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2회] 박정희의 실체와 허상

2018.12.01


2017년 출생 100주년을 맞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월 16일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18년 5개월 10일 동안 대한민국을 무소불위하게 통치한 인물이다. 그의 재임기간은 김영삼ㆍ김대중ㆍ노무현의 임기와 이명박의 임기 3분의 2 정도에 해당한다.

 해방 72주년인 대한민국이 미군정 3년, 이승만독재 12년, 박정희 독재 18년, 전두환ㆍ노태우 독재 13년 도합 45년을 제하면 형식적이나마 민주공화제 정부는 그 4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친다.

 1961년 5ㆍ16쿠데타로 18년간 집권한 박정희 체제는 전두환ㆍ노태우의 신군부 13년과 3당합당으로 군부세력에 입적했으나 서자 격인 김영삼 정부, 그리고 역시 적자 계열인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이상을 유지돼 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인물은 바뀌었지만 세력은 그대로였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수평적 정권교체는 청와대 주인만 바뀌었을 뿐, 국회ㆍ사법ㆍ검찰ㆍ재계ㆍ언론ㆍ대학ㆍ연구소 등 한국사회의 상층부, 지배구조는 대부분 박정희체제의 지속상태였다. 더 소급하면 일제강점기 친일세력에 닿고 이들의 뿌리는 조선조 노론 벽파 계열에 속한다.

 이들은 뿌리 깊고 몸통이 든든하며 가지가 왕성하다. “우리가 남이가”로 상징되는 끈끈한 지연ㆍ학연ㆍ혈연의 연결고리와 기득권이라는 물적기반, 범죄에도 면죄부를 안겨주는 검찰과 사법부, 항상 그들을 홍보하여 권력의 정통성을 만들어주는 족벌언론과 관제방송, 때마다 이념과 이론의 틀을 제공해주는 어용학자 그룹을 거느리고 있으며, 진보개혁 인사들을 용공 좌경ㆍ종북으로 매도하는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있다. 어버이연합 등 관제 어용단체의 동원력도 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처럼 애증이 갈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를 배출한 지역과 그로부터 특혜를 입은 계층, 18년 5개월 동안 정권의 고위직에 등용된 인물과 후예, 어용언론으로부터 장기간 세뇌받아 의식화된 노인층 등은 박정희를 신 또는 이에 버금하는 불세출의 지도자로 추앙한다.

 반대로 진보적 식자들, 소외지역과 계층, 그의 집권기간과 후계체제에서 고통을 겪은 민주인사들 그리고 항상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양심세력은 박정희를 용납할 수 없는 친일파ㆍ독재자로 비판한다.  

 이른바 광위의 ‘친박세력’과 동조자들은 경제발전의 공을 든다. 5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가난을 물리치고 먹고 살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화의 지도자, 부국의 아버지로 떠받든다. 심지어 출신지역의 자치단체장은 그를 추앙하여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과잉한다. ‘반신반인’ 이라면 괴물일 터 인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구ㆍ경북에 살고 있는 민주세력은 박정희 신화와 싸우고 있다.
 우리의 상대는 박근혜나 새누리당이 아니라 박정희다. 박정희를 가리키는 ‘반신반인’이라는 말에 모두 놀랐겠지만 이곳에서는 이 말이 오히려 겸양이다. 이곳에서 그는 온전한 ‘신’이다. 샤먼이다. 박정희 초상 앞에 촛불을 켜놓고 기복하는 모습을 이 지역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박정희 신화를 재생산하는 일은 쉬지 않고 진행됐다. 박정희 동상을 크게 세우고, 그의 최대 치적이라고 하는 새마을담론을 동원하면서 박정희 신화를 끊임없이 불러내고 있다.

 이승만 시절 한반도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었다. 일찍이 “태양이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은 있었으나, 태양이 두 개인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남한에서 이승만 추종자들은 ‘민족의 태양’이라 불렀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그렇게 불렀다. 지금 북쪽에서는 김일성의 ‘백두혈통’을 신처럼 추앙하고, 남쪽의 숭배자들은 박정희를 ‘반신반인’이라고 존경인지 욕설인지 헷갈리는 소리를 한다.

