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지 말아야 했을 38선/ 남북 모두
박형서
2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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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교회는 나라 사랑 하나님 사랑의 공동체
국군의 날의 유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호전되어 북진을 하던 UN군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해야 할 것인가, 멈추어야 할 것인가? 한국과 미국 사이에 미묘한 견해차가 나타났다.
미국이 6·25전쟁에 개입할 때는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격퇴한다”는 것으로, 1950년 6월27 일의 유엔 결의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군 격퇴 후에 전쟁을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구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 무렵, 美 정부 내에선 북한군 격퇴 후 취할 행동에 대해 의견이 분열되어 있었다. 국무부는 유엔군의 공동행동에 의해 한반도의 통일을 해야 할 것이라는 極東局(극동국) 의 견해와 38선 에서 일시 정지, 정치적 해결을 꾀해야 할 것이라는 정책기획실의 의견이 대립했다. 前者(전자)는, 38선에서의 정지는 북한군 再(재)침공의 우려가 남게 되고, 진격 중의 군을 38선에서 정지시키는 것은 곤란하며, 억지로 정지시키면 38선이 영구적 국경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後者(후자)는, 38선의 돌파는 소련·中共의 개입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했고 CIA도 그 가능성에 대해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당초부터 북한군 격멸이 제1의 목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38선 돌파도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 같은 맥아더의 판단에 이끌려 국방성도 통합참모본부도 점차 북진론에 기울고 있었다. 이리하여 미국 정부 내에서 의견 차이에 의해 국가안전보장회의 에서의 의견 통일이 늦어져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NCC81/1)을 얻은 것은 인천상륙작전 직전인 9월11일이었다. 그 내용은, 38선 이북에의 진군을 승인하지만, 소련과 중국의 개입이 없는 경우에 限(한)한다는 조건이 붙은 것이었다. 통합참모본부는 9월27일, 맥아더 원수에게 다음 요지의 지령을 보냈다.
<유엔군의 군사목적은 북한군의 격멸에 있다. 이를 위해 38선 이북에의 진격을 허가한다. 단, 소련 및 중국의 개입의 事實(사실)도 意圖(의도)도 없는 경우에 한한다. 또 이것은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북한에의 진격계획을 立案(입안)할 것. 단, 실행은 대통령에 의함.>
28일, 맥아더 원수는 작전구상을 워싱턴에 보냈고, 다음날 29일 통합참모본부는 그 계획을 승인하여 맥아더 원수에게 계획의 실행을 명했다. 그날 동해안에서는 국군 제3사단이 38선에 도달해 있었다.
맥아더 원수는 통합참모본부에 “제8군에 38선의 돌파를 명해도 좋은가?”라고 물었지만, 참모본부는 “이 이상 설명 및 발표를 하지 말고, 귀하의 작전을 계속하라”고 답할 뿐이었다. 38선의 돌파는 전쟁목적의 변경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조건으로 中蘇 개입의 판단을 현지의 군사령관 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였다.
李 대통령의 의지에 따른 국군의 38선 단독 돌파 한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이 38선을 먼저 넘은 이상, 이미 38선은 존재 하지 않는 다고 표명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는 “우리가 38선에서 정지할 이유는 없다”고 밝혔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생각은 국군을 38선 단독 돌파의 방향으로 이끄는 데 한 몫을 했다.
국군이 38선에 도착한 다음날인 9월30일, 이 대통령은 국군의 38선 돌파를 정일권 참모총장 에게 명령했다. 정치와 軍事(군사) 사이에 처했던 丁 총장은 고민했다. 심정적으로는 대통령과 똑같았다.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大田協定(대전협정)에 의거해 유엔군사령관에게 있었고, 한국 육군은 美 제8군의 작전통제를 받고 있었다. 마음대로 국군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다음은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 《전쟁과 휴전》에서 인용한 것이다.
<서울이 완전 탈환된 이틀 후인 9월30일 오후 부산 경무대에서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육군본부의 참모들과 함께 오라는 것이었다. 나를 비롯한 육본 참모들은 경비행기를 타고 대구 동촌비행장을 출발했다. (중략)
“丁 총장, 간밤에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들었는데, 38선에 도달한 부대는 어느 부대 입니 까?”
나는 李鍾贊 준장의 제3사단과 宋堯讚 준장의 수도사단이라고 보고했다.
이 대통령은 “사단 이름이 아니라 연대 이름이 무엇이냐?” 고 다시 물었다.
金淙舜(김종순) 대령의 제23연대와 任忠植(임충식) 대령의 제18연대라고 설명했다.
