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島를 지켜 낸 것은 이승만 이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의하면, 1955년 12월 1일 부산에서 재부(在釜) 수산단체가 '평화선 사수 어민 총궐기 대회'를 열었으며 이후 '백만 어민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자' 맥아더 라인(Mac Arthur Line·맥선)의 철폐 반대등 이승만 라인(Rhee Line·평화선·Peace Line)의 설정을 지지하는 국민 대회가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었다.
'맥아더 라인'은 미군이 일본을 점유하고 있던 1945년 9월 2일 미국의 극동 주둔군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연합군 총사령부 지령 제1호로 모든 일본 선박의 이동을 금지한 후, 1945년 10월 일본인의 어로 활동 범위를 정식으로 획정한 제한선이 맥아더 라인으로 지정된 후 세 차례에 걸친 확장 끝에 일본과의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일명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1952. 4. 28.)되면서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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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島를 지켜 낸 것은 이승만 이었다!'
이승만 초대는 1952년1월, 6.25 전쟁중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여 獨島를 확보했다. 침범한 일본 배 수백 척, 어부 수천 명을 붙들었다.
1945년 9월27일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일본점령과 함께 일본인의 어업활동을 일정 水域으로 한정하는 맥아더 라인을 선포하였다. 이 맥아더 라인에 대해서 미국은 일본에 일본을 방위하는 군사경계선이라고 선전하였고, 한국에 대하여는 한국의 主權이 미치는 水域경계선이라고 통고하였다.
이후 1951년 9월8일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은 미국 및 캐나다와의 〈어업회담〉을 진행하였는데, 이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던 〈한·일 예비회담〉에서 한국은 일본에 대해 어업협상을 시작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구실을 내세워 시간만 끌었는데,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 대하여 한국은 일본이 맥아더 라인의 철폐를 기대하여 그 후에 회담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월18일, 일본이 〈어업회담〉을 거절한 지 2주 만에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였다. 한국은 이 선언이 “한·일 양국의 평화유지에 목적이 있다”고 명분을 밝혔는데, 이에 따라 소위 ‘평화선(平和線)’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선포된 평화선의 배경에는 韓日 간 어선수와 어업기술의 심한 격차, 그에 따른 어업자원 및 대륙붕 자원 보호의 필요성, 임박한 맥아더 라인의 철폐에 대한 보완, 세계 각국의 영해 확장 및 주권적 전관화(專管化) 추세 등의 상황에 대한 대처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평화선은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하였다 하여 ‘이승만 라인’ 또는 ‘이 라인(Lee Line)’이라고도 불렸는데, 해안에서부터 평균 60海里에 달하며 그 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인접해역과 연해안의 上下에 현존하거나 혹은 장래에 발견될 광물, 해산물 등 모든 자연자원을 보호·개발하기 위하여 국가의 주권을 보전하며 또 행사한다.
둘째, 대한민국 정부는 멸종될 우려가 있는 자원이 남획·감소·황폐되어 한국과 그 국민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 水域 내의 모든 자원과 이에 관련된 수산물을 정부의 감독·관리 하에 둔다.
셋째, 대한민국은 새로운 발견, 연구 혹은 이익 등 장래에 발생하는 새로운 정세에 맞추어 보호水域의 경계선을 수정할 수 있다.
넷째, 이 선언은 공해상의 자유항해권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한국의 평화선 선포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반대반응을 보인 것이 일본이었으며, 그 밖의 미국·영국·대만 등의 우방국들도 부당한 조치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일본은 평화선이 어업 및 어선에 대한 규제뿐만 아니라 獨島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 고등어 성수기가 다가옴으로써 수산청의 감시선뿐만 아니라 보안청의 함정까지 출동시켜 호위出漁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호위에 의한 출어를 감행하기 직전인 1952년 9월, 당시 유엔군 사령관인 M. W. 클라크 대장은 북한의 잠입을 막고, 전시(戰時) 밀수출입품의 해상침투를 봉쇄한다는 이유로 한반도 주변에 평화선과 거의 비슷한 범위의 해상방위水域을 설정하였다. 클라크 라인으로 불린 이 수역이 설정된 것은 한국전쟁이 격렬하던 당시, 한일 간의 충돌은 전쟁수행에 좋지않다는 미국의 판단에 의한 것으로, 미국은 일단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미국의 평화선에 대한 묵시적인 옹호 때문에 일본은 평화선에 대하여 강력한 행동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평화선이 선포된 후 일본은 즉각 〈어업회담〉의 재개를 요구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한일회담〉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선을 사용하려 하였고, 이로 인하여 〈어업회담〉은 일본의 평화선 철폐요구와 한국의 평화선 고수의 입장이 대립되어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선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1950년대 말부터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원조의 감소와 이로 인한 한국경제의 불황이라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일본자본의 도입에 의한 경제 불황의 해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평화선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에 의해 철폐, 어업에 관한 수역으로 대체되었다.>
항일 투사 이승만의 쾌거인 평화선이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 조인(1965년 6월 22일)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우리 국민은 울분을 토했다. “얻은 것은 돈이요, 잃은 것은 평화선이다.”
