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39회] 일본 기시와 이케다가 미국 움직였다는 주장도

2019.03.06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의 만남 1961년 11월, 일본 수상 관저에서 만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왼쪽) 오른쪽은 이케다 하야토 당시 수상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집


미군동군사령부(도쿄)에서 근무한 바 있는 재일교포 지식인 정경모의 주장은 색다르다. 


쿠데타 초기에 진압을 주장했던 미국이 일본의 정계 실력자 기시와 이케다의 작용으로 이를 용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식자들 일부에는 미국 CIA 부장 앨런 덜레스가 한 “나의 재임중 가장 성공한 업적은 박정희 쿠데타였다”는 발언을 들어 미국이 말하자면 박정희를 사주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한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으나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앨런 덜레스의 발언은 자기가 쿠데타를 조종했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박정희 쿠데타를 와해시키려 했던 주한미군(펜타곤)이나 미대사관(국무성)과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면서 미국은 쿠데타를 인정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방침을 이끌어갔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으로서는 주한미군이나 주한미대사관 보다는 CIA와의 연결이 훨씬 더 밀접했을 것이고 ‘미국이 지지하는 정부는 장면 박사의 합법정부뿐”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하던 미군사령관 맥그루더와 대리대사 마샬 그린이 불과 며칠 사이에 슬그머니 그 주장을 철회하고 물러선 이유는 박정희를 살려야 된다는 CIA 주장을 받아들인 탓이며, 더 나아가서 미국 CIA가 모종의 확신을 가지고 박정희를 옹호한 배후에는 일본의 기시와 이케다 액시스의 작용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은 의심할 여지없이 정확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일본인들은 CIA의 채널을 통하여 급한 불을 끄고 우선 박정희를 살려놓고서 한 달 후의 이케다 - 케네디 회담을 실현시킨 것이다.


전 <워싱턴포스트> 기자 돈 오버도퍼는 미국이 박정희의 쿠데타를 인정하게 된 배경을 기술한다.


미국은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가 61년 군사 쿠데타의 지도자로 급부상하자 우려를 금치 못했다. 하우스먼은 박정희의 요청을 받고 몸소 워싱턴의 고위 관료들을 만나 그의 젊은 시절의 불미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주한 미 대사관은 박정희가 비밀 공산당원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일축하는 보고서를 미국무부 앞으로 발송했다. “만일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한다면 과거 자신들을 배반하고 동지들의 명단을 넘긴 그가 가장 먼저 숙청 대상이 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박정희의 정적들은 그의 좌익활동을 시비했지만 이후 강력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누구도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1970년대 초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엘리자베스 폰드 특파원은 박정희의 과거를 언급하는 기사를 작성했다는 죄로 남한 입국을 금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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