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기업보다 더잔인한 도요다
요 밑에 한국 똥차 사서 욕보고 봉 되뿌렸다는 어느분 이바구가 실렸는디...
이건 그것보다 더 잔인한 어느 일본 대기업 이바구...
(조선일보에서 펌)
‘토요타 교통사고’ 18년 간 전신마비 아내 돌본 美 최형철씨 타계
“토요타 차량 결함으로 교통사고” 거대 공룡기업과 투쟁
‘토요타 교통사고’ 피해자로 잘 알려진 미국 보스턴의 최혜연씨 가족이 큰 슬픔에 싸였다. 교통사고로 전신마비된 부인을 18년 간 헌신적으로 돌보던 남편 최형철씨(61)가 췌장암으로 타계했기 때문이다.
최형철씨는 지난 8일 그토록 아꼈던 아내와 3남매를 두고 영원히 길을 떠났다. 1997년 교통사고로 목 이하가 마비된 부인의 손과 발이 되었던 그가 몸의 이상을 느낀 것은 지난해 9월 중순.
갑자기 황달 증세가 시작되고 몸무게가 급격히 줄어 정밀진단을 받은 그에게 병원은 췌장암 말기라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내렸다. 거대 공룡기업 토요타를 상대로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싸움을 계속해온 이들 가족에게 시련이 파도처럼 끊이지 않고 닥쳐온 것이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물 한 잔조차 마실 수 없는 아내를 24시간 돌보면서도 토요타와의 법정 소송을 18년째 끌고 온 것은 온전히 최형철씨의 힘이었다.
이들 가족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1997년. 최혜연씨가 둘째(5살)와 셋째(3살)를 태우고 운전한 토요타 코롤라 승용차가 90번 도로에서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천행으로 아이들은 멀쩡했지만 최혜연씨는 목 척수를 다쳐 사지마비가 되고 말았다. 구입한 지 1년밖에 안된 차량이 외부 충격없이 돌연 지그재그로 달리며 중심을 잃고 전복된 것은 중대한 차량의 결함을 의미했지만 수 년 간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뉴시스 2010년 2월24일 송고기사 참조>
2002년 어느 날 토요타로부터 100만 달러의 합의금 제안이 들어왔다. 차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거액의 합의금을 제안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웠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실을 인정하지 않는 토요타 앞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때부터 최형철씨는 증거를 찾아 나섰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리노이 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딴 그는 직장을 휴직하고 수많은 실험을 했다. 차량의 흔적을 부위별로 계산하고 심지어 폐차 직전의 코롤라 차량을 구해서 사고 당시 차량과 똑같이 부숴놓고 사진을 찍어 다른 점을 찾아나갔다.
그러던 중 사고 후 11일 동안 견인장소에 보관했던 차량에서 의자를 고친 흔적 등 사고를 유발시킬 수 있는 두 개의 증거가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사고 장면을 목격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구해준 여경찰이 재판 전 진술에서 구출 당시 의자가 부서진 상태였다는 증언을 했다는 것도 듣게 됐다. 그가 의문을 제기한 증거와 정확히 일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2005년 재판에서 이러한 조작 문제는 제시되지 않은 채 패소했다. 수만 달러의 조사 비용을 들여 천신만고 끝에 찾은 증거를 제기하지 않은 변호사와 결별한 후 최형철씨는 직접 항소를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지난 재판 때 토요타 측이 최형철씨가 사고와 관련된 과학적 증언을 하는 것을 차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변호사도 없이 최고의 로펌을 앞세운 글로벌 기업을 상대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치기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최형철씨가 근무하던 폴라로이드 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생계의 위기까지 닥쳤다.
최혜연씨는 “과거 합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바보라고 했다. 당시에도 우리 집 사정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그래도 받지 않았던 것은 운전 잘못이 아니라는 결백이 증명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재판은 끝났지만 최형철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끝없이 서류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도요타측의 위증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증거 조작 사실 제기 시점에 대한 토요타측의 결정적인 모순을 잡아낸 그는 지난해 7월 재심을 청구하는 서류를 제출했다.
그러나 너무 무리한 탓일까. 두 달 후 췌장암 진단을 받는 황망한 일이 벌어졌다. 최형철씨의 사연이 지역 매체 보스턴 코리아를 통해 알려지면서 한인 이웃들이 모아준 4460달러가 답지했고 재심 청구를 위한 청문회 변호사도 구할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10일 청문회는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판사 앞에 나온 최형철씨가 항암치료제 약병을 매단 채 “토요타측의 위증 각서 사기가 드러났다. 그 때문에 17년 간 진실을 입증할 수 없었다”고 가슴을 울리는 호소를 한 것이다.
독한 약성분으로 몽롱한 가운데 혼신의 힘을 다해 재판정에서 증언한 최형철씨의 말을 경청한 판사는 ‘Fraud on the Court’의 결정을 내렸다. 1년 이내에 재심을 다시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최혜연씨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순간에도 법정에 나와 호소하는 남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남편은 병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모든 열정을 진실을 규명하는데 다 쏟아부었다”고 눈물을 쏟았다.
최형철씨 가족과 20년 가까운 인연의 김하동씨(50)는 “고인은 가족애와 의지가 남달랐다. 투병 중에도 힘든 내색을 표시하지 않았고 가족만을 걱정했다. 병세가 악화되기 전에 자주 보고 도움을 줬어야 하는데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고 애통해 했다.
최혜연씨는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집에 돌아온 지 이틀 뒤였다.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는 막내딸까지 3남매가 함께 한 가운데 편안하게 마지막 길을 갔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정말 존경할만한 분이었다”고 전했다.