출처: New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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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뉴욕의'이평사랑회'에서는 '평화존중-한국해'를 주장하며 '한국의 동해와 일본의 서해가 되는 중간지점에 평화존중라인을 설치할 것을 제안합니다'관련 동영상을 'youtube'에 올린 바 있으며 제2의 평화라인설정을 기반으로 하는 평화통일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중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맥아더 라인'은 미군이 일본을 점유하고 있던 1945년 9월 2일 미국의 극동 주둔군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연합군 총사령부 지령 제1호로 모든 일본 선박의 이동을 금지한 후, 1945년 10월 일본인의 어로 활동 범위를 정식으로 획정한 제한선이 맥아더 라인으로 지정된 후 세 차례에 걸친 확장 끝에 일본과의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일명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1952. 4. 28.)되면서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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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島를 지켜 낸 것은 이승만 이었다!'
이승만 초대는 1952년1월, 6.25 전쟁중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여 獨島를 확보했다. 침범한 일본 배 수백 척, 어부 수천 명을 붙들었다.
1945년 9월27일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일본점령과 함께 일본인의 어업활동을 일정 水域으로 한정하는 맥아더 라인을 선포하였다. 이 맥아더 라인에 대해서 미국은 일본에 일본을 방위하는 군사경계선이라고 선전하였고, 한국에 대하여는 한국의 主權이 미치는 水域경계선이라고 통고하였다.
이후 1951년 9월8일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은 미국 및 캐나다와의 〈어업회담〉을 진행하였는데, 이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던 〈한·일 예비회담〉에서 한국은 일본에 대해 어업협상을 시작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구실을 내세워 시간만 끌었는데,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 대하여 한국은 일본이 맥아더 라인의 철폐를 기대하여 그 후에 회담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월18일, 일본이 〈어업회담〉을 거절한 지 2주 만에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였다. 한국은 이 선언이 “한·일 양국의 평화유지에 목적이 있다”고 명분을 밝혔는데, 이에 따라 소위 ‘평화선(平和線)’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선포된 평화선의 배경에는 韓日 간 어선수와 어업기술의 심한 격차, 그에 따른 어업자원 및 대륙붕 자원 보호의 필요성, 임박한 맥아더 라인의 철폐에 대한 보완, 세계 각국의 영해 확장 및 주권적 전관화(專管化) 추세 등의 상황에 대한 대처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평화선은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하였다 하여 ‘이승만 라인’ 또는 ‘이 라인(Lee Line)’이라고도 불렸는데, 해안에서부터 평균 60海里에 달하며 그 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인접해역과 연해안의 上下에 현존하거나 혹은 장래에 발견될 광물, 해산물 등 모든 자연자원을 보호·개발하기 위하여 국가의 주권을 보전하며 또 행사한다.
둘째, 대한민국 정부는 멸종될 우려가 있는 자원이 남획·감소·황폐되어 한국과 그 국민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 水域 내의 모든 자원과 이에 관련된 수산물을 정부의 감독·관리 하에 둔다.
셋째, 대한민국은 새로운 발견, 연구 혹은 이익 등 장래에 발생하는 새로운 정세에 맞추어 보호水域의 경계선을 수정할 수 있다.
넷째, 이 선언은 공해상의 자유항해권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한국의 평화선 선포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반대반응을 보인 것이 일본이었으며, 그 밖의 미국·영국·대만 등의 우방국들도 부당한 조치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일본은 평화선이 어업 및 어선에 대한 규제뿐만 아니라 獨島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 고등어 성수기가 다가옴으로써 수산청의 감시선뿐만 아니라 보안청의 함정까지 출동시켜 호위出漁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호위에 의한 출어를 감행하기 직전인 1952년 9월, 당시 유엔군 사령관인 M. W. 클라크 대장은 북한의 잠입을 막고, 전시(戰時) 밀수출입품의 해상침투를 봉쇄한다는 이유로 한반도 주변에 평화선과 거의 비슷한 범위의 해상방위水域을 설정하였다. 클라크 라인으로 불린 이 수역이 설정된 것은 한국전쟁이 격렬하던 당시, 한일 간의 충돌은 전쟁수행에 좋지않다는 미국의 판단에 의한 것으로, 미국은 일단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미국의 평화선에 대한 묵시적인 옹호 때문에 일본은 평화선에 대하여 강력한 행동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평화선이 선포된 후 일본은 즉각 〈어업회담〉의 재개를 요구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한일회담〉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선을 사용하려 하였고, 이로 인하여 〈어업회담〉은 일본의 평화선 철폐요구와 한국의 평화선 고수의 입장이 대립되어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선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1950년대 말부터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원조의 감소와 이로 인한 한국경제의 불황이라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일본자본의 도입에 의한 경제 불황의 해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평화선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에 의해 철폐, 어업에 관한 수역으로 대체되었다.>
항일 투사 이승만의 쾌거인 평화선이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 조인(1965년 6월 22일)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우리 국민은 울분을 토했다. “얻은 것은 돈이요, 잃은 것은 평화선이다.”
출처: New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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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뉴욕의'이평사랑회'에서는 '평화존중-한국해'를 주장하며 '한국의 동해와 일본의 서해가 되는 중간지점에 평화존중라인을 설치할 것을 제안합니다'관련 동영상을 'youtube'에 올린 바 있으며 제2의 평화라인설정을 기반으로 하는 평화통일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중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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