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내 마음의 隨筆] AI(人工知能) 시대(時代)에 왜 최립(崔岦)인가

2026.03.16

[내 마음의 隨筆]




오늘 우리는 AI(人工知能)가 인간(人間)의 사고(思考)를 보조(補助)하고 때로는 대신(代身)하는 시대(時代)에 살고 있다. 알고리즘(算法)은 방대한 정보(情報)를 순식간(瞬息間)에 분석(分析)하고, 기계(機械)는 인간(人間)보다 빠르게 계산(計算)하며, 지식(知識)의 축적(蓄積) 속도(速度)는 이전 어느 시대(時代)보다도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기술(技術)의 발전(發展)은 놀라울 만큼 눈부시지만, 그 속에서 인간(人間)은 새로운 질문(質問)과 마주하게 된다.


그 질문(質問)은 단순(單純)하다. 인간다운 지성(知性)이란 무엇인가. 기술(技術)이 인간(人間)의 능력(能力)을 확장(擴張)하는 시대(時代)에, 인간(人間)만이 지닐 수 있는 사유(思惟)의 깊이(深度)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이 지점(地點)에서 우리는 다시 인문(人文)적 전통(傳統)과 지성(知性)의 뿌리를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질문(質問) 앞에서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한 인물(人物)이 떠오른다. 그는 단순(單純)한 문인(文人)이 아니라 시인(詩人), 철학자(哲學者), 교육자(敎育者), 사상가(思想家)의 면모(面貌)를 함께 지닌 인물(人物)이었다. 바로 최립(崔岦)이다.


최립(崔岦)은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대표적(代表的)인 지식인(知識人)이었으며, 학문(學問)과 문학(文學), 자연(自然)과 인간(人間)의 문제(問題)를 깊이 탐구(探究)한 사상가(思想家)였다. 그의 삶(人生)과 글(文章)을 살펴보면 그는 특정(特定)한 학문(學問) 분야(分野)에만 머무른 인물(人物)이 아니라 넓은 지적(知的) 세계(世界)를 넘나든 르네상스형(型) 인물(人物)이었다.


그의 글(文章)을 읽다 보면 무엇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사유(思惟)의 깊이(深度)이다. 그는 자연(自然)을 바라보며 인간(人間)의 마음(心)을 성찰(省察)했고, 짧은 시(詩) 속에 삶(人生)의 의미(意味)를 담아냈다. 이러한 사색(思索)은 빠른 정보(情報) 처리(處理)와는 다른 차원(次元)의 지적(知的) 활동(活動)이다.


AI(人工知能)는 데이터(資料)를 분석(分析)하고 문장(文章)을 생성(生成)하는 능력(能力)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자연(自然)을 바라보며 삶(人生)의 의미(意味)를 성찰(省察)하는 인간적(人間的) 경험(經驗)은 단순한 계산(計算)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최립(崔岦)의 시(詩)와 산문(散文)이 지금까지도 읽히는 이유(理由)는 바로 그 깊은 인간적(人間的) 통찰(洞察) 때문이다.


최립(崔岦)의 사유(思惟)에는 또 하나의 특징(特徵)이 있다. 그것은 정관(靜觀)의 태도(態度)이다. 그는 세상(世上)을 서둘러 판단(判斷)하기보다 조용히 바라보며 그 의미(意味)를 이해(理解)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態度)는 정보(情報)의 속도(速度)가 지배(支配)하는 오늘의 시대(時代)에 더욱 중요한 지적(知的) 자세(姿勢)가 된다.


현대(現代) 사회(社會)에서는 수많은 정보(情報)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밀려온다. 우리는 하루(一日)에도 수백(數百) 개의 메시지(消息)와 뉴스(新聞), 데이터(資料)를 접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情報)의 홍수(洪水) 속에서 깊은 생각(思考)을 할 시간(時間)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최립(崔岦)의 글(文章)을 읽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속도(速度)를 늦추게 된다. 그의 시(詩)는 길지 않지만 그 안에는 긴 사색(思索)의 시간(時間)이 담겨 있다. 한 줄(行)의 시(詩)를 읽고 잠시 멈추어 생각(思考)하게 만드는 힘(力)이 바로 그의 문학(文學) 속에 존재(存在)한다.