이대통령은 이들 부대를 특별히 표창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丁 총장…”
이 대통령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丁 총장은 어느 쪽인가, 미군 쪽인가”
이 대통령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은 한참 후에였다. 이 대통령은 각 참모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다음 질문에 앞서 다짐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丁 총장, 그리고 여러분들, 실례인줄 알면서도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우리 모두는 눈을 감았다. 이대통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러분, 38선에 도달한 우리 국군에게 어찌해서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소? 38선 때문인가, 아니면 딴 이유 때문인가?”
꾸중이었다. 실내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8선 때문입니다”
이어 나는 워커 중장과의 이야기를 간추려서 보고했다(注: 워커 중장은 “미 제8군의 38선 돌 파는 1950년 10월15일~30일 사이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 맥아더의 복안이라고 丁 총장에 게 귀띔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38선이 어찌 됐다는 건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건가?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건가? 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단 말인가?”
이때처럼 이 대통령이 노여워하는 것을 본 적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졸자는 40년 기자생활 중에 6·25 전쟁의 名將(명장)들을 두루 만나는 기회를 누렸다. 특히 1950년대에 대장이 되었던 세 분 모두를 여러 번에 걸쳐 인터뷰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다 대장이 될 만한 인물들이었다.‘국군 제1의 파이터’이며 최초의 4성 장군인 백선엽 장군은 인내심이 강하면서 학구적인 군인, ‘대한민국 군번 1번’이형근 대장은 콧대 높은 美 고문관에 게 기합을 줄 만큼 자의식·자존심이 강한 군인이었다. 이 대통령은 美軍 앞에 기를 못 펴는 국군 장군에 대해 여봐란 듯 이형근 장군에게 별 4개를 달아 주었던 것이다.
‘丁마담’이란 별명을 지닌 정일권 대장은 강한 개성의 李 대통령과‘甲(갑)’의 입장이었던 유엔군 수뇌 사이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 名不虛傳(명불허전)이었다. 졸자는 1970년대 중반 裡里驛 (이리역) 폭발사고 현장을 위로 방문하는 정일권 국회의장을 수행·취재하면서 “과연!” 하고 감탄한 바 있다. 그것은 故人(고인)의 개인적 명예와 관련한 일이므로 여기선 밝힐 순 없다. 정일권 대장은 作故하기 전 졸자에게 회고록 집필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이를 개인적인 사정으로 수락하지 못했다. 나는 이 점을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다시 그의 회고록의 인용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노기에 실내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한참 후에 이 대통령은 인사국장 黃憲親(황헌친) 대령에게 물었다.“인사국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38선을 넘어도 되는 것인가, 안 되는 것인가?”
황대령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각하의 명령이라면 국군은 언제라도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통령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어 정보국장 張都暎(장도영) 대령, 작전국장 姜文奉(강문봉) 대령에게도 차례로 물었다.
모두 황대령과 같은 대답을 했다. 특히 강대령은 유엔이 북괴군을 침략자로 낙인을 찍은 이상 도망치는 침략자를 추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헌병사령관 崔慶祿(최경록) 대령은 38선은 이미 북괴군이 남침하면서 없어졌으므로 우리 국군만 이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흡족할 때의 표정이었다.
그런데 군수국장 楊國鎭(양국진) 대령만은 조금 달랐다.
“각하 좀더 신중히 검토한 다음에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무슨 뜻인가?”
이 대통령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
이 대통령은 끝으로 나의 결심을 물었다.
“저희들은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유엔군과의 지휘권 문제가 있습니다만, 각하의 명령에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를 갖고 있습니다. 38선 돌파는 이제 시간 문제입니다. 명령만 내리신다면 제가 현지에 가서 책임지고 결정하겠습니다.”
이 대통령은 잠시 후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의 의견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네다. 나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우리 국군 지휘권을 맡기 기는 했으나, 내가 자진해서 한 것입네다. 따라서 되찾아 올 때도 내 뜻대로 할 것이오. 지휘권을 가지 고 이러쿵저러쿵 따질 일 없습네다. 그러한 즉 대한민국 국군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 실히 지켜 주면 되는 것이오.”
이 대통령은 이어 책상으로 걸어갔다.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것이 나의 결심이고, 나의 명령이오”
이 대통령은 그 종이를 나에게 주었다.
