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70주년, 건국67년의 한국- 1
대한이란 나라이름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조선 국왕이 대등한 지위를 가지려고 선포한 이름이다. 대한제국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세계만방에 알렸으나 몇 년 후에 일본에게 자주권을 빼앗기고 합병됐다. 이에 우리 선열들은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투쟁을 했다.1945년 8월 15일 해방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우리 민족 독립운동가들의 피 흘린 공로가 헛되지 않았지만, 연합국의 승리로 얻어진 결과였기에 외세에 의해서 전후 처리가 결정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군은 북한에, 미군은 남한에 1945년 9월 8일 진주하게 됐다.유럽에서 전범국인 독일이 연합군에게 분할 점령된 것과 같이 아시아에선 일본이 분할 점령됐어야 했는데 소련의 남진 야욕과 이에 방어한 미국에 의해 우리 한반도가 분단 통치되고 말았다. 그들은 일본 패전병력을 무장해제 하고 5년간의 신탁통치를 위해 진주한다고 했다. 모든 동포가 신탁통치를 반대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소련의 지령을 받은 공산 세력이 찬탁으로 돌변했다.
군정 기간에 남한에선 1946년 10월 대구폭동사건, 1948년 4.3 제주사건과 이에 관련한 여수 순천 반란사건 등이 일어나 10여만 명의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었다. 무력폭동 이전엔 남로당의 활동도 허용됐다.
북한은 6.25동란이 남쪽의 도발로 일어났다는 거짓말을 한다. 민족상잔의 범죄적 전쟁수단을 쓴 것은 비난받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통일됐었으면 하는 분들이 있겠으나 북한의 실정을 알고 보면 철없는 소치다. 통일은 민족의 번영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무 권리와 기아, 정치범 수용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자유를 위해 침략자를 물리친 미군의 참전은 정당했다. 북의 한미동맹 비난과 미군철수 주장은 한국을 고립시켜놓고 침략하려는 간교한 술책이다. 하지만, 북한과 같은 독재 치하에서 살려는 동포들은 없다.
1946년 6월에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발표했다고 비판하지만 1945년 9월 20일, 즉 8.15해방 37일 만에 스탈린은 북조선 단정 수립 지령을 내렸고 남북 재통합이 어렵게 신탁통치와 미소공동위원회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전쟁 또한 미국을 견제하려던 스탈린의 작품으로 국제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이승만의 항일태도는 높이 살만하며 한미 방위 조약은 훗날 고도성장을 보장해준 안보환경을 조성했고 수입대체 산업화는 수입품을 국산화하는 전략이었다. 또한, 지주제 해체, 자작농의 토지소유등을 효과적으로 이룩한 면도 있다. 남한에서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토지를 분배받아 매년 농사지은 작물로 5년 동안 분할상환을 하면 자기토지가 됐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이승만 정권의 지지층이 되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의회와 복수정당 정치를 열고 전쟁 중에도 대통령 선거를 했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4.19 학생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1960년 3월 15일 정 부통령 부정선거가 계기였다.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으나 각종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9개월 후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부가 정변을 일으켜 군정을 했다. 민주화 운동은 5.16 군사 쿠데타 후 철저한 탄압을 받아 잠잠하다가 유신 개헌 후부터 다시 활발해졌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혁과 국가안보에는 굳건했으나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하고 장기집권을 꾀했던 것에 반대하게 된 것이다.
보수계에서는 김대중, 김영삼 씨 계 인사들이 큰 주류를 이루고 원 내외에서 투쟁 했으며 혁신계에서는 김철 씨 계가 비밀리에 재야의 각계 지도자들을 망라한 74년 11월의 조국 민주회복 국민회의를 조직하는 등 형극의 투쟁을 하였다.
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순수하게 남한의 민주화와 인권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언론은 특정인사의 이름도 못 쓰고 재야인사 라고만 썼고 혁신계의 성명이나 투쟁사실은 기사화할 수 없어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아 신문의 행간을 읽고 눈치채야 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빈발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광역시에 계엄군을 투입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며 진압했다. 그러나 강권 통치를 반대하는 국민의 저항은 줄기차게 이어져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직접선거가 수용됐다.
한편 미군이 광주시위 진압군 출동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고 청년학생층에서 반미여론이 생겼다.
이에 편승한 북의 주체사상 선전과 조직공작으로 80년대 부터 종 북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종 북 반미에 머리가 굳어진 세력들은 국민의 정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력적 시위를 하며. 이북 편들기에 매달리고 있다.
