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1회] 첫 번째는 비극, 두 번째는 희극 그리고 절망

2018.12.01


박근혜(정권)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순전히 자기 아버지(박정희)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대통령이 되고, 측근 최순실과 더불어 ‘박ㆍ최게이트’의 주범으로 국민과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루이 나폴레옹은 1848년 12월 10일 삼촌 보나빠르뜨 나폴레옹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면서 정계에 입문하여 사회적 혼란기에 삼촌의 후광으로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권력욕이 강했던 루이는 삼촌의 방식을 좆아 1859년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하고 황제에 취임했다가 얼마 후 몰락했다. 무능과 부패, 직권남용 등의 이유 때문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 명성은 결코 헛되이 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진단’ 말이다. 그는 헤겔의 말을 인용하면서, 세계사의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에 걸쳐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굳이 사족이 필요하다면 보나빠르뜨 나폴레옹이 프랑스대혁명을 짓밟고 쿠데타를 일으킨 데 이어 유럽의 침략전쟁과 황제등극, 이후 몰락의 과정은 ‘비극’으로, 그의 조카 루이의 집권과 국정농단은 ‘희극’으로 평가한 것이다. 이를 한국현대사에 대입하면 영락없이 박정희의 쿠데타는 비극, 박근혜의 집권은 희극이라 하겠다.

 

역시 명불허전, 20세기의 대표적인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진단한다. 


“어디선가 마르크스는 역사가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했지만, 더 불행한 유형은 처음에는 비극이고 나중에는 절망이다.”(<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 


마치 박근혜가 한국사회를 절망으로 빠뜨린 것을 예견한 듯한 진단이다.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루이의 집권과정을 지켜 보면서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을 썼다. 그러면서 ‘예언’을 한 것이다. 루이 보나빠르뜨를 박근혜로 대입하면 어떨까 싶다. 


보나빠르뜨(루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모순된 요구에 의해 내몰리는 동시에 끊임없이 놀라운 일을 연출해 내면서 마술사처럼 나폴레옹의 대리자로서 자신에게 대중의 눈길을 고정시켜야 했고, 따라서 매일 소규모의 정변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르조아 경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1848년의 혁명에서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보였던 모든 것을 침해하며 어떤 사람에게는 혁명을 참도록 만들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혁명을 소망하게 하였으며 질서의 이름으로 실질적인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였다.

 

동시에 그는 모든 국가  기구로부터 후광을 벗겨내어 그것을 세속화하고 불쾌하면서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그는 트리예의 성의(聖衣), 숭배를 나폴레옹의 황제 외투 숭배의 형식으로 파리에서 재현한다. 그러나 마침내 황제의 망토가 루이 보나빠르뜨의 어깨에 걸쳐지는 그 순간, 나폴레옹의 동상은 방돔 기념비의 꼭대기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방돔 기념탑’은 나폴레옹 1세가 전리품으로 얻은 대포를 녹여서 1806년부터 1810년까지 4년간에 걸쳐 파리 광장에 세워진 건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념비는 방돔 기념탑에 설치된 비석을 말한다.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이 방돔 기념탑은 1871년 3월 16일 파리코뮌 때에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파리코뮌 정부의 법령은 방돔 기념탑이 “야만의 기념물, 잔혹한 폭력과 오명의 상징, 군국주의의 긍정, 국제적 정의의 부정, 패자에 대한 승자의 지속적인 모욕”으로 간주하여 파괴한다고 명시하고 나폴레옹 1세의 입상(동상)도 끌어 내려졌다. 

 

‘삼촌의 명예회복’을 내세우면서 그 위광으로 권력을 장악한 보나빠르뜨의 망동과 실정은 삼촌의 동상까지 끌어내려지고 ‘오명의 상징’으로 지탄된 ‘방돔 기념탑’은 마침내 시민들의 손으로 파괴되었다. 

 

1960년 4월혁명 과정에서 남산에 세워졌던 이승만의 거대한 동상이 시민들의 손으로 파괴되고, 2016년 겨울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혁명의 와중에 누군가가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 흉상의 얼굴에 빨간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박정희의 코는 망치로 찍었다. 군복 입은 박정희의 동상은 온통 빨간색으로 칠해지고 흉상 아래 좌대엔 “철거하라”는 빨간 글씨가 적혔다.

 


1966년부터 이 흉상이 위치한 곳은 박정희가 5ㆍ16 군사쿠데타를 모의했던 제6관구(수도방위사령부의 전신)가 있던 자리다. 육군소장 계급장을 달고 있는 젊은 날의 박정희의 모습을 옮겨놓은, 흉상이 1.8m 높이 좌대위에 위치해 있다. 박정희의 이 흉상은 2000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ㆍ민주노동당 당원 등 30여 명에 의해 한 번 철거되었다가 원위치로 돌아왔다. 

 

마르크스와 홉스봄의 지적대로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박정희의 5ㆍ16쿠데타는 비극이고,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민주주의 퇴행 등은 희극에 속하면서 절망이다. 보나빠르뜨 나폴레옹과 박정희는 프랑스대혁명과 4ㆍ19혁명으로 소생한 민주주의를 짓밟은 주역이고, 루이 보나빠르뜨와 박근혜는 그나마 선대들이 이룬 공적과 공화국에 절망을 안겨주었다는 동질성을 갖는다.(박정희와 나폴레옹을 동렬에 놓은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례를 찾는 것 뿐임을 밝힌다)

 

2016년 겨울과 2017년 벽두의 촛불시위는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정을 망친 박근혜의 퇴진과 아울러 이제까지 한국을 지배해온 반동적 보수세력의 중심가치인 ‘박정희 시스템’의 퇴진ㆍ청산이었다. 바꿔 말하면 ‘박정희 망령’을 쫓아내려는 시민혁명인 것이다. 



21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제10차 박근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 대회'에서 보수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대통령 탄핵 반대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 기각을 촉구하고 있다.ⓒ 유성호

박정희가 암살 당한 지 40여 년이 되었음에도 한국은 여전히 그의 추종자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정치학자와 언론에서는 ‘87년 체제’ 운운하지만, 제도는 바뀌었어도 인적 물적 구조는 ‘유신체제’의 지속이고, 더 소급하면 ‘5ㆍ16체제’의 연장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박근혜 탄핵과 김기춘 구속은 그 첫 단계에 불과하다.

 

박정희 출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을 쓰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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