또한 최립(崔岦)은 자연(自然)과 인간(人間)의 관계(關係)를 깊이 이해(理解)한 사상가(思想家)였다. 그의 시(詩) 속에서 산(山)과 물(水), 바람(風)과 달(月)은 단순한 자연(自然)의 풍경(風景)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人間)의 마음(心)과 서로 공명(共鳴)하는 존재(存在)로 나타난다.


자연(自然)을 바라보며 인간(人間)을 이해(理解)하는 이러한 시선(視線)은 동아시아(東亞細亞) 인문(人文) 전통(傳統)의 중요한 특징(特徵)이다. 자연(自然) 속에서 인간(人間)의 삶(人生)을 성찰(省察)하는 태도(態度)는 오늘날 환경(環境)과 생태(生態)를 고민(苦悶)하는 시대(時代)에도 여전히 깊은 의미(意味)를 지닌다.


최립(崔岦)의 또 다른 특징(特徵)은 경계(境界)를 넘는 사고(思考)이다. 그는 문학(文學)과 철학(哲學)을 따로 분리(分離)하지 않았다. 시(詩) 속에는 철학(哲學)이 있고, 철학(哲學) 속에는 삶(人生)의 이야기(物語)가 있었다.


오늘날 학문(學問)은 점점 더 세분화(細分化)되고 전문화(專門化)되고 있다. 그러나 복잡(複雜)한 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양한 분야(分野)를 연결(連結)하는 통합적(統合的) 사고(思考)가 필요(必要)하다. 이런 점에서 최립(崔岦)의 지성(知性)은 현대(現代)의 융합적(融合的) 사고(思考)와도 닮아 있다.


AI(人工知能) 시대(時代)가 될수록 인간(人間)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單純)한 지식(知識)의 양(量)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영역(領域)을 연결(連結)하여 새로운 의미(意味)를 발견(發見)하는 능력(能力)이 중요(重要)해진다. 이러한 능력(能力)은 바로 인간(人間)의 창의적(創意的) 사유(思惟)에서 비롯된다.


최립(崔岦)의 삶(人生)은 또한 학문(學問)과 삶(人生)의 일치(一致)를 보여 준다. 그는 글(文章) 속에서 말한 가치(價値)들을 실제(實際) 삶(人生) 속에서도 실천(實踐)하려 했다. 그의 사유(思惟)는 단순(單純)한 이론(理論)이 아니라 삶(人生)의 태도(態度)였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지식(知識)을 가지고 있지만 삶(人生)과 연결(連結)된 지혜(智慧)는 점점 줄어드는 시대(時代)를 살고 있다. 지식(知識)이 삶(人生)을 비추지 못할 때 그것은 단지 정보(情報)에 머무르게 된다.


최립(崔岦)의 글(文章)은 우리에게 지혜(智慧)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한다. 지혜(智慧)란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삶(人生)의 의미(意味)를 깊이 이해(理解)하는 능력(能力)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통찰(洞察)은 시대(時代)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AI(人工知能)는 인간(人間)보다 빠르게 계산(計算)하고 더 많은 정보(情報)를 저장(貯藏)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人間)의 삶(人生)을 이해(理解)하고 그 의미(意味)를 성찰(省察)하는 능력(能力)은 여전히 인간(人間)의 영역(領域)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이유(理由)로 우리는 오늘 다시 최립(崔岦)을 읽게 된다. 그의 글(文章) 속에는 기술(技術)의 시대(時代)를 넘어서는 인간(人間) 정신(精神)의 깊이(深度)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AI(人工知能) 시대(時代)에 왜 최립(崔岦)인가. 그 답(答)은 어쩌면 단순(單純)하다. 기술(技術)이 아무리 발전(發展)하더라도 인간(人間)은 여전히 생각(思考)하고 성찰(省察)하는 존재(存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인간적(人間的) 사유(思惟)의 깊이(深度)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 주는 인물(人物) 가운데 한 사람(一人)이 바로 최립(崔岦)이다. 그의 글(文章)을 읽는 일(事)은 단지 옛 문인(文人)을 기억(記憶)하는 일이 아니라, 기술(技術)의 시대(時代) 속에서 인간(人間)의 정신(精神)을 다시 발견(發見)하는 일이기도 하다. ***


2026. 3. 16. 


崇善齋에서

{솔티}


English Translation: 

https://www.ktown1st.com/blog/VALover/348623

日本語 飜譯: https://www.ktown1st.com/blog/VALover/34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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