고인의 장례식은 14일 오전 세인트 마이클 세미트리에서 열리고 추모식은 21일 오전 11시 웨이크필드 문수사에서 봉행된다.
이건 그것보다 더 잔인한 어느 일본 대기업 이바구...
(조선일보에서 펌)
‘토요타 교통사고’ 18년 간 전신마비 아내 돌본 美 최형철씨 타계
“토요타 차량 결함으로 교통사고” 거대 공룡기업과 투쟁
‘토요타 교통사고’ 피해자로 잘 알려진 미국 보스턴의 최혜연씨 가족이 큰 슬픔에 싸였다. 교통사고로 전신마비된 부인을 18년 간 헌신적으로 돌보던 남편 최형철씨(61)가 췌장암으로 타계했기 때문이다.
최형철씨는 지난 8일 그토록 아꼈던 아내와 3남매를 두고 영원히 길을 떠났다. 1997년 교통사고로 목 이하가 마비된 부인의 손과 발이 되었던 그가 몸의 이상을 느낀 것은 지난해 9월 중순.
갑자기 황달 증세가 시작되고 몸무게가 급격히 줄어 정밀진단을 받은 그에게 병원은 췌장암 말기라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내렸다. 거대 공룡기업 토요타를 상대로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싸움을 계속해온 이들 가족에게 시련이 파도처럼 끊이지 않고 닥쳐온 것이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물 한 잔조차 마실 수 없는 아내를 24시간 돌보면서도 토요타와의 법정 소송을 18년째 끌고 온 것은 온전히 최형철씨의 힘이었다.
이들 가족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1997년. 최혜연씨가 둘째(5살)와 셋째(3살)를 태우고 운전한 토요타 코롤라 승용차가 90번 도로에서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천행으로 아이들은 멀쩡했지만 최혜연씨는 목 척수를 다쳐 사지마비가 되고 말았다. 구입한 지 1년밖에 안된 차량이 외부 충격없이 돌연 지그재그로 달리며 중심을 잃고 전복된 것은 중대한 차량의 결함을 의미했지만 수 년 간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뉴시스 2010년 2월24일 송고기사 참조>
2002년 어느 날 토요타로부터 100만 달러의 합의금 제안이 들어왔다. 차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거액의 합의금을 제안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웠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실을 인정하지 않는 토요타 앞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때부터 최형철씨는 증거를 찾아 나섰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리노이 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딴 그는 직장을 휴직하고 수많은 실험을 했다. 차량의 흔적을 부위별로 계산하고 심지어 폐차 직전의 코롤라 차량을 구해서 사고 당시 차량과 똑같이 부숴놓고 사진을 찍어 다른 점을 찾아나갔다.
그러던 중 사고 후 11일 동안 견인장소에 보관했던 차량에서 의자를 고친 흔적 등 사고를 유발시킬 수 있는 두 개의 증거가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사고 장면을 목격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구해준 여경찰이 재판 전 진술에서 구출 당시 의자가 부서진 상태였다는 증언을 했다는 것도 듣게 됐다. 그가 의문을 제기한 증거와 정확히 일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2005년 재판에서 이러한 조작 문제는 제시되지 않은 채 패소했다. 수만 달러의 조사 비용을 들여 천신만고 끝에 찾은 증거를 제기하지 않은 변호사와 결별한 후 최형철씨는 직접 항소를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지난 재판 때 토요타 측이 최형철씨가 사고와 관련된 과학적 증언을 하는 것을 차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변호사도 없이 최고의 로펌을 앞세운 글로벌 기업을 상대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치기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최형철씨가 근무하던 폴라로이드 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생계의 위기까지 닥쳤다.
최혜연씨는 “과거 합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바보라고 했다. 당시에도 우리 집 사정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그래도 받지 않았던 것은 운전 잘못이 아니라는 결백이 증명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재판은 끝났지만 최형철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끝없이 서류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도요타측의 위증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증거 조작 사실 제기 시점에 대한 토요타측의 결정적인 모순을 잡아낸 그는 지난해 7월 재심을 청구하는 서류를 제출했다.
그러나 너무 무리한 탓일까. 두 달 후 췌장암 진단을 받는 황망한 일이 벌어졌다. 최형철씨의 사연이 지역 매체 보스턴 코리아를 통해 알려지면서 한인 이웃들이 모아준 4460달러가 답지했고 재심 청구를 위한 청문회 변호사도 구할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10일 청문회는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판사 앞에 나온 최형철씨가 항암치료제 약병을 매단 채 “토요타측의 위증 각서 사기가 드러났다. 그 때문에 17년 간 진실을 입증할 수 없었다”고 가슴을 울리는 호소를 한 것이다.
독한 약성분으로 몽롱한 가운데 혼신의 힘을 다해 재판정에서 증언한 최형철씨의 말을 경청한 판사는 ‘Fraud on the Court’의 결정을 내렸다. 1년 이내에 재심을 다시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최혜연씨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순간에도 법정에 나와 호소하는 남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남편은 병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모든 열정을 진실을 규명하는데 다 쏟아부었다”고 눈물을 쏟았다.
최형철씨 가족과 20년 가까운 인연의 김하동씨(50)는 “고인은 가족애와 의지가 남달랐다. 투병 중에도 힘든 내색을 표시하지 않았고 가족만을 걱정했다. 병세가 악화되기 전에 자주 보고 도움을 줬어야 하는데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고 애통해 했다.
최혜연씨는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집에 돌아온 지 이틀 뒤였다.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는 막내딸까지 3남매가 함께 한 가운데 편안하게 마지막 길을 갔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정말 존경할만한 분이었다”고 전했다.
고인의 장례식은 14일 오전 세인트 마이클 세미트리에서 열리고 추모식은 21일 오전 11시 웨이크필드 문수사에서 봉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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