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35회] 처조카사위 김종필의 협력

2019.02.23

5·16 다음 해인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만난 김종필.


육사 8기생들 중에는 3ㆍ15부정선거와 군수뇌부의 부패타락을 지켜보면서 군의 정군운동을 추진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박정희의 의도는 이들과 달랐다. 혼란기를 틈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쟁취하려는 생각이었다. 


8기생들은 박정희의 처조카 사위인 김종필을 리더로 삼아 박정희 곁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김종필은 군하극상사건으로 1961년 2월 4일 구속되었으나 2월 8일 석방과 동시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군복을 벗은 김종필은 비교적 자유로운 신분에서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박정희의 꿈은 영관장교들의 ‘정군운동’과는 결이 달랐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려는 욕망을 키워왔다. 그래서 육사 8기생 중심의 정군운동파와 손을 잡았다.


1960년 가을에 김종필 중령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 장교들과 박정희의 마음에서는 쿠데타의 꿈이 다시 태동하고 있었다. 양쪽은 곧 김종필을 매개로 연결된다. 김종필 그룹은 16인 항명사건으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는 입장에서, 박정희는 미군으로부터 압력을 받는 입장에서 군사혁명이란 하나의 탈출구를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군복을 입고 있는 동안에 거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타도를 위한 계획을 추진하다가 4ㆍ19혁명으로 목표가 사라진 뒤에는 군부 숙청을 새 목표로 하여 뛰었으나 이것이 반격을 부른 것이다. 친미적인 장면 정부가 자신의 예편을 요구하는 미국측 압력을 언제까지나 막아 줄지도 자신이 안 서는 대목이었다.


박정희는 불안하고 조급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이유로 거사하려던 것이 4ㆍ19혁명으로 명분을 잃고, 장면 정부가 민주적 개혁을 시도하면서 사회혼란이 수습되어 가고 있었다. 여기에 그의 쿠데타음모 정보를 입수한 미국측에서는 부단히 수감 또는 예편을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박정희는 변신의 귀재에 속한다. 기회를 포착하는 데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박정희의 변신에 대한 한홍구의 지적이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해방 직후에 광복군에 가담한 것, 세 번째는 남로당에 가담한 것, 마지막으로는 여순사건 이후 단행된 숙군과정에서 다시 한번 극적인 변신을 해 살아남은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 곡절이 많다지만 박정희 만큼 변신을 자주한 이도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이 급히 변하다 보니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시류에 휩싸여 변할 수 있다. 세상이 변하는데 옛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이 미덕은 아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변신은 횟수도 그렇지만 남다른 데가 있었다. 앞의 세 번의 변신은 불행한 기회주의자의 막차를 탄 변신이었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기회주의적 속성은 군내부의 재사로 알려진 김종필이 예편되면서 더욱 활력을 찾게 되었다. 김종필의 증언.


군에서 쫓겨날 땐 엉엉 울었지만 그때 안 나왔다면 거사를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강제 예편됨으로써 나는 시간의 여유가 생겼고 누구와도 만날 자유를 얻었다. 이 여유와 자유가 혁명을 설계하고 조직하고 일으키게 한 자원이었다. 군에서 나올 때 받은 퇴직금은 90만환. 지금으로 치면 한 1,000만원쯤 될까. 이 돈도 모두 거사를 준비하는 데 썼다. 아내의 곗돈도 타서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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