‘명령,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
경무대를 나온 후 나는 부산에서 강릉으로 직행했다.>
참모총장 이하 육본 참모들과의 사이에 벌어진 논의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6·25가 발발한 그 해, 이 대통령은 75세, 장군들은 30세 안팎이라 경륜 많은 할아버지 와 어린 손자 들과의 대화처럼 느껴진다.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 70세, 美 제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중장 60세였다. 둘 모두 웨 스트포인트를 졸업 후 美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지만, 조지 워싱턴 대학 학사, 하바드 대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 박사인 이승만 대통령이 그들에게 밀릴 것은 전혀 없었다. 동서양의 학문을 겸비한 이승만은 조선조 말기에 민족주의 운동을 하다가 무기징역수로 복역하면서 《英韓(영한)사전》을 저술 했고,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40년 여 간은 망명 생활을 했던 독립투사였다.
국군의 38선 돌파
경무대를 나온 후 정일권 총장은 부산에서 江陵(강릉)으로 직행했다. 당시 강릉에는 제1군단사 령부가 있었다. 제1군단 예하의 2개 연대가 이미 38선까지 북상해 있었음은 앞에서 썼다. 제1군단장은, 丁 총장과 만주 奉天(봉천)군관학교 재학 중에 1~2위를 다투던 동기생인 金白一 (김백일) 준장이었다. 김백일 장군에게 丁 총장이 물었다.
“무슨 묘안이 없을까?”
김백일 준장은 갑자기 “있다. 있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5만분의 1 사이즈의 작전 지도를 펴 놓았다.
“바로 여기야!”라면서 한 지점을 짚었다. 基士門里(기사문리)라고 적힌 38선 바로 북쪽의 조그마한 항구였다.
“여길 보라구. 38선에서 약 800m야. 여기서 敵의 직사포탄이 심심찮게 날아와. 이곳을 이용하 자고.”
당시 敵은 기사문리의 敵陣에서 국군 23연대를 향해 맹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金 군단 장의 논리는 이러했다.
‘我軍(아군)의 희생이 적지 않는데, 총 한발 못 쏘고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 38선 때문이다. 앉아서 당할 수 없다. 잠깐 38선을 넘을 수밖에 없다. 美 8군은 이걸 이해해 달라.’
丁일권 총장은 이런 논리로 워커 중장을 설득해 동의를 얻었다. 그리곤 38선에서 대기 중인 제23연 대로 가 “즉각 북진하라”고 명했다. 10월1일 오전 11시25분이었다.
그 후, 국군의 돌격은 기정 사실화 되었다. 그래서 3.8선을 넘어 북진한 매년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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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교회는 나라 사랑 하나님 사랑의 공동체
국군의 날의 유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호전되어 북진을 하던 UN군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해야 할 것인가, 멈추어야 할 것인가? 한국과 미국 사이에 미묘한 견해차가 나타났다.
미국이 6·25전쟁에 개입할 때는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격퇴한다”는 것으로, 1950년 6월27 일의 유엔 결의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군 격퇴 후에 전쟁을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구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 무렵, 美 정부 내에선 북한군 격퇴 후 취할 행동에 대해 의견이 분열되어 있었다. 국무부는 유엔군의 공동행동에 의해 한반도의 통일을 해야 할 것이라는 極東局(극동국) 의 견해와 38선 에서 일시 정지, 정치적 해결을 꾀해야 할 것이라는 정책기획실의 의견이 대립했다. 前者(전자)는, 38선에서의 정지는 북한군 再(재)침공의 우려가 남게 되고, 진격 중의 군을 38선에서 정지시키는 것은 곤란하며, 억지로 정지시키면 38선이 영구적 국경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後者(후자)는, 38선의 돌파는 소련·中共의 개입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했고 CIA도 그 가능성에 대해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당초부터 북한군 격멸이 제1의 목적이고, 이를 위해서는 38선 돌파도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 같은 맥아더의 판단에 이끌려 국방성도 통합참모본부도 점차 북진론에 기울고 있었다. 이리하여 미국 정부 내에서 의견 차이에 의해 국가안전보장회의 에서의 의견 통일이 늦어져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NCC81/1)을 얻은 것은 인천상륙작전 직전인 9월11일이었다. 그 내용은, 38선 이북에의 진군을 승인하지만, 소련과 중국의 개입이 없는 경우에 限(한)한다는 조건이 붙은 것이었다. 통합참모본부는 9월27일, 맥아더 원수에게 다음 요지의 지령을 보냈다.
<유엔군의 군사목적은 북한군의 격멸에 있다. 이를 위해 38선 이북에의 진격을 허가한다. 단, 소련 및 중국의 개입의 事實(사실)도 意圖(의도)도 없는 경우에 한한다. 또 이것은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북한에의 진격계획을 立案(입안)할 것. 단, 실행은 대통령에 의함.>
28일, 맥아더 원수는 작전구상을 워싱턴에 보냈고, 다음날 29일 통합참모본부는 그 계획을 승인하여 맥아더 원수에게 계획의 실행을 명했다. 그날 동해안에서는 국군 제3사단이 38선에 도달해 있었다.