 박정희는 집권기간 군정 2년과 긴급조치 1~9호까지 5년 11개월을 비롯하여 계엄령ㆍ휴교령ㆍ위수령ㆍ국가비상사태령ㆍ유신쿠데타 등 비합법ㆍ반헌법적인 통치를 다반사로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무단통치자는 일제강점기를 제외하면 고려시대 최씨 일족의 무단지배와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인시대를 들 수 있다.

 그들의 집권기간에 경제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고, 이에 대한 평가에 인색해서는 안 되지만 엄청난 희생과 오늘까지 이어지는 짙은 그늘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박정희 경제발전’의 실체를 살펴보자.
 1962~1966년 7.8%, 1967~1971년 9.6%, 1972~1976년 9.6%, 1977~1981년 5.8%, 1982~1986년 9.8%, 1989~1991년 10.0% 수준이다. 우리 경제성장률이 박정희 시대보다 민주화 직후가 훨씬 높았음을 보여준다.

 일제가 항구와 신작로를 만드는 등 조선의 개발에 기여했다는 식의 ‘식민지근대화론’과 맞닿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1960~80년대 세계 경제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아시아권은 한국ㆍ일본ㆍ타이완ㆍ싱가포르 등이 대표적이고, 유럽에서는 서독을 비롯 서유럽 국가들이 이에 속한다. 한국의 경우 해방 이후 대학을 우골탑이라고 부를 정도의 강력한 교육열이 배출한 우수한 노동력, 장면 민주당 정부가 준비한 경제개발 계획, 소련의 견제를 목적으로 지원한 미국의 경제 원조, 35년 식민지배의 댓가로, 그마져 ‘독립축하금’ 명목의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 달러의 기금, 5천 명이 희생된 베트남 파병군인의 핏값, 박정희 집권 초창기 방위비 부담이 크지 않았으며, 1960~1980년대 미국의 호황에 따른 반사이익,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농민희생의 저곡가 등으로 달성한 경제발전의 과실인 것이다.

 경제발전은 결코 박정희 1인의 공적일 수 없다.
 지도자의 역량과 국민의 역량을 혼동하는 것은 과학적인 평가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인권이 유린되었으며, 지역간ㆍ계층간ㆍ산업간의 심각한 격차가 생기고, 소수의 재벌기업과 정경유착의 결과로 1%의 특권층이 형성되었다. 지금 한국사회의 심각한 위화감과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현상은 박정희 시대의 산물이다. 굳이 ‘박정희 모델’로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라면 수출진흥정책과 중화학 육성에 있다고 하겠다.

 박정희는 대단히 복잡하고 복합적인 인물이다.
 본명 박정희에서 만주군 시절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다시 일본육사 시절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창씨개명의 과정이 그렇고, 대구사범 70명 중 69등으로 졸업하고, 만주군관학교에서는 졸업생 240명 가운데 1등을 차지하고, 일본육사에서는 우등생이 되었다. 그는 아무나 들어가기 어렵던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가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 재직 중에 만주군에 혈서를 쓰고 지원한다. 일본군 장교였다가 해방 후 광복군에 편입하고, 남로당 군사책임자에서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는가 하면, 헌정질서를 유린한 쿠데타 주역이 집권 후에는 유신헌법 개헌주도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정치학자 전인권은 박정희를 민주주의가 뭔지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뜻에서 ‘몰(沒)민주주의자’라 하고, 전재호 교수는 ‘반동적 근대주의자’로 규정하고, 언론인 조갑제는 ‘서민적 반골정신’을 들었다. 법학교수 한상범은 ‘철저한 기회주의자’로, 역사학자 최상천은 ‘일제도 이루지 못한 진짜 천황주의자’로 진단한다. 박정희의 육사 시절 3년간 동거했던 이현란은 ‘화장실에 가도 엿보는’ 불안심리자로 증언한다.

 18년 5개월 동안 절대군주처럼 군림했던 박정희는 김영삼 정부의 경제실패로 신화처럼 부활했다가 그의 딸 박근혜의 실정으로 소멸되어 가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난 세월 박정희 아류들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는 그를 신격화했고, 마침내 신화로 자리매김되다가 그의 딸의 집권기에 실상과 허상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홍구 교수의 지적이다.

 “그래도 박정희가 경제는 성장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주장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박정희 같은 독재를 하고도 경제를 성장시키지 못한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나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버마의 네윈 같은 독재자들과 비교할 때 쓸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박정희의 최대 피해자 중의 하나인 전 대통령 김대중은 박정희의 공적이라면 “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동기부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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