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58회] 부정선거규탄시위 동베를린사건으로 덮어

2019.04.16

박정희는 1967년 5ㆍ3 대통령선거와 6ㆍ8 국회의원 총선을 통해 제3공화국의 2기를 호기있게 출범시켰다. 


6ㆍ8총선에 대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야당과 학생들의 규탄시위가 거세게 전개되었다. 학생들의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6월 15일 전국 28개 대학과 57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7월 3일에는 1만 4천여 명의 대학생이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전개하고 고등학생들까지 가두시위에 나설 움직임이 보이자 정부는 이날 서울시내 모든 고등학교를 무기 휴교시키고, 7월 4일에는 전국 대학에 조기방학을 실시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을 비교육적인 방법으로 대처한 것이다.


6ㆍ8 부정선거에 대한 학생ㆍ야당ㆍ국민의 비판여론이 비등하자 박정희는 휴교령과 조기 방학을 통해 저항을 억제하는 한편 정세의 반전을 위해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역대 독재자들이 위기에 몰리면 예외없이 해온 안보 수법이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7월 8일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의 대남적화공작단 사건>, 세칭 <동백림사건>을 발표했다. 


김형욱은 발표문에서, 과거 유럽에 유학했거나 유학중인 대학교수ㆍ유학생ㆍ음악가ㆍ화가 등 지식인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공작단에 포섭되어 1958~67년 평양에 가서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후, 거액의 공작금을 받고 동베를린을 왕래하며 이적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뒷날 재조사에서 대부분이 허위로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구속 107명, 학계ㆍ예술계ㆍ문화계의 저명인사 등 관련자가 194명에 이르렀다. 검찰은 이중 66명을 기소하고 1967년 12월 13일의 선고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는 국가보안법ㆍ반공법ㆍ형법ㆍ외환관리법 등을 적용하며, 조영수ㆍ정규명에 사형, 정하룡ㆍ강빈구ㆍ윤이상ㆍ어준에 무기징역, 최고 15년까지의 실형 13명, 선고유예 1명을 포함하여 3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1967년 7월 서울 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동백림 사건과 관련, 열렸던 첫 공판에서 윤이상(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그의 부인 이수자(첫 번째)씨가 기립해있다.


검찰은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했지만 1심에서는 13명에게만 인정되었고, 2심에서는 7명, 최종 3심 이후로는 아무에게도 간첩죄가 유죄로 인정되지 않았다. 


“특히 대법원은 피고인들이 해외 유학생의 명단이나 남한의 막연한 실태 정도를 북한 사람들에게 알려 준 것은 구체적인 군사기밀을 제보한 것이 아니므로 형법 98조의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제2조의 군사목적 수행 등을 적용한 것은 잘못한 것이며,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실행 의사나 목적 없이 귀국했다면 반공법 제6조 4항의 잠입죄를 적용할 수 없는데도 뚜렷한 증거에 의하지 않고 사실을 인정한 점은 위법이라고 판시하여 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이 때문에 대법원 판사들을 비난하는 벽보가 붙고 협박 편지가 배달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2007년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진상이 밝혀졌지만, 6ㆍ8부정선거 규탄시위는 이미 사위어진지 오래였다. 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안보사건으로 덮으려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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