맥아더 원수는 통합참모본부에 “제8군에 38선의 돌파를 명해도 좋은가?”라고 물었지만, 참모본부는 “이 이상 설명 및 발표를 하지 말고, 귀하의 작전을 계속하라”고 답할 뿐이었다. 38선의 돌파는 전쟁목적의 변경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조건으로 中蘇 개입의 판단을 현지의 군사령관 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였다.
李 대통령의 의지에 따른 국군의 38선 단독 돌파 한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이 38선을 먼저 넘은 이상, 이미 38선은 존재 하지 않는 다고 표명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는 “우리가 38선에서 정지할 이유는 없다”고 밝혔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생각은 국군을 38선 단독 돌파의 방향으로 이끄는 데 한 몫을 했다.
국군이 38선에 도착한 다음날인 9월30일, 이 대통령은 국군의 38선 돌파를 정일권 참모총장 에게 명령했다. 정치와 軍事(군사) 사이에 처했던 丁 총장은 고민했다. 심정적으로는 대통령과 똑같았다.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大田協定(대전협정)에 의거해 유엔군사령관에게 있었고, 한국 육군은 美 제8군의 작전통제를 받고 있었다. 마음대로 국군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다음은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 《전쟁과 휴전》에서 인용한 것이다.
<서울이 완전 탈환된 이틀 후인 9월30일 오후 부산 경무대에서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육군본부의 참모들과 함께 오라는 것이었다. 나를 비롯한 육본 참모들은 경비행기를 타고 대구 동촌비행장을 출발했다. (중략)
“丁 총장, 간밤에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들었는데, 38선에 도달한 부대는 어느 부대 입니 까?”
나는 李鍾贊 준장의 제3사단과 宋堯讚 준장의 수도사단이라고 보고했다.
이 대통령은 “사단 이름이 아니라 연대 이름이 무엇이냐?” 고 다시 물었다.
金淙舜(김종순) 대령의 제23연대와 任忠植(임충식) 대령의 제18연대라고 설명했다.
이대통령은 이들 부대를 특별히 표창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丁 총장…”
이 대통령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丁 총장은 어느 쪽인가, 미군 쪽인가”
이 대통령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은 한참 후에였다. 이 대통령은 각 참모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다음 질문에 앞서 다짐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丁 총장, 그리고 여러분들, 실례인줄 알면서도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우리 모두는 눈을 감았다. 이대통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러분, 38선에 도달한 우리 국군에게 어찌해서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소? 38선 때문인가, 아니면 딴 이유 때문인가?”
꾸중이었다. 실내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8선 때문입니다”
이어 나는 워커 중장과의 이야기를 간추려서 보고했다(注: 워커 중장은 “미 제8군의 38선 돌 파는 1950년 10월15일~30일 사이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 맥아더의 복안이라고 丁 총장에 게 귀띔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38선이 어찌 됐다는 건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건가?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건가? 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단 말인가?”
이때처럼 이 대통령이 노여워하는 것을 본 적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졸자는 40년 기자생활 중에 6·25 전쟁의 名將(명장)들을 두루 만나는 기회를 누렸다. 특히 1950년대에 대장이 되었던 세 분 모두를 여러 번에 걸쳐 인터뷰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다 대장이 될 만한 인물들이었다.‘국군 제1의 파이터’이며 최초의 4성 장군인 백선엽 장군은 인내심이 강하면서 학구적인 군인, ‘대한민국 군번 1번’이형근 대장은 콧대 높은 美 고문관에 게 기합을 줄 만큼 자의식·자존심이 강한 군인이었다. 이 대통령은 美軍 앞에 기를 못 펴는 국군 장군에 대해 여봐란 듯 이형근 장군에게 별 4개를 달아 주었던 것이다.
‘丁마담’이란 별명을 지닌 정일권 대장은 강한 개성의 李 대통령과‘甲(갑)’의 입장이었던 유엔군 수뇌 사이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 名不虛傳(명불허전)이었다. 졸자는 1970년대 중반 裡里驛 (이리역) 폭발사고 현장을 위로 방문하는 정일권 국회의장을 수행·취재하면서 “과연!” 하고 감탄한 바 있다. 그것은 故人(고인)의 개인적 명예와 관련한 일이므로 여기선 밝힐 순 없다. 정일권 대장은 作故하기 전 졸자에게 회고록 집필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이를 개인적인 사정으로 수락하지 못했다. 나는 이 점을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다시 그의 회고록의 인용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노기에 실내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한참 후에 이 대통령은 인사국장 黃憲親(황헌친) 대령에게 물었다.“인사국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38선을 넘어도 되는 것인가, 안 되는 것인가?”
