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 자본주의 민낯 드러낸 부끄러운 풍경들
노예사회를 향하는 대한민국
[이완기 칼럼] 천민 자본주의 민낯 드러낸 부끄러운 풍경들
입력 : 2014-03-01 09:29:54 노출 : 2014.03.01 10:32:57
이완기 언론인 | media@mediatoday.co.kr
mediatoday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글자키우기 글자줄이기 프린트하기 기사보내기 오류신고하기
사회제도는 인간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생겨나고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대체로 상호 이익이 되고 풍요로운 인간사회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지만, 종종 인간의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의 산물로 뒷걸음질하기도 한다.
미국의 노예제도가 진화하게 된 배경이 그렇다. 18세기 말에 등장한 조면기로 목화재배가 활성화되자 드넓은 땅을 소유한 남부의 농장재벌들은 먹여주고 재워주는 값싼 부양비만으로 무한정의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들은 유럽 봉건귀족들의 대저택과 화려한 농장생활을 꿈꾸었고 이 꿈의 실현을 위해 정치인들은 노예제도의 긍정적 여론을 확산시켰다. 노예제도의 당위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노예를 부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노예적 인간’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노예에 대한 노동착취, 성적 학대, 구타, 감금 등의 만행을 보면서도 대부분의 일반 대중은 무감각했다. 법과 제도에 따라 노예는 가축이나 상품처럼 돈으로 사고팔 수 있었으며 노예해방을 선동하는 것은 바로 재산권 침해로 인식되었다. 강자의 욕망이 제도를 만들고 제도가 일반 대중의 의식을 지배한 것이다. 인간의 반인륜적 행동의 배경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가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와 함께 이를 정당화하는 인식의 토양이 마련되어 있다.
미국이 노예제도로부터 벗어나게 된 배경 또한 인간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노예제도가 반인륜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게 된 것은 노예제도가 다수의 이익에 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는 양심의 울림이 일부 미국인들의 가슴에 싹트고 있었지만 그것이 북부 노동자들의 임금, 산업혁명의 바람, 정치적 이해 등 다수 미국인들의 이익에 합치되는 것이 아니었다면 노예해방의 사상은 그렇게 빨리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 장애인, 노숙자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염전에 팔려가 노예생활을 했다가 풀려난 사건이 보도됐다. 그들은 직업소개업자에 속아 자신도 모르게 염전업주에게 팔려나갔고, 단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각목, 쇠파이프 등으로 온갖 폭행을 당하면서 혹사당했다. 이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70여 년 전인 1840년대에 인신매매조직에 납치되어 참혹한 노예로 살았던 솔로몬 노섭의 실화가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실제로 되살아난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실화는 얼마 전 <노예12년>이라는 책과 영화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실제 인물인 고 황유미씨가 일했던 삼성반도체 또한 ‘노예의 일터’에 다름 아니다. 이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은 이른바 대한민국 초일류기업의 자존심을 위해 자신의 명을 재촉하면서 일했다. 그들이 생명을 걸고 일한 대가는 수십 억 원대에 달하는 삼성 임원들의 연봉에 비하면 그야말로 노예들이 먹고 자는 숙식비에 지나지 않는다. ‘열악한 노동환경’이라는 수식마저 사치스러운 ‘죽음의 일터’를 삼성이 유지‧운영할 수 있는 배경에는 영화 상영마저 철저하게 차단할 수 있는 삼성의 거대한 경제‧사회적 지배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집권여당의 홍종문 사무총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아프리카예술박물관에서도 온갖 규범을 어기면서 노동자들의 고혈을 빨아온 ‘노예의 일터’가 드러났다. 그들 노예들의 거처는 난방은커녕 쥐들이 들락거리는 음습한 창고였고, 그곳에서 그들은 한 달 인건비 50만원을 받고 짐승과 같은 생활을 했다.
