 행동과 발언은 유신 후기에 무게 있게 영향을 줬다.
그리고 정수장학회만 하더라도, 5.16세력이 김지태에게 어떻게 했는지 등을 국가기관에서 명백하게 밝혔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지지와 박근혜에 대한 지지가 많이 겹친다. 박정희의 정치가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선거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 '불통'이라고 하는데, 그건 유신 때 박정희와 아주 비슷한 모습이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유신 체제 평가는 후세에 맡기면 된다고도 하는데, 그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저들이 유신 쿠데타를 통해 헌법을 유린하고 인권을 억누르고 긴급조치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건 삼척동자도 판단할 수 있는 사안 아닌가. 무엇 때문에 그 평가를 후세의 역사가에게 맡긴다는 건가.
▲ "'잡범'이라고 불리던 일반 죄수들이 장준하 선생에게 그렇게 박수를 보내더라." ⓒ프레시안(최형락)
"박근혜 자신을 위해서도 장준하 의문사 진상 규명에 협조해야"
프레시안 : 장준하 의문사 의혹이 다시 부각됐다.
서중석 : 특검제 비슷하게 새 위원회를 만들어 사인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장준하가 서거할 때는 굉장히 험악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진상 규명이 불가능했다. 2000년대 들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비로소 거론했지만, 그때도 시신을 재검사해 핵심을 파헤치기가 어려웠다. 사건 당시 권력 핵심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조사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이장하면서 시신을 처음으로 발굴한 것 아닌가. 객관적으로 재조사하는 게 좋다.
독립군 출신 장준하는 친일 황국 군인이던 박정희의 숙명적인 라이벌이었다(관련 기사 : 박근혜 '아킬레스건', 장준하는 누구?). 특히 장준하의 반유신 활동은 다른 어떤 사람하고도 차이가 났다. 1974년 12월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했는데, 분위기가 대단했다. 바로 김종필 총리가 서명 운동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고, 얼마 후 박정희까지 나섰다. 그리고 곧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한다. 그게 다 장준하의 반유신 운동 후 일어났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소에 있을 때 놀란 적이 있다. 한쪽에서 막 박수가 일어나더라. 저게 뭔가 싶어 가봤다. '잡범'이라고 불리던 일반 죄수들이 잠깐 운동 시간에 바깥에 나간 장 선생에게 그렇게 박수를 보내더라. '이래서 박정희 정권이 장 선생을 두려워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 : 서 교수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0개월여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 시기에 장준하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프레시안 :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는 "타살이라고 결론 내려진다 해도 박근혜 후보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박 후보가 나라를 운영하는 입장이 된다면 그 당시와 연결해 분명히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서중석 : (박근혜 후보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뭐가 있겠나. 그렇지만 반유신 운동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의 의문사이기 때문에 이 (진상 규명) 문제에 박근혜 후보가 협조하는 건 꼭 필요하다. 응당 해야 한다. (박근혜가 장준하의) 죽음과는 관계가 없지만, 유신 체제와는 관계가 깊기 때문에 그렇다. 박근혜 후보 자신을 위해서도, (장준하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할) 위원회를 만드는 데 협조해야 한다.
프레시안 : 최근 한일 관계가 냉각됐다.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이명박 정부의 대일본정책은 엉망진창이다. 정권 초기에는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식의 발언들을 했다. '저래서 되는가, 따질 건 따져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가 나왔다. 한일 간의 군사 협력 문제는 매우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사안인데,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 균형 잡힌 외교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한쪽으로 치우친 외교를 했다.
독도 방문 후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이 일왕 사죄 발언이다. 일본인에게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걸 넘어서, 독도 방문과 논리적으로 연관이 안 되는 발언이었다. 꼭 제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제기해야 하는데, 이 시점에 그걸 제기해 일본의 우경화에 힘을 실어준 측면이 있다. 물론 일본 잘못도 크지만, 이명박 정권이 외교 문제를 참 어렵게 만들어놓았다. '위안부' 문제에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 내 진보 세력의 입지도 팍 줄여놓았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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