그간 북한은 한반도에서 위기를 만들어 왔다.1968년 1월 21일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정규군 특수 부대원 31명을 남파한 사건,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울진,삼척지역에 무장공작원 120명을 침투시켜 양민들을 학살했던 사건이 있었고, 김정일이 대남공작을 담당하던 시기였던 1983년 10월 9일에는 미얀마에서 남한 각료 17명을 폭발물로 죽였고 1987년 11월 29일에는 올림픽 개최를 무산시키려고 KAL 858기를 공중폭파했다. 최근 2002년 북의 경비정들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침범, 남측경비정을 공격해 해군 7명이 사망했었다. 올림픽과 월드컵으로 한국의 위상이 세계에 돋보이는 것을 시샘해서였다. 그 외에도 금강산에서 여자 관광객을 뒤에서 조준 사살했을 뿐만 아니라 천안함과 연평도 공격으로 많은 동포가 희생됐다. 최근에도 비무장지대 남쪽의 순찰로에 지뢰를 몰래 매설해 한국군을 살상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우리 민족 독립운동가들의 피 흘린 공로가 헛되지 않았지만, 연합국의 승리로 얻어진 결과였기에 외세에 의해서 전후 처리가 결정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군은 북한에, 미군은 남한에 1945년 9월 8일 진주하게 됐다.유럽에서 전범국인 독일이 연합군에게 분할 점령된 것과 같이 아시아에선 일본이 분할 점령됐어야 했는데 소련의 남진 야욕과 이에 방어한 미국에 의해 우리 한반도가 분단 통치되고 말았다. 그들은 일본 패전병력을 무장해제 하고 5년간의 신탁통치를 위해 진주한다고 했다. 모든 동포가 신탁통치를 반대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소련의 지령을 받은 공산 세력이 찬탁으로 돌변했다.
군정 기간에 남한에선 1946년 10월 대구폭동사건, 1948년 4.3 제주사건과 이에 관련한 여수 순천 반란사건 등이 일어나 10여만 명의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었다. 무력폭동 이전엔 남로당의 활동도 허용됐다.
북한은 6.25동란이 남쪽의 도발로 일어났다는 거짓말을 한다. 민족상잔의 범죄적 전쟁수단을 쓴 것은 비난받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통일됐었으면 하는 분들이 있겠으나 북한의 실정을 알고 보면 철없는 소치다. 통일은 민족의 번영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무 권리와 기아, 정치범 수용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자유를 위해 침략자를 물리친 미군의 참전은 정당했다. 북의 한미동맹 비난과 미군철수 주장은 한국을 고립시켜놓고 침략하려는 간교한 술책이다. 하지만, 북한과 같은 독재 치하에서 살려는 동포들은 없다.
1946년 6월에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발표했다고 비판하지만 1945년 9월 20일, 즉 8.15해방 37일 만에 스탈린은 북조선 단정 수립 지령을 내렸고 남북 재통합이 어렵게 신탁통치와 미소공동위원회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전쟁 또한 미국을 견제하려던 스탈린의 작품으로 국제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이승만의 항일태도는 높이 살만하며 한미 방위 조약은 훗날 고도성장을 보장해준 안보환경을 조성했고 수입대체 산업화는 수입품을 국산화하는 전략이었다. 또한, 지주제 해체, 자작농의 토지소유등을 효과적으로 이룩한 면도 있다. 남한에서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토지를 분배받아 매년 농사지은 작물로 5년 동안 분할상환을 하면 자기토지가 됐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이승만 정권의 지지층이 되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의회와 복수정당 정치를 열고 전쟁 중에도 대통령 선거를 했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4.19 학생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1960년 3월 15일 정 부통령 부정선거가 계기였다.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으나 각종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9개월 후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부가 정변을 일으켜 군정을 했다. 민주화 운동은 5.16 군사 쿠데타 후 철저한 탄압을 받아 잠잠하다가 유신 개헌 후부터 다시 활발해졌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혁과 국가안보에는 굳건했으나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하고 장기집권을 꾀했던 것에 반대하게 된 것이다.
보수계에서는 김대중, 김영삼 씨 계 인사들이 큰 주류를 이루고 원 내외에서 투쟁 했으며 혁신계에서는 김철 씨 계가 비밀리에 재야의 각계 지도자들을 망라한 74년 11월의 조국 민주회복 국민회의를 조직하는 등 형극의 투쟁을 하였다.
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순수하게 남한의 민주화와 인권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언론은 특정인사의 이름도 못 쓰고 재야인사 라고만 썼고 혁신계의 성명이나 투쟁사실은 기사화할 수 없어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아 신문의 행간을 읽고 눈치채야 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빈발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광역시에 계엄군을 투입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며 진압했다. 그러나 강권 통치를 반대하는 국민의 저항은 줄기차게 이어져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직접선거가 수용됐다.
한편 미군이 광주시위 진압군 출동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고 청년학생층에서 반미여론이 생겼다.
이에 편승한 북의 주체사상 선전과 조직공작으로 80년대 부터 종 북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종 북 반미에 머리가 굳어진 세력들은 국민의 정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력적 시위를 하며. 이북 편들기에 매달리고 있다.
그간 북한은 한반도에서 위기를 만들어 왔다.1968년 1월 21일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정규군 특수 부대원 31명을 남파한 사건,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울진,삼척지역에 무장공작원 120명을 침투시켜 양민들을 학살했던 사건이 있었고, 김정일이 대남공작을 담당하던 시기였던 1983년 10월 9일에는 미얀마에서 남한 각료 17명을 폭발물로 죽였고 1987년 11월 29일에는 올림픽 개최를 무산시키려고 KAL 858기를 공중폭파했다. 최근 2002년 북의 경비정들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침범, 남측경비정을 공격해 해군 7명이 사망했었다. 올림픽과 월드컵으로 한국의 위상이 세계에 돋보이는 것을 시샘해서였다. 그 외에도 금강산에서 여자 관광객을 뒤에서 조준 사살했을 뿐만 아니라 천안함과 연평도 공격으로 많은 동포가 희생됐다. 최근에도 비무장지대 남쪽의 순찰로에 지뢰를 몰래 매설해 한국군을 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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