노예를 부리고 싶은 ‘노예적 사고’가 생기는 것은 인종이나 피부색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호받지 못하는 경제‧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오늘날 그것은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에 다름 아니다. 돈과 이윤, 사유재산에 지나치게 탐닉하다보면 인간은 스스로 노예적 사고에 빠져 들기 십상이다. 그것은 지배자 뿐 아니라 피지배자 또한 노예적 사고에 빠져들게 만든다. 가혹한 노동착취에도 군소리 한번 못하며, 죽음에 가까이 간 노동환경에도 저항할 용기가 없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평등을 빼앗긴 사회가 노예사회이다.
전남의 한 섬에서, 삼성반도체에서, 아프리카박물관에서 발생한 노예생활은 모두 경제‧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났다. 전남의 한 섬에서 모진 폭행과 함께 강제노역이 가능했던 것은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기는커녕 탈출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의 정보를 염전업자에게 제공해주는 주민들의 마비된 감성에도 원인이 있었다고 언론은 전한다. 삼성반도체에서 ‘죽음의 일터’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자본권력을 법과 제도와 이 사회가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예술박물관 이주노동자들의 노예생활은 파렴치한 정치권력에 대해 징치하지 못하는 이 사회의 부조리와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이 사회의 천박성과 무감각 때문이다.
자본에 짓눌린 우리사회는 노예사회로 가까이 가고 있다. 노예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사회에 대한 제재와 조정의 역할을 국가가 기피할 때 나타난다. 자유방임의 사회에서 힘없는 약자들은 자유를 박탈당하며 결국 강자들만이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대중의 보편적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강자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조정해야 할 국가가 그 책무를 방기한 채, 규제완화니, 성장이니 하면서 자유방임으로 이끄는 것은 이 사회를 노예사회의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상호 이익이 되고 풍요로운 인간사회를 향하려는 노력도 의지도 없는 방임에 가까운 이런 국가에 혈세를 내야할 이유가 있는가.
이완기 언론인의 다른기사 보기
[이완기 칼럼] 천민 자본주의 민낯 드러낸 부끄러운 풍경들
입력 : 2014-03-01 09:29:54 노출 : 2014.03.01 10:32:57
이완기 언론인 | media@mediatoday.co.kr
mediatoday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글자키우기 글자줄이기 프린트하기 기사보내기 오류신고하기
사회제도는 인간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생겨나고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대체로 상호 이익이 되고 풍요로운 인간사회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지만, 종종 인간의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의 산물로 뒷걸음질하기도 한다.
미국의 노예제도가 진화하게 된 배경이 그렇다. 18세기 말에 등장한 조면기로 목화재배가 활성화되자 드넓은 땅을 소유한 남부의 농장재벌들은 먹여주고 재워주는 값싼 부양비만으로 무한정의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들은 유럽 봉건귀족들의 대저택과 화려한 농장생활을 꿈꾸었고 이 꿈의 실현을 위해 정치인들은 노예제도의 긍정적 여론을 확산시켰다. 노예제도의 당위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노예를 부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노예적 인간’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노예에 대한 노동착취, 성적 학대, 구타, 감금 등의 만행을 보면서도 대부분의 일반 대중은 무감각했다. 법과 제도에 따라 노예는 가축이나 상품처럼 돈으로 사고팔 수 있었으며 노예해방을 선동하는 것은 바로 재산권 침해로 인식되었다. 강자의 욕망이 제도를 만들고 제도가 일반 대중의 의식을 지배한 것이다. 인간의 반인륜적 행동의 배경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가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와 함께 이를 정당화하는 인식의 토양이 마련되어 있다.