황대령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각하의 명령이라면 국군은 언제라도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통령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어 정보국장 張都暎(장도영) 대령, 작전국장 姜文奉(강문봉) 대령에게도 차례로 물었다.
모두 황대령과 같은 대답을 했다. 특히 강대령은 유엔이 북괴군을 침략자로 낙인을 찍은 이상 도망치는 침략자를 추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헌병사령관 崔慶祿(최경록) 대령은 38선은 이미 북괴군이 남침하면서 없어졌으므로 우리 국군만 이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흡족할 때의 표정이었다.
그런데 군수국장 楊國鎭(양국진) 대령만은 조금 달랐다.
“각하 좀더 신중히 검토한 다음에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무슨 뜻인가?”
이 대통령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
이 대통령은 끝으로 나의 결심을 물었다.
“저희들은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유엔군과의 지휘권 문제가 있습니다만, 각하의 명령에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를 갖고 있습니다. 38선 돌파는 이제 시간 문제입니다. 명령만 내리신다면 제가 현지에 가서 책임지고 결정하겠습니다.”
이 대통령은 잠시 후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의 의견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네다. 나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우리 국군 지휘권을 맡기 기는 했으나, 내가 자진해서 한 것입네다. 따라서 되찾아 올 때도 내 뜻대로 할 것이오. 지휘권을 가지 고 이러쿵저러쿵 따질 일 없습네다. 그러한 즉 대한민국 국군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 실히 지켜 주면 되는 것이오.”
이 대통령은 이어 책상으로 걸어갔다.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것이 나의 결심이고, 나의 명령이오”
이 대통령은 그 종이를 나에게 주었다.
‘명령,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
경무대를 나온 후 나는 부산에서 강릉으로 직행했다.>
참모총장 이하 육본 참모들과의 사이에 벌어진 논의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6·25가 발발한 그 해, 이 대통령은 75세, 장군들은 30세 안팎이라 경륜 많은 할아버지 와 어린 손자 들과의 대화처럼 느껴진다.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 70세, 美 제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중장 60세였다. 둘 모두 웨 스트포인트를 졸업 후 美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지만, 조지 워싱턴 대학 학사, 하바드 대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 박사인 이승만 대통령이 그들에게 밀릴 것은 전혀 없었다. 동서양의 학문을 겸비한 이승만은 조선조 말기에 민족주의 운동을 하다가 무기징역수로 복역하면서 《英韓(영한)사전》을 저술 했고,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40년 여 간은 망명 생활을 했던 독립투사였다.
국군의 38선 돌파
경무대를 나온 후 정일권 총장은 부산에서 江陵(강릉)으로 직행했다. 당시 강릉에는 제1군단사 령부가 있었다. 제1군단 예하의 2개 연대가 이미 38선까지 북상해 있었음은 앞에서 썼다. 제1군단장은, 丁 총장과 만주 奉天(봉천)군관학교 재학 중에 1~2위를 다투던 동기생인 金白一 (김백일) 준장이었다. 김백일 장군에게 丁 총장이 물었다.
“무슨 묘안이 없을까?”
김백일 준장은 갑자기 “있다. 있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5만분의 1 사이즈의 작전 지도를 펴 놓았다.
“바로 여기야!”라면서 한 지점을 짚었다. 基士門里(기사문리)라고 적힌 38선 바로 북쪽의 조그마한 항구였다.
“여길 보라구. 38선에서 약 800m야. 여기서 敵의 직사포탄이 심심찮게 날아와. 이곳을 이용하 자고.”
당시 敵은 기사문리의 敵陣에서 국군 23연대를 향해 맹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金 군단 장의 논리는 이러했다.
‘我軍(아군)의 희생이 적지 않는데, 총 한발 못 쏘고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 38선 때문이다. 앉아서 당할 수 없다. 잠깐 38선을 넘을 수밖에 없다. 美 8군은 이걸 이해해 달라.’
丁일권 총장은 이런 논리로 워커 중장을 설득해 동의를 얻었다. 그리곤 38선에서 대기 중인 제23연 대로 가 “즉각 북진하라”고 명했다. 10월1일 오전 11시25분이었다.
그 후, 국군의 돌격은 기정 사실화 되었다. 그래서 3.8선을 넘어 북진한 매년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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