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은 지혜의 등불
의심은 지혜의 등불... 조정래 목사 (위스칸신 UMC)
“Modest doubt is called the beacon of the wise.”
- William Shakespeare
위의 말은 윌리암 쉐익스피어의 말로써, “건전한 의심은 지혜로운 사람의 등불”이라는 말이다. 좀 더 줄여서 말한다면, “의심은 지혜의 등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여기 경찰서인데, 선생님의 은행구좌가 노출되었습니다. 개인정보를 알려 주시면, 안전하게 돈을 옮겨 드리겠습니다.”하고 전화를 해왔다면, “좀 이상하다. 보이스피싱 하는 사기꾼이 아닐까?”하며 의심을 해 보는 것은 지혜로운 처신일 것이다.
가족중에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신문에 “기도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하는 광고가 나오면 “혹시나”하는 희망을 갖기 쉬울 것이다. 이럴 때는, “기도로 병을 다 고칠 수 있다면, 유명한 옥한흠목사, 하용조목사와 같은 사람들은 왜 죽었나?”, “기도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나 친척들중에 병들거나 죽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돈을 요구하는 사기꾼은 아닐까?”등등의 의심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환자와 가족들을 위로하고, 하나님께 병이 낫기를 바라는 소원을 아뢰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께 믿고 맡기자.”는 격려의 기도를 해 주는 것은 좋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에 마귀나 사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고 해서,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감기 환자에게 감기 귀신이 들렸다거나, 중환자에게서 마귀가 나가도록 안찰 기도를 한다며 손으로 때리거나 환자의 갈비뼈를 발로 밟아서 죽이는 무지한 기독교인이 더 이상 나와서는 안될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사람들의 합리적인 사고와 건전한 비판의식이 마비 되어 있을 때, 이단과 사이비 교주들이 판을 친다고 본다. 성경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란 말이 있듯이, 건전한 판단력이 없으면, 종교 사기꾼들에게 농락 당하기 쉽다고 본다.
사이비 교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성 교단의 목사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목사들이 설교하는 내용의 100프로가 다 맞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목사님의 가르침이 이해가 안갈 때는 의문을 제기한다 해도 너그러운 목사라면 이해해 줄 것이라고 본다. 의심을 위한 의심은 나쁘지만,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지성적인 의심은 신앙을 지혜롭고, 성숙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신학자 Paul Tillich은, “의심은 신앙의 반대가 아니라, 성숙한 신앙을 이루게 하는 신앙의 한 구성요소”라고 했다. (Doubt is not the opposite of faith; it is one element of faith)
철학자 데까르트는 “나는 의심함으로,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살아 있다.”고 했다. (I doubt, therefore, I think. I think, therefore, I am. Dubito ergo cogito; cogito ergo sum) 신앙인들도 의심함으로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정신이 살아 있는, 성숙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 신앙은 의심의 터널을 통과 하고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신앙이어야 한다.” (Any belief worth having must survive doubt.)
“Modest doubt is called the beacon of the wise.”
- William Shakespeare
위의 말은 윌리암 쉐익스피어의 말로써, “건전한 의심은 지혜로운 사람의 등불”이라는 말이다. 좀 더 줄여서 말한다면, “의심은 지혜의 등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여기 경찰서인데, 선생님의 은행구좌가 노출되었습니다. 개인정보를 알려 주시면, 안전하게 돈을 옮겨 드리겠습니다.”하고 전화를 해왔다면, “좀 이상하다. 보이스피싱 하는 사기꾼이 아닐까?”하며 의심을 해 보는 것은 지혜로운 처신일 것이다.
가족중에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신문에 “기도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하는 광고가 나오면 “혹시나”하는 희망을 갖기 쉬울 것이다. 이럴 때는, “기도로 병을 다 고칠 수 있다면, 유명한 옥한흠목사, 하용조목사와 같은 사람들은 왜 죽었나?”, “기도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나 친척들중에 병들거나 죽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돈을 요구하는 사기꾼은 아닐까?”등등의 의심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환자와 가족들을 위로하고, 하나님께 병이 낫기를 바라는 소원을 아뢰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께 믿고 맡기자.”는 격려의 기도를 해 주는 것은 좋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에 마귀나 사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고 해서,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감기 환자에게 감기 귀신이 들렸다거나, 중환자에게서 마귀가 나가도록 안찰 기도를 한다며 손으로 때리거나 환자의 갈비뼈를 발로 밟아서 죽이는 무지한 기독교인이 더 이상 나와서는 안될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사람들의 합리적인 사고와 건전한 비판의식이 마비 되어 있을 때, 이단과 사이비 교주들이 판을 친다고 본다. 성경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란 말이 있듯이, 건전한 판단력이 없으면, 종교 사기꾼들에게 농락 당하기 쉽다고 본다.
사이비 교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성 교단의 목사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목사들이 설교하는 내용의 100프로가 다 맞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목사님의 가르침이 이해가 안갈 때는 의문을 제기한다 해도 너그러운 목사라면 이해해 줄 것이라고 본다. 의심을 위한 의심은 나쁘지만,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지성적인 의심은 신앙을 지혜롭고, 성숙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신학자 Paul Tillich은, “의심은 신앙의 반대가 아니라, 성숙한 신앙을 이루게 하는 신앙의 한 구성요소”라고 했다. (Doubt is not the opposite of faith; it is one element of faith)
철학자 데까르트는 “나는 의심함으로,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살아 있다.”고 했다. (I doubt, therefore, I think. I think, therefore, I am. Dubito ergo cogito; cogito ergo sum) 신앙인들도 의심함으로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정신이 살아 있는, 성숙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 신앙은 의심의 터널을 통과 하고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신앙이어야 한다.” (Any belief worth having must survive dou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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