미국이 노예제도로부터 벗어나게 된 배경 또한 인간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노예제도가 반인륜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게 된 것은 노예제도가 다수의 이익에 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는 양심의 울림이 일부 미국인들의 가슴에 싹트고 있었지만 그것이 북부 노동자들의 임금, 산업혁명의 바람, 정치적 이해 등 다수 미국인들의 이익에 합치되는 것이 아니었다면 노예해방의 사상은 그렇게 빨리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 장애인, 노숙자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염전에 팔려가 노예생활을 했다가 풀려난 사건이 보도됐다. 그들은 직업소개업자에 속아 자신도 모르게 염전업주에게 팔려나갔고, 단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각목, 쇠파이프 등으로 온갖 폭행을 당하면서 혹사당했다. 이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70여 년 전인 1840년대에 인신매매조직에 납치되어 참혹한 노예로 살았던 솔로몬 노섭의 실화가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실제로 되살아난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실화는 얼마 전 <노예12년>이라는 책과 영화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실제 인물인 고 황유미씨가 일했던 삼성반도체 또한 ‘노예의 일터’에 다름 아니다. 이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은 이른바 대한민국 초일류기업의 자존심을 위해 자신의 명을 재촉하면서 일했다. 그들이 생명을 걸고 일한 대가는 수십 억 원대에 달하는 삼성 임원들의 연봉에 비하면 그야말로 노예들이 먹고 자는 숙식비에 지나지 않는다. ‘열악한 노동환경’이라는 수식마저 사치스러운 ‘죽음의 일터’를 삼성이 유지‧운영할 수 있는 배경에는 영화 상영마저 철저하게 차단할 수 있는 삼성의 거대한 경제‧사회적 지배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집권여당의 홍종문 사무총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아프리카예술박물관에서도 온갖 규범을 어기면서 노동자들의 고혈을 빨아온 ‘노예의 일터’가 드러났다. 그들 노예들의 거처는 난방은커녕 쥐들이 들락거리는 음습한 창고였고, 그곳에서 그들은 한 달 인건비 50만원을 받고 짐승과 같은 생활을 했다.
노예를 부리고 싶은 ‘노예적 사고’가 생기는 것은 인종이나 피부색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호받지 못하는 경제‧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오늘날 그것은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에 다름 아니다. 돈과 이윤, 사유재산에 지나치게 탐닉하다보면 인간은 스스로 노예적 사고에 빠져 들기 십상이다. 그것은 지배자 뿐 아니라 피지배자 또한 노예적 사고에 빠져들게 만든다. 가혹한 노동착취에도 군소리 한번 못하며, 죽음에 가까이 간 노동환경에도 저항할 용기가 없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평등을 빼앗긴 사회가 노예사회이다.
전남의 한 섬에서, 삼성반도체에서, 아프리카박물관에서 발생한 노예생활은 모두 경제‧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났다. 전남의 한 섬에서 모진 폭행과 함께 강제노역이 가능했던 것은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기는커녕 탈출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의 정보를 염전업자에게 제공해주는 주민들의 마비된 감성에도 원인이 있었다고 언론은 전한다. 삼성반도체에서 ‘죽음의 일터’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자본권력을 법과 제도와 이 사회가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예술박물관 이주노동자들의 노예생활은 파렴치한 정치권력에 대해 징치하지 못하는 이 사회의 부조리와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이 사회의 천박성과 무감각 때문이다.
자본에 짓눌린 우리사회는 노예사회로 가까이 가고 있다. 노예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사회에 대한 제재와 조정의 역할을 국가가 기피할 때 나타난다. 자유방임의 사회에서 힘없는 약자들은 자유를 박탈당하며 결국 강자들만이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대중의 보편적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강자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조정해야 할 국가가 그 책무를 방기한 채, 규제완화니, 성장이니 하면서 자유방임으로 이끄는 것은 이 사회를 노예사회의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상호 이익이 되고 풍요로운 인간사회를 향하려는 노력도 의지도 없는 방임에 가까운 이런 국가에 혈세를 내야할 이유가 있는가.
이완기 언론인의 다른기사 보기

좋아요 0
태그
DISCLAIMER
이곳에 게시된 글들은 에이전트 혹은 사용자가 자유롭게 올린 게시물입니다. 커뮤니티 내용을 확인하고 참여에 따른 법적, 경제적, 기타 문제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케이타운 1번가는 해당 컨텐츠에 대해 어떠한 의견이나 대표성을 가지지 않으며, 커뮤니티 서비스에 게재된 정보에 의해 입은 